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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연개소문과 김춘추 (2)

by 철가면

3.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과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이끌고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구려의 위상을 떨친 시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대중들에게 노출되고 흔히 생각하는 민족을 위한 위대한 영웅이었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연개소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평가가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임금을 죽이고 대막리지에 올라 스스로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유교 사상이 들어온 고려 중기 이후에 지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연개소문의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한 편입니다. 중국 측 기록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역시도 그 저서에서 연개소문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 당시까지는 존재한 기록이던 『고려고기』란 기록을 참고하고서도 연개소문은 난신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리학적 사상을 국가 주요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의 평가는 더욱 낮아집니다. 임금을 죽인 쿠데타를 벌였던 이유가 강하게 남았던 탓입니다. 그러나 그의 업적과 능력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높은 편이기는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이룬 업적과 능력에 조금 더 집중하고 발굴하여 포장한 것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진 이는 바로 단재 신채호입니다. 신채호는 연개소문을 7세기 당시의 국제대전에 중심인물로 평가합니다. 외세에 당당히 맞서 위대한 승리를 이끈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죠. 다만 신채호의 이런 연개소문 띄우기는 현대에서는 조금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로 현대에서는 뛰어난 능력과 업적은 인정하고, 임금을 죽인 쿠데타에만 집중했던 과거의 통념에서 벗어나 국제적 정세와 식견에 대한 평가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능력은 인정하지만, 대국적인 판단과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에 의해 나라가 분열되어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학계의 발굴과 평가에 대한 부분들의 성과는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이들에 의해 연개소문이 매우 과대평가되어 왔으며, 그리고 그런 연개소문을 발견한 신채호까지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봤을 때, 신채호의 이런 민족주의적 사상은 민족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의 사상적 역할을 했다는 것에는 분명 고평가 받아야 함이 마땅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조금 더 냉철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흔히 얘기하는 국뽕적 사관을 가진 이가 바로 신채호였던 까닭입니다. 신채호의 사상과 역사관은 매우 복합적이고, 당시의 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에 필요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해 준 것이기에 그의 사상과 역사관을 함부로 국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일제치하라는 시대 상황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주기 위함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신채호의 역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각종 항일운동이 실패하는 과정에서 살펴봤을 때, 민족의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광복이 되고, 나라의 경제 발전이 이루어진 현재에서도 이런 민족주의적 사관을 숭상해야 하느냐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민족주의 사관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사관을 내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일본이 1930년대 흔히 이야기하는 군부 쿠데타 세력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지독한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국사 교육이 일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반발에 집중하는 교육을 벌이고 있는 까닭입니다. 왜 일본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지에 대한 냉철한 분석은 없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제국주의로 들어선 국가였으며, 이에 대한 일본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일전쟁의 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을 할양받자, 일본의 자신감은 하늘을 뚫을 듯 넘쳤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본은 최초의 실패를 맛봅니다. 바로 삼국간섭을 통해 요동을 다시 반환한 것이죠. 거기에 조선이 친러성향을 보이자 을미사변을 일으킵니다. 이후 러일전쟁의 승리와 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승전국이 되자 일본의 자신감은 다시 한번 흘러넘칩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이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견제에 대해 일본정치계가 굴복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이에 반발해 수많은 총리들이 암살당하고, 일본 군부에 의한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되고, 일본은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적 사상이 온 나라를 뒤 삼킵니다. 여기에 미국의 각종 견제책으로 인해 나라가 경제적 위기에 빠지게 되자 이를 타개하고자 한 선택이 바로 전쟁입니다.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중일전쟁을 벌이고, 진주만을 공습하며 태평양 전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이 나라와 국가에 의해 희생이 당연시되어 버립니다. 전쟁의 늪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필자가 비교적 길게 일본의 근대사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의 잘못된 민족주의사관, 조금 더 냉정하게 변질된 형태의 민족주의사관이 현재 대한민국에 나타나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그 민족주의 사관의 중심에 있는 이가 바로 신채호이고, 그 신채호에 의해 다시 재평가된 인물이 연개소문이었던 까닭입니다. 이는 신채호 한 사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신채호라는 인물을 단순하게 고평가 하고 그의 사상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가르치지 않은 까닭입니다. 신채호가 주장하는 我와 非我의 대결이라는 민족주의 고취 사상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해석하고 평가하며, 단순하게 가르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런 오래된 프레임이 결국은 연개소문의 대한 과장된 평가와 그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김춘추의 대한 과소평가로 이어지게 되고 반일이라는 형태로 현대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주의 사관이 말입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매우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노태돈 교수는 그가 외세에 맞서 뛰어난 지도력과 단결력으로 여당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었을지언정, 그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국가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은 부족했다고 평가합니다.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소장인 김용만 소장 역시도 그의 저서 다시 쓰는 연개소문에서 그의 후계자가 연개소문만 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은 연개소문의 잘못이 아니다고 하면서도, 그가 보다 장기적인 국가전략을 세우는 것에 실패했으며, 권력을 왕에게 반환하지도 못했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중국에 비해 열세일 수밖에 없는 국력과 한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는 냉정한 평가도 함께합니다. 이처럼 학계에서는 민족주의 사관의 대한 한계와 폐해를 명확히 하고 이에 대해 논의가 되지만, 이것이 적극적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개소문은 여당전쟁에 맞서 고구려를 승리로 이끈 위대한 민족의 영웅이며, 김춘추는 외세와의 야합으로 민족의 자긍심과 영토를 잃어버린 비겁한 지도자로 손가락질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2000년대 중반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불어왔던 공중파 방송의 고구려 역사 드라마는 이런 대중적 평가에 부채질을 합니다. 연개소문은 위대한 민족의 구세주로 평가하고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민족을 분열시키지 말라며 일침을 날립니다. 드라마 대조영에서도 마찬가지의 모습을 보입니다. 주인공 대조영이 김춘추나 김유신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의 후손 격인 문무왕에게 민족에 대한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에서도 신라군은 같은 민족인 고구려군의 안위 따위는 무시한 채 승리라는 공적에만 목매는 소인배적인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문무왕에게 일침을 가하고, 고구려군을 희생시킨 장군을 베어버리며 사이다적 모습을 묘사하지만 실상은 잘못 해석된 민족주의 사관인 것입니다.


그나마 삼국사기나 활동 범위가 한반도에 있어서 사료등이 많은 김춘추에 비해 고구려가 끝내 패망하고, 우리 역사의 주무대가 한반도로 국한된 이후 연개소문의 대한 평가는 매우 박했으며, 또한 자료 역시도 매우 부족합니다. 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문제로 수많은 논란을 야기합니다. 국사 교과서에서 발해가 우리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는 부분들은 정확한 역사적 근거라고 하기에는 그 신빙성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발해가 우리 민족이며 그 정체성이 발해 멸망 이후 고려로 귀부해온 이들에 의해 그 문화와 계승을 이어오고 있다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발해가 우리의 역사이고, 이를 자국의 역사로 끌어드리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분노하면서도,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언급해야 하는 부분들은 제외한 채, 몇 가지의 형식적인 근거만을 제시합니다. 이러다 보니 어설프게 역사를 공부한 이들에 의해 발해가 우리의 역사가 맞느냐고 따지고 들며 곡해 해석하는 이들이 발생합니다.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특히나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태왕이 아닌, 독재자이기도 했으며 거기에 왕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했다는 이유와 그의 사후 끝끝내 고구려가 멸망을 했다는 점은 조선 이후부터 매우 박한 평가를 받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연개소문의 고평가가 위험한 일 중 하나는 위의 노태돈 교수의 평가를 이야기했듯 그가 어떤 장기적 국가 프로젝트를 진행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벌였던 이유가 일부 드라마나 대중들이 이야기하듯 굴종적 대당전략이라고 했다면 그는 더욱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드라마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자랑스럽고 위대한 고구려가 서토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다라고 주장하며 쿠데타를 이끌었다는 부분에 치중한 나머지, 쿠데타 이후 연개소문이 어떤 국가적 전략을 가지고 국정 운영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과 추론이 전무합니다. 그저 고집스럽게 서토로 가야 한다고 주장만 할 뿐, 실제로 어떤 국가적 큰 그림을 그리는 부분들에 대한 내용을 그리지 못합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고구려와 북방민족, 그리고 백제와 왜를 잇는 남북세력을 만들고, 신라와 수, 당으로 이어지는 동서세력의 국제정세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백제가 어느 정도나 고구려의 국제적 그림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일부 영류왕 비판세력과 연개소문 옹호세력의 말처럼, 굴종적 외교를 펼쳤다고 이야기하지만, 이 역시도 결과론일 뿐입니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결국 당태종에게 침략의 원인만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연개소문이 대당전쟁을 준비하면서 세웠던 대전략은 요동성이 함락되고, 그가 요동의 방어를 보완하기 위해 파견된 군대가 격파당하고, 백암성, 비사성 등이 당군에 의해 함락되거나 항복하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고구려와 연개소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이게도 양만춘으로 흔히 알려진 안시성주가 안시성에서 당 태종을 묶어주지 못했다면, 고구려는 더 큰 피해, 더 나아가서는 국가멸망의 위기에 직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이 고당전쟁의 영웅 연개소문을 영웅시하면서 드는 야사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요택을 건너며 퇴각하는 이세민을 끝까지 쫓은 연개소문입니다. 당태종 이세민이 처절하게 도망가며, 연개소문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는 이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느끼게 합니다. 거기에 당태종이 죽으며 고구려 원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도 영구히 그만두라고 했다는 형태로 전해집니다. 이는 당태종이 죽기 전 시행하려고 했던 고구려 원정을 중지하라는 의미이지, 영구히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이 구절을 들며 당태종이 고구려와 연개소문에게 두려움을 떨었다는 의미로 전달됩니다. 사료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져와 확대 해석을 통해 왜곡이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류왕의 주장도, 대당강경책을 주장했던 연개소문의 주장도 각각의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영류왕의 정책을 밀어붙였어도 과연 당나라가 공격하지 않았을지, 연개소문이 조금 더 대국적 정책을 구상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가 과연 멸망하지 않았을지는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에 따라 민족적 자긍심을 올리기 위한 위인전이 쏟아지게 되는 상황에서 신채호가 연개소문을 주목합니다. 외세를 무찌르고 우리 민족의 강한 의지와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한 인물로 연개소문 만한 이가 없었으며, 또 김춘추를 외세의존적인 음모가로 평가한 것은 연개소문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김춘추였던 까닭입니다. 또한 이 시기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을지문덕 이야기와 외세를 물리치는데 일조했던 역사적 인물들이 부각된 것은 고도의 계산된 평가입니다. 그들의 활약상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외세의 침략에 대처했고 위기를 극복해 냈는지를 끊임없이 주지 시키고 민중들에게 끝까지 저항하고 포기하지 말라 독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채호는 우리의 역사 속에서 자주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중시했는데, 비록 일반 대중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묘청의 서경천도사건을 조선사 제일의 사건으로 평가할 정도로 민족의 자주성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상황에서 역사로 할 수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민족주의사관이 널리 퍼지고 장려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근거했습니다. 일제의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는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알리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단통치가 3.1 운동으로 실패하고, 교묘한 분열책인 문화통치와 이어서 민족말살정책으로 일제의 식민통치가 악랄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런 민족주의사관의 전파에도 분명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의 지배를 받은 우리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패배주의가 만연합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근대화에 성공하고 아시아의 유일한 열강이 된 일본은 역설적으로 서양 열강들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가집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미국과 서양 열강들에게 지속적인 견제를 받았던 일본은 끝끝내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패배주의와 극단적인 전체주의, 그리고 대동아 공영이라는 민족주의 사관이 합쳐져 발생한, 일본 입장에서는 최악의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몇몇 극단주의자들이긴 하지만, 이들은 미국과의 1:1 전쟁을 한 일본을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일본이 저렇게 강대해지는 동안 우리 민족은 무엇을 했느냐는 자조 섞인 푸념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매우 위험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으며, 책의 후반부에서도 언급할 삐뚤어진 민족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가 하면 영광이고, 남에게 당하면 굴욕이며, 치욕이고 비난을 하게 되는 내로남불적 역사관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몇몇 극단적 생각을 하는 이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실제로 일본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계획한 것이 아닙니다. 기습적인 작전을 통해 미국의 해군력을 일시 마비시키고, 그 틈을 노려 동남아와 태평양 일대의 지배를 공고히 한 이후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본인들의 세력권을 안정화시키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습적인 진주만 공습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본인들이 최초로 계획했던 항공모함 침몰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승전보에 취해 본인들의 기존의 전략자체의 본질을 망각하면서, 끝끝내 전면전이 벌어지고 이후 가미카제로 대표되는 자살 공격대까지 결성하는 등의 최악의 전쟁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결론은 모두가 아시다피시 처절한 패배로 인해 패전국이 되었지요.


삐뚤어진 민족주의적 사관과 함께 현대에 들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대항마로 방영되었던 고구려 사극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 열렸던 학과 학술제에서는 고구려의 대당(對唐) 전쟁과 이후 건국된 발해의 대조영, 그리고 간도협약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었던 것은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고구려의 영웅 중 한 명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아쉽게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실제 만들어진 결과물은 매우 참담한 수준이었습니다. SBS에서 방영되었던 연개소문은 환단고기로 범벅된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판타지 소설에 불과했으며, KBS에서 방영한 대조영 역시도 주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건들은 방영 후반부에 국한되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색채를 너무나도 강하게 드러냈으며, MBC에서 방영했던 주몽의 경우는 철기문화를 놓고서 외세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 민족과 찬란한 문명을 가진 우리 민족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강조하고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부각해 버려 극 중 내용이 산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여기에 연개소문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그에 대한 기록이 얼마 없는 것도 연개소문에 대한 과대평가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이유입니다. 드라마 대조영에서 병에 시달리는 연개소문의 꿈에 당태종 이세민이 등장해 일갈합니다.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와 문물, 기록을 모두 불사르고 은폐, 조작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왠지 일제에 의해 우리의 모든 사료가 불살라졌다라며 울부짖는 몇몇 유사역사학에 경도된 이들이 주장하는 한국판 분서갱유가 생각나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바로 일제에 의해 우리의 기록과 유물들이 조작되고 은폐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 말이죠. 현대 정치에서도 상대의 대한 중상모략과 검찰수사에 대해 은폐와 조작, 왜곡을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거기에 과거 군부 독재시절 벌어졌었던 검찰의 야만적 탄압 수사에 대한 프레임을 걸고넘어지면서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전히 지배층은 친일앞잡이들이 자리하고 있고, 검찰이나 경찰과 같은 공권력을 믿을 수 없다는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 친일청산이나 민주화 이후에 부패했던 공권력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을 이루어내지 못한 우리 역사의 업보이겠으나,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공권력과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는 이들로 매도하는 것은 과도한 행보로 보입니다.


4. 마치며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한국 고대사의 대한 기록이 중국 측 기록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 삼국사기와 종교적 색채가 강한 삼국유사, 그리고 위서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화랑세기, 그 외의 몇 안 되는 야사와 민간전설 등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고대사 연구에 큰 애로사항이 있습니다. 실제로 필자의 지인이기도 하며 발해사를 연구하시는 분의 글들을 읽어보면 몇 안 되는 사료와 당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이어지는 사실의 대한 추론을 보고 있으면 연구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뇌와 처절한 사료 해석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입니다. 거기에 일제에 합병당했다는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민족주의적 사관이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으며, 그 여파로 인한 연개소문의 과대평가와 김춘추와 김유신에 대한 과소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평가도 결국은 패배주의 역사관이라는 것입니다.


필자가 서문과 지금까지의 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였듯 다양한 사관의 관점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고평가와 김춘추의 저평가 역시도 하나의 사관으로 접근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관점이 더 나아가 패배주의로 직결하고 감정적 대응으로 가는 것을 우려스러운 점이며 매우 염려된다는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감정에 의거한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패배주의와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위주의 역사관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몇몇 인물들이 이런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며 매도하고, 더 나아가 근거와 논리 없는 비판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공은 무시하고 과만 부각하고 그 과가 공을 뒤엎는다는 극단적 사관을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이번장이 연개소문과 김춘추임에도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 민족주의 사관의 폐해와 패배주의적 역사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두 사관이 가지는 감정적 선동의 폐해 때문입니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배경에 맞게 그 당시를 이해해야 하지만, 몇몇 잘못된 역사관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이 일로 인해 우리의 역사가 올바르게 나아가지 못했다는 선동적 행태로 인해 수많은 대중들이 분노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그런 몇몇 편향된 사관의 이들이 미디어에 노출됩니다. 미디어 노출은 곧 그의 말에 대한 신뢰성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그것은 편향적 사관이 계속해서 번져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 역시도 하나의 사관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소개할 때는 한쪽면만 부각해서 설명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공적은 공적대로, 그들의 잘못된 행적은 그 행적대로 평가하고 종합적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로 입체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바라봐야만 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대중들이 내려야만 합니다. 이것이 무조건 옳은 사관이고 나의 말이 옳고, 남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몇몇 선동가들의 주장은 반드시 지양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에 남는 것은 혐오와 분노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혐오와 분노는 곧 지독한 패배주의로 연결되고, 전체주의적 나치즘과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악순환만이 반복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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