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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드라마 Aug 19. 2021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아침, 눈 뜨자마자 강아지에게 '잘 잤어?' 또 한 번 인사할 수 있는 것

그 어떤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시작하지는 않은 것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듯 내일도 당연히 반복될 거란 생각에 쉬이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산책길에 마주친 들꽃의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

어쩌다 생각난 인연에게 주저 없이 안부를 물어보는 것

어제 갔던 집 근처 편의점을 오늘도 어김없이 들르는 것

내일의 날씨를 체크하고 미리 우산을 챙겨두는 것

틈틈이 써뒀던 글들이 조금씩 쌓여가는 것

수많은 눈물로 바다를 만들어가는 것







동네 길고양이의 얼굴을 익혀가는 것

끼니때가 되면 뭐라도 입안에 밀어 넣어야 하는 것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

평범한 일상 속에 어쩌다 한 번씩 즐거운 일이 생기는 것

진정한 내 모습은 네모난 화면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들지 못한 시간이 쌓여가는 것

모기와 전쟁을 치르며 다시금 여름이 왔음을 느끼는 것

가끔 지난날의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는 것

소박한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가는 것

먼저 미안하다 말하는 법을 배우며 어른이 되어가는 것


.

.

.

.


온 힘을 다해 미워했던 사람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지는 것

배수구에 쌓인 머리카락을 오늘도 부지런히 치워내는 것

며칠 전까지 잘 보였던 버스정류장의 글씨가 흐릿해졌음을 느끼며 안경을 맞추러 가는 것

너무도 찬란해 아름답기만 하던 햇살이 가끔은 지독히도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

지난날 나의 잘못을 일순간 반성하게 되는 것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수없이 전화기를 들었다 이내 내려놓고 마는 것

한 번씩 이웃집 강아지와 마주치면 '오늘도 잘 있구나-' 안도하게 되는 것

너무나 좋아하던 음식도 매일 먹으면 질린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것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부지런히 먼지가 쌓여감을 느끼는 것

차가운 눈송이가 발갛게 달아오른 볼 위에 닿는 족족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다 초라함에 한없이 작아지는 것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 남을 속이는 일 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욕심이 많아지는 만큼 포기하는 것도 많아지는 것

매일 밤, 그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별자리를 발견하는 것

왜인지, 딱딱한 음식을 점점 멀리하게 되는 것

슬픈 음악을 틀어놓은 채 우울감에 잠식당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서운함에 마음에도 없는 나쁜 말을 잔뜩 내뱉은 내 자신이 한없이 미워지는 것

다른 이가 써내려간 글을 읽으며 공감하는 일이 점차 많아지는 것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데에 대한 죄책감 정도는 가질 필요가 있는 것

모두가 잠들었을 까만 밤, 불 켜진 건물들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지는 것

누군가와 싸우고 난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

여름 내내 시끄럽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드는 것

인간관계에 초연 해지는 것





누군가에겐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그 자체만으로 괴로운 것





지난날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음을 이제는 알면서도 바보같이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것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가는 것

다음 계절의 과일을 맛보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며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

손바닥 위에 놓인 알약의 개수가 서서히 늘어가는 것

하고픈 말을 다 하며 살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점점 입이 무거워지는 것

어째서인지, 아는 음악은 많아지는데 듣게 되는 음악은 점점 더 적어지는 것

엄마가 왜 과자를 싫어하셨는지 어느 순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극심한 갈증 끝에 마신 차가운 물 한 모금이 식도를 타고 흘러감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

소중한 기억을 가슴속에 품어두고 견디기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것









부모님의 머리카락이 문득 하얗게 희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끝내 하지 못한 말이 가슴 깊이 맴돌다 눈물로 터져 나오는 것

쥐 죽은 듯 고요한 적막 속에서 스스로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듣는 것

남 모를 비밀이 늘어가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처절한 절규를 지켜보는 것

얼굴에 난 이불 자국이 예전처럼 금방 사라지지 않아 어쩐지 우울해지는 것

지난날을 오롯이 겪어왔음에도 조각난 파편의 기억만 떠오르는 것

엄마도 나처럼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리고 그 소녀는 여전히 그녀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




사랑한다는 말을 아낀 지난날을 뒤늦게 후회하는 것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후회를 반복하는 것

아버지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가끔 따뜻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것

지금의 이 시원한 바람을 내일도 느낄 수 있어 새삼 다행이라 여겨지는 것

나 자신보다 소중해져 버린 그 무언가를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

사실은, 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며 한없이 감사하게 되는 것

그토록 사랑하는 이를 조금씩 잃어가는 것

사실은,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것

그렇게, 함께 늙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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