Chapter 2-8. 협상의 끝
본사에서 협상을 빨리 끝내라는 재촉이 왔다. 다들 얼마나 힘들겠나.
골치 아픈 걸 끌어안고 있으면 매번 회의 때마다 답답한 기분으로 마주 앉아야 하니 더 그렇다.
그래도 현지에 나와서 직접 상대방 외국인 얼굴 마주하고 긴장 상태에서 계속 얘기하는 나만 하겠나.
본사 임원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지사장님은 성급하게 언제까지 끝내겠다고 약속 (commitment)를 해버렸다.
바보.
협상은 조급한 사람이 지게 마련이다.
이제 나는 저분이 밉지 않다. 그냥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저분은 저런 사정이고 저렇게 나오니 상수로 놓고, 어떻게 대응하고 이 상황을 풀어갈지만 생각한다.
어릴 때처럼 화나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하면서 싸우고 속 상하고 그러기가 싫어졌다. 그렇다고 실제 도움 되는 것도 아니고 팀워크만 깨지고 나만 손해인 경우가 많았다.
삶과 경험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든다.
또 일이란 것이 참 희한한 게 죽어라 난리치고 할 때는 잘 안되고 이상한 일이 많이 발생하는데, 갑자기 스르륵 풀려 버리기도 한다.
요행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하다 보면, 방법을 계속 찾다 보면 답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지사장님은 말만 한 것이 아니었다.
본사 복귀 후 자리가 걸려 있어서 그런지 눈빛이 돌변했다.
상대방 본사 담당자를 만나면 보통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기본 30분은 나누고, 일 얘기 잠깐 하던 양반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피크는 그날이었다.
“오늘은 뿌러 뜨려야겠어요.”
뭘 뿌러 뜨린다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협상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그날 지사장님은 그야말로 불을 뿜었다.
3시간 넘게 그동안 있었던 일, 우리 주장과 근거, 상대방 주장에 대한 반박, 지금 협상을 끝내야 하는 이유, 앞으로 현지에서 사업 협력과 방향.
그냥 있는 말, 없는 말 다 쏟아내었다.
‘호오, 이게 상대방 질리게 하는 방법인가.’
상대방 퇴근 시간이 다 되어도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오늘 끝장을 보자는 결연한 의지.
“샌드위치 먹을래?“
상대방 대답은 듣지도 않고,
대기하고 있는 기사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 수 이상으로 사 오라고 말하고,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도 설명과 조정 노력은 계속되었다. 너무 힘들어 보이면 내가 중간에 들어가서 우리 입장 설명을 보완했다.
“알았다.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얘기하자.“
“아니, 오늘 끝을 보자 (finalize).
매번 만나서 같은 얘기 반복하지 말고 오늘은 정말 도장을 찍자.“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이어갔고,
“알았다. 그만하면 다 알았으니, 내가 생각하는 조정안은 이 안인데, 내부 협의하고 결과를 알려주겠다.”
그제야 지사장님은 고맙다 하며 자리를 떴다.
이것이 한번 하겠다고 하면 끝장을 보는 한국인의 집념인가. 자원 하나 없는데 세계 10대 무역 강국을 만든 나라. 이렇게 현지에서 부딪히며 죽어라 일하고 협의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치찌개나 한 그릇 먹고 들어가지.”
결국 오늘도 김치찌개에 소주였다.
그날의 행동이 협상 종결 의지를 잘 전달했는지 다음부터 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금액이 협상 가능한 범위 (range) 안에서 조정하는 수준이었고, 주요 조건들도 하나하나 계약서 문안으로 완성되어 갔다.
물론, 나는 죽어났다.
마지막으로 가는 것이 다들 느껴졌는지 본격적으로 모든 것을 나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빠뜨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막판 스퍼트들을 하셔서 날 당황하게 만들었다.
“Sr. C. 다 합의가 되는 마당에 그동안 안 하던 얘기를 왜 들고 와. 협상을 종결하자는 말이야, 말자는 거야.”
“협상 종결을 해야 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 협상과 관련 없는 게 있니? 이참에 다 끝내야 너나 나나 손 털고 잊어버릴 수 있는 거잖아, 안 그래.
다음에 또 이 건으로 이렇게 마주 앉을래?“
나도 반 사기꾼이 되어가는 건지, 미쳐가는 건지 거의 방언 수준으로 막 던지고 있었다.
그래도 면피성으로 막판에 다 던지는 내용 중 어젠다로 테이블에 올리지 않았을 경우, 내가 빠뜨렸다고 욕먹을 수 있어, 해당 내용은 무조건 이메일로 우리 측 담당자와 책임자들을 모두 cc로 해서 던지고 사인하는 회의록 (action list)에 명기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 종일 앉아서 이 쟁점, 저 쟁점 마무리 합의를 하기 위한 협의를 이어갔다.
말이 좋아서 협상이지 결국 하루 종일 앉아서 머리 쓰고 입 씨름하면서 예민한 계약서 워딩을 서로 유리하게 쓰려고 아옹다옹하다 합의하고 마무리하는 고된 과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막판에 실수하면 나중에 고생하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협상에 임했다.
체력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앉아 있다가 힘들면 일어서서 듣다가, 너무 졸리면 회의실에 비치된 커피, 차, 과자, 과일을 주어 먹으며 정신을 차렸다.
상대방 나이 든, 높으신 영감님들은 종종 졸기도 했다.
그만큼 며칠씩 하루 종일 진행하는 협상은 고되고 힘든 일이었다.
그냥 앉아서 잡담 떠들기만 해도 힘든데, 정신을 쏟고 큰 금액의 건을 예민하게 논쟁하며 다루는데 오죽하랴.
본사에서도 ‘그 부분은 버텨야 한다.’ 어쩌라 저째라 말은 많이 하는데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말만 했지, 받아들일 상대방이 납득할 논리와 근거까지는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면 그걸 또 전달하지 않으면 안 되니 전달해서 회의록과 계약서에 반영하려고 애를 썼다.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가며 최대한 이렇게라도 좀 써 달라고 애걸복걸 부탁하기도 했다.
한 아이템을 갖고 오전 내내 협상을 한 적도 있었다. 사공이 많다 보니 각자 의견을 다 내고 조율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상대방 고위직 협상 책임자가 마침내 화를 냈다.
“협상을 마무리하자는 거냐 말자는 거냐
이 작은 것 하나 가지고 이렇게 오래 시간 끌면 일이 되겠냐.
여기 앉은 우리 측 변호사들 시간당 얼마를 내야 하는지 아느냐?“
고도의 압박이었다.
우리에게도 빨리 끝내려면 양보하고 넘어가라.
자기 측 외부 고용 변호사들에게도 더 분발해서 상대방을 설득시켜서 빨리 종결하라는 동시 타격.
그럴 때 상대방에게 넘어가서 얼떨결에 합의하면 안 되었다. 그럴 땐
“알았다. 우리 머리 좀 식히자.
지금 너무 열기가 올라와 있으니 서로 양보해서 합의해야 하는데 각자 입장만 이야기하다 보니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고 말하며 한발 빼며 내 문제가 아니라 너네 문제도 있어로 프레임을 만들어 놓고 다시 협의 종결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드디어 이니셜을 했다.
(initial - 회사 대표가 정식 서명하기 전 합의된 버전에 실무 담당자가 양사 합의가 끝났음을 서로 한 장씩 넘겨가며 확인하고 사인해두는 행위)
그리고 해당 원본을 각자 한부씩 나눠갖고 지사 사무실로 돌아왔다.
“수고했어요, C 과장님.”
“네, 수고하셨습니다.”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pdf file과 함께 주요 합의 사항을 정리해서 본사 등에 보고해야 했다.
회의 내용을 복기하며 이니셜 한 계약서를 한번 더 확인하고 정리를 해서 관련된 내부 모든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최종 확인도 같이 해달라는 취지였지만, 현지에서 직접 부딪히며 챙기는 나만큼 열심히 보는 인간은 없었기에 수정사항은 거의 없을 거였다.
가끔 존재감 보인다고 이상한 소리를 하는 과욕형 인간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협상 과정을 이야기하며 누르면서 처리하면 되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크게 한숨을 내쉬고 나니 전신에 긴장이 풀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당장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고, 머릿 속도 하얘지는 순간.
후련하면서도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면서도 오늘만큼은 다 내려놓고 싶은 마음.
이런 부분은 다음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메모만 해두고 오늘은 정리하고 집에 가서 씻고 푹 자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말 많이 하고 힘들었는데 밥 생각마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