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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연개소문과 김춘추 (1)

by 철가면

1. 들어가며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격동의 7세기에서 각각 고구려와 신라를 대표했던 두 인물입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로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출신 왕입니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수와 당과 맞서 훌륭하게 그들을 격퇴하였으나 끝끝내 그의 사후 그의 아들들의 분열에 의해 고구려의 멸망을 막지 못했죠. 김춘추 역시도 진골출신 임금이 되고, 가야 출신의 김유신과 사돈을 맺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의 삼국통일에 초석을 닦았지만, 끝내 삼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아들 문무왕대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했죠. 연개소문과 김춘추는 제각각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의 국가가 생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고구려는 700년의 긴 역사를 마무리했고, 신라는 통일을 넘어 300년을 더 변영한 후, 고려에게 한반도의 패권을 넘깁니다.

그들이 세운 업적만을 놓고 봤을 때는 당연히 중국의 통일왕조에서 수십만의 군사를 무찌른 연개소문이 더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생존은 김춘추의 신라가 했습니다.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두고 대동강 이남의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러나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자주적 통일을 이루고 민족 통합이라는 사명을 달성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함께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순간 김춘추는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노가 되어버리고, 연개소문은 중국 제국에 맞서 싸워 민족의 위대함을 알린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삐뚤어진 민족사관

2000년대 초반 당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나라의 대표 방송사인 KBS, SBS, MBC는 이런 중국의 역사 왜곡에 맞서 고구려 드라마를 각각 제작합니다. KBS의 대조영, SBS의 연개소문, MBC의 주몽이 각각 그것입니다. 드라마의 완성도는 둘째치고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그 이면은 매우 어둡습니다. 이른바 『환단고기』로 대표되는 유사역사학이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죠. 유사역사학은 과거 우리 민족이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중국을 제패하였으며 전 세계에 흩어진 각종 문명이 우리의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수메르 문명도 우리나라의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중국이 각종 역사 유적의 은폐 및 왜곡을 한다는 주장과 함께 말이죠. 이것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1990년대에 꽤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흔히 재야사학계, 이른바 유사역사학계는 이를 두고 주류사학계를 친일 사관으로 가득 찬 노론카르텔이라 욕하며 비난하기 바쁩니다. 이런 위대한 역사를 두고 한반도라는 작은 영토에서의 역사나 공부한다는 것은 위대한 조상의 업적과 위대함을 저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프레임으로 말이죠. 다만, 이것은 대중에게는 크게 공개되지는 않았습니다. 또 재미난 것은 제한적인 PC통신 세대에서마저도 환단고기 추종 세력들은 이미 각개격파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PC통신이 발달하고, 1998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각 가정에 PC가 보급되고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유사역사학자들은 사료적 검증과 진실을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일반인들을 대상을 타깃으로 잡고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합니다. 이들의 전방위적인 대대적 공세에 선동되는 사람들은 제법 많았습니다. 과거 필자가 대학교 시절, 역사학을 공부했다는 사학도가 동아리 발표시간에 이런 환단고기의 사관을 소개하고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발표하기까지 했습니다. 역사학을 전공했다고 하는 이가 이렇게 환단고기에 매혹되는데,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온갖 포털사이트와 역사 관련 사이트에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이른바 환빠들이 난립했습니다. 심지어 심한 경우는 중국의 지명과 우리나라의 지명이 비슷하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은 사실 중국에 있었으나, 중국이 이를 은폐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움직였다, 혹은 중국의 수많은 유적지에서도 한민족에 대한 유물이 쏟아져 나와 공개를 거부했다는 등의 음모론까지 판을 칩니다. 아무리 그들의 주장의 허점과 맹점을 지적해도, 그들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에 반박하는 이들에게 식민사학이라 매도하고 친일파로 치부해 버리는 강력한 무기가 말이죠. 그 어떤 반박과 비판에도 그들은 너희는 식민사학에 물든 일본과 중국의 노예들이다라고 반응합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비판은 초록불로도 유명한 이문영 씨가 그의 블로그와 저서를 통해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여기서 다루고 싶은 것은 바로 삐뚤어진 민족사관입니다. 삐뚤어진 민족사관으로 얼룩진 이들은 우리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며, 김춘추를 비판하고, 고려의 영토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잡으며, 또한 명과 청에 사대를 한 조선을 쓰레기 같은 집단이라 비난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궁금한 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환국 시절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까요. 역사적으로 석기시대에는 나라가 생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위대한 한민족을 부르짖습니다. 설사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거대한 영토를 우리 민족이 모두 채울 수가 없을뿐더러, 그 수많은 민족들과 교류하고 자식을 낳아가는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말 겁니다. 발해가 우리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발해의 정체성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적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국에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에 북조는 소수의 이민족들이 중국의 한족과 동화되어 사라졌으며, 이후 등장한 요, 금, 원, 청 같은 왕조들은 한족과 동화되어 사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자체의 문자나 엄격한 분리 정책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동화되고 그 정체성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백번 천 번 양보해서 환단고기가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거대한 영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정말로 우리 민족인 걸까요? 그들은 이런 이야기에는 침묵합니다. 그리고 비난을 가하죠. 위에서 언급했듯 식민사학의 후예들이라는 노골적인 비난, 조롱과 함께 말입니다.

환단고기가 가지는 최악의 문제점은 바로 내로남불적 사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빠들은 환국의 거대한 영토와 승리만으로 기록된 역사를 보며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은 이렇게 거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위대한 승리만을 해왔는데, 왜 후예들은 외세에게 짓밟히고 패배의 역사만을 가지고 있느냐고 우리 역사를 자학합니다. 이런 식의 역사인식은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패배주의 역사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역사관은 다른 챕터에서 다루었듯이 조선사의 대한 편견과 오해, 조선사를 우습게 보지 말자고 하면서도, 노론카르텔이나 몇몇 인물을 현대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전형적인 식민사관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자, 그럼 하나씩 따져봅시다. 패배주의 역사관은 식민사학의 한 갈래인 정체성론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우리 민족이 한때는 거대한 영토와 역사를 가졌지만, 후대의 조선은 작고 약하며 수없이 외세에 침략받고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환빠들은 이것이 식민사학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조선이 비루하고 보잘것없었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전형적인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진 것이죠.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있는 대한민국은 그 존재자체가 말도 안 되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통성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갑니다. 그들이 환단고기를 신봉하든 신봉하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정체성론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사관이 아니냐는 반론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광복과 정부수립, 그 이후의 역사까지 평가절하하는 것이 결국은 정체성론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은 건국한 이후 500년간 한 발자국도 성장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그 탄생부터가 잘못되어 정치역사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이 두문장에서 주어를 바꿔서 서술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그토록 극복하고 싶어 하는 식민사학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이미 그 평가가 끝난 인물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모 유투버의 단언에는 어폐가 있는 것입니다. 뒤에 이승만과 김구 챕터에서 다시 한번 다루겠지만, 이승만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서문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비판할 부분들은 비판하되, 그의 공과 업적마저도 깡그리 무시하고 비난하는 행위는 멈춰야만 합니다.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공은 공대로 인정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내로남불의 역사관입니다. 흔히 우리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침략만 받아온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를 사랑하지만, 외적의 침입에는 단호하게 맞서는 민족으로 포장되어 왔죠. 네, 맞습니다. 우리 민족의 단합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우리 민족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환빠들은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수많은 이민족을 무찌르고 위대한 영토와 역사를 기록한 배달국의 후손인 우리가 왜 조선과 작금에 이르러서는 강대국의 침략을 받고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는 비관론적인 의식을 가집니다. 거기에 일제의 침략에는 치를 떨면서, 반대로 우리가 다른 민족을 공격하고 정복하는 것은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민족에게 침입받는 것은 그토록 경멸하고 치를 떨며 굴욕적으로 여기면서, 반대로 우리가 다른 민족을 침입하고 그들을 식민지 삼아 영토를 늘리는 것은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 역시 전형적인 자가당착의 오류이며, 내로남불적 역사관입니다. 고구려가 말갈, 숙신을 지배하고, 중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위대한 역사고, 임진왜란이나 구한말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에는 거품을 토하며 분노합니다. 일본의 위안부에는 일본의 거듭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과 베트남 현지여성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에 대해서는 눈을 감습니다. 물론 두 역사적 사건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애당초 오류입니다. 거기에 베트남 정부가 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려고 해도 거부하고 있어 자세한 실상을 알기 어려운 것 역시 사실입니다.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로남불식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사관들이 위험한 이유는 잘못된 과거 독일의 전체주의적 사상이 들어선 것과 그 결이 비슷한 까닭입니다. 패배주의 사관으로 현실을 비관하고 자학함이 민족의 우수성과 위대함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사관과 만나 전체주의 사관으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히틀러와 그의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고 전유럽을 피로 물들게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이 패배주의 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의 만남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된 독일의 패배주의가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한 히틀러의 민족주의 사관과 만나 전체주의적 사상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를 외치며 자만감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한 안타까운 단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김춘추는 정말로 민족의 반역자인가

연개소문과 김춘추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개소문 올려치기와 김춘추 내려치기도 바로 이 패배주의와 민족주의의 잘못된 만남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낸 영웅이고 김춘추는 우리 민족의 주무대를 한반도로 국한시킨 민족의 배신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삼국시대는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여겼을까요. 정말 김춘추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인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백제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배층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민중들 역시도 고구려와 민족의식을 가졌는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고구려와 백제는 일정 시간이 지난 이후로는 서로의 수도를 점령하는 등의 모습으로 소위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층 간에도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흩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죠. 그럼 과연 신라도 과연 같은 민족으로 묶일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우리는 같은 민족이므로 외세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일갈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실소가 나오는 장면입니다. 정말로 같은 민족이었다면 하나로 힘을 합할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요. 왜 같은 민족이라면서 신라를 공격하고 고립되게 만들어 신라가 중국 대륙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는지 의문입니다. 교과서에서부터 신라를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시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신라가 과연 고구려, 백제 등과 함께 삼국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입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설명하는 삼국시대의 조건인 중앙집권화와 율령과 불교 등을 받아들이는 것은 맞지만, 과연 이것을 약 700년에 가까운 세월에 일괄적으로 적용가능한지 여부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멸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와 한반도를 포함한 정세를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가야입니다. 신라가 삼국시대의 한축으로 성장하는 것은 진흥왕 시대부터입니다. 그전까지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에 신라가 한 손 거드는 정도에 머물렀다 정도가 보다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아무튼, 신라 역시도 건국 후 오래도록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어왔고 6세기에 들어 진정한 중앙집권국가 완성에 성공한 후 본격적인 삼국시대의 막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백제와 내분이 일어난 이후, 신라는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다시 돌아와 본다면, 김춘추는 당시의 놓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수(漢水), 즉 한강 지역 쟁탈전 이후 백제와 신라는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됩니다. 백제 성왕 이후 절치부심한 이후 무왕시절에 국력을 회복한 이후, 의자왕 시기 신라와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졌고, 신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다만, 결과는 고구려와의 협상 결렬입니다.

백제의 압박으로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이 함락됩니다. 참고로 대야성은 백제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직공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이 대야성을 점령한 후 신라 경주를 공격하여 왕을 폐하고, 이후 고려와의 팔공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도 이 대야성 함락에 있었습니다. 대야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으나 지금 논하고자 하는 바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바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고 원래대로 돌아와서 살펴봅시다. 아무튼 이 대야성의 함락에는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의 무능에 있습니다. 드라마 연개소문이나 그 이후 방영된 대왕의 꿈 등의 다양한 드라마에서는 이 민족주의적 성격에 대한 부분들 때문에 김춘추가 단지 복수에 눈이 멀어 벌인 매우 잘못된 선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과연 단순 복수에 눈이 먼 선택이었는지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먼저, 당시 김춘추의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김춘추의 정치적 동반자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의 진골입니다. 진흥왕이 대가야를 합병한 이후 가야계 왕족이나 귀족들이 대거 신라 정치계에 편입됩니다. 진평왕 이후 신라왕실은 적정한 왕위계승자가 없어진 상황입니다. 때문에 남아있던 마지막 성골이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신분제로 인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죠. 두 여왕의 즉위로 당장의 문제는 피할 수 있었으나 성골의 씨가 마른 상황에서 언젠가는 진골출신의 임금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승계 과정에서 비담의 난이 일어나는 등, 반란이 일어납니다. 기존의 학계에서는 이 비담의 난을 진압한 것을 김유신으로 보고 이후 김춘추와의 정치적 결합으로 인한 부각이 일어났다고 해석했으나, 사실 이 김유신의 부각은 사실 알천에 의한 것이며 후대에 김유신에게 덧붙여진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주제와는 조금 멀기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김서현, 김유신 부자가 정치적으로 부각하게 되는데, 김유신과 김춘추 모두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김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은 성골이지만, 가야계 진골인 김서현이 아버지입니다. 거기다가 당시 만명부인이 김서현과 야반도주로 인해 족강되어 버렸고, 김서현이 정치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골품이 족강당하고 말죠. 당시 골품제의 매우 폐쇄적이었기에, 김유신은 진골이 됩니다.

김춘추는 이보다 더 심하죠. 그의 가족과 골품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어머니 천명공주이며, 아버지는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수입니다. 천명공주는 성골이었고, 아버지인 김용수는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당하여 족강 되지 않았다면 성골이었을 인물입니다. 거기에 왕위계승권자이기도 했죠. 이런 이유로 진평왕 이후 성골 남자가 없었을 당시 유력한 왕위 후보자이기도 했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모두 고귀한 신분이었던 것은 맞지만 한 가지씩 결격사유가 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결합이 이어집니다. 흔히 어렸을 적 동화에서 보았던 보희의 꿈을 산 문명왕후, 즉 문명왕후 문희의 혼인이죠. 이 혼인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올라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차기 왕위 계승권에는 유력하지만 성골이 아니라는 흠격이 있던 김춘추와 가야계 왕족의 신분이지만 거대 스캔들과 굴러들어 온 돌멩이라는 형태의 흠격이 있는 부모를 가진 김유신이 힘을 합치면서 강력한 정치세력이 된 것이죠.

그런데 때마침 대야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됩니다. 그런데 이 대야성의 성주가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이었죠. 이 사건으로 김춘추는 매우 큰 정치적 공세에 몰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대야성은 단순한 성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대야성의 함락은 낙동강 서부의 영향력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수도인 경주가 직공에 처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상태입니다. 훗날 후삼국시대에서도 견훤이 대야성을 숱하게 공격했던 이유는 대야성의 함락은 곧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직공이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낙동강 서부의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그런데 이런 요직을 맡았던 이가 김춘추의 사위 품석이라는 것은 당시 김춘추의 신라의 중앙부에서 김춘추의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강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의 가족이 범한 실책은 현대에서도 큰 정치적 공격에 명분을 제공합니다. 정치인의 친인척이나 주변인들의 부정부패와 실패는 곧 공격의 명분이 되는 현재도 그렇고,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점 하나만으로 온갖 정지척 공격에 시달리고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처럼, 대야성의 성주가 김춘추의 사위라는 부분은 김춘추의 반대 세력에게 아주 좋은 정치적 공세의 명분을 제공합니다. 이런 정치적 공세에 김춘추는 스스로 고구려에게 원군을 청하는 것으로 단독 돌파하려고 합니다. 김춘추가 왕에게 나아가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곧 그가 딸의 복수라는 명분 하나만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반대파, 즉 추후 왕위 계승권을 놓고 싸울 수많은 진골 세력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정치적 묘수이자 돌파구였던 셈입니다. 물론 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을 사람은 어디 있겠냐만은 오로지 딸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만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김춘추가 이런 상황에서 선택한 돌파구는 든든한 군사적 동맹국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김춘추는 왜, 고구려 등에 적극적으로 백제의 후방을 위협할 군사적 파트너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한 조치였으며, 김춘추 본인의 정치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딸인 고타소가 백제의 장군이던 윤충의 손에 죽은 것은 분명 슬픈 일이고 딸의 복수 역시도 김춘추의 하나의 동기일 수도 있겠지만, 오직 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라는 잘못된 편견은 벗어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정말 딸의 복수를 위해서만 이런 행동을 벌였다면, 그가 무사히 왕위에 오르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그전에 김춘추는 당대 주요 정치세력 중 하나였던 알천이나 비담 등에게 이미 숙청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김춘추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들어맞았으며, 결국 그의 뜻대로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멸망에도 일조했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통일을 이루어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결코 과소평가할 업적이 아닙니다. 물론, 신라의 통일이 우리 민족의 활동 범위를 한반도로 축소시켰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점이지만, 그것이 꼭 실패이자 민족의 영광을 잃었다는 평가는 반드시 지양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김춘추의 이런 정치적, 외교적 행보를 두고 민족을 배신한 행동이라며 손가락질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평가 하는 연개소문은 왜 신라를 동맹으로 두어 후방의 안전과 민족의 화합이라는 결과물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애당초 고구려와 신라가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나 있었을까요. 그러나 삐뚤어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질문에는 눈을 감고 대답을 회피하며, 그저 위대한 한민족만을 부르짖습니다. 삐뚤어진 민족주의와 연개소문, 김춘추의 대한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 우리는 보다 발전적인 역사적 논의와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일제가 노리고자 했던 정체성론에 가장 적합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만 할 것입니다. 김춘추의 행동으로 야기된 나당동맹은 신라와 김춘추 본인의 생존 전략이었을 뿐, 그것이 민족의 반역이라는 부분들에 대한 오해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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