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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소현세자와 사도세자 (2)

by 철가면

4. 소현세자 긍정설에 대한 불편한 진실


소현세자의 아버지인 인조는 현대인의 인식 속에서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조는 광해군과 인조 편에서도 다루었듯이 능력 없고 무능한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무능했다면,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설사 왕조가 교체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인조와 그의 직계 혈통이 재위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었을 것입니다. 실록에서도 이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한양으로 복귀하는 인조를 밀쳐내고 왕가를 무시했다는 기록이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기록에서 나온 것처럼 그렇게까지 존재자체가 무시되었을 가능성은 적지만, 이는 우회적으로 인조를 비판하려는 사관의 주관적 해석의 개입이 있었을 여지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상황 속에서 인조는 이후 반정의 1등 공신이기도 했던 심기원의 반란 사건 등 숱한 재위를 위협받는 역모 사건이 발생합니다. 인조의 출신 성분이 중종반정 같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계승이 아닌, 할아버지와 손자의 계승이라는 조손 계승의 문제는 선조의 아들들, 인조의 숙부들이 존재했기에 충분히 정통성 논란에 시달릴만했습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초반부의 명분과 정통성을 강조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 부분과 연관 지어져 있습니다. 성종이 즉위 후에 세자 신분으로 죽었던 아버지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성종이 예종의 아들로 즉위한 것이 아니라, 의경세자의 아들 자격으로 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즉, 성종의 즉위 정통성과 명분이 예종이 아니라 세조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자격이기 때문에, 의경세자를 추존한 것입니다. 거기에 의경세자는 죽지 않았다면 즉위했을 인물이기에 추존의 정통성도 확실하죠.

선조의 즉위도 명종과의 부자의 항렬이기도 했으며, 왕실의 적합한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사실 여부의 논란이 있기는 했으나, 명종이 큰 병을 앓았을 때, 선조는 후계자의 자격으로 명종의 병상을 지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것은 즉 왕실뿐 아니라 조정 대신들 역시도 당시 하성군을 유력한 차기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을 추존하지 않아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릴 이유가 없던 것이죠.

조손관계로 즉위한 또 다른 인물인 정조는 자신의 법적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한 것도 정조의 즉위 명분과 정통성이 효장세자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그의 생모이자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 씨는 대비가 아닌, 그저 왕의 생모로서 존중을 받았던 것입니다.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 역시 즉위 이후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했습니다. 정조와 같은 이유로 말입니다. 효명세자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고종 역시도 효명세자에게 어마무시한 존호를 올리며 자신의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이 직접 반정을 주도했으며, 선조의 손자로 즉위했습니다. 따라서 조손 계승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그의 숙부들인 선조의 아들들이 정통성과 명분을 내세운다면 충분히 위협이 될만한 일이죠. 왜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을 무리하게 추존을 하려고 했는지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인조의 재위 시기부터 그런 위협에 시달렸는데,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인조는 끝끝내 재위를 지켜냅니다. 그리고 그가 재위를 지켜내면서도 소현세자는 차기 국왕, 세자의 신분으로 청나라의 인질로 끌려갑니다. 그의 나이 24살이던 1636년입니다. 그는 청의 볼모로 끌려가서 명의 몰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며, 나름대로의 기반을 구축해 놓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청나라로부터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선에 가져와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으나 아버지 인조에게 독살당하고, 조선 개혁의 꿈이 사라졌다는 것이 기존의 많은 대중들이 가졌던 인식입니다. 이런 인식은 아버지였던 인조가 최악의 임금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과연, 소현세자는 정말 아담 샬과 만났고, 그에게 천주교를 배워 조선에 들여올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할 생각이었을까요. 필자는 이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바라봅니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버팀목 하나 없이 홀로 청에서 동생인 봉림대군(효종)과 부인인 세자빈 강 씨와 함께 오랜 볼모생활을 훌륭하게 버텼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반까지 마련했습니다. 이런 점을 보았을 때 소현세자가 능력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소현세자가 즉위하여 조선을 훌륭하게 다스렸을 것이라고도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이미 광해군의 전례에서 보았듯이, 훌륭한 세자가 훌륭한 국왕이 된다라는 것은 너무나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또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아담 샬의 과장이라는 평가가 매우 많은 상황입니다. 무엇보다도, 소현세자가 정말로 아담 샬과 교류를 통해 천주교를 조선에 들여오려고 했다면, 인조에게 있어서 소현세자 사후, 원손이던 석철의 승계가 아닌, 차남이던 봉림대군의 왕세자 책봉에 이것보다도 좋은 정치적 명분을 제공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그것도 차기 왕위 계승권자가 성리학이 아닌 다른 학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선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리학을 신봉하든 신봉하지 않든, 왕세자가 서양의 오랑캐 문화를 들이려고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역모에 준하는 일입니다. 전술하였듯이 병자호란 사후 위에서 언급했던 조손 계승이라는 정통성의 한계와 자신의 재위가 위협받고 있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인조가 소현세자 축출과 봉림대군의 왕세자 책봉에 사용할 수 있는 이런 좋은 정치적 명분을 그냥 두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현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를 했다는 것조차도 필자는 그들의 관계가 돈독하기는커녕,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것에서조차 회의적입니다. 그저 서로 이런 사람이 있구나 정도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물론, 실제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교류를 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위에서 언급했던 모든 내용들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소현세자는 이미 부왕인 인조에 눈에 벗어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조가 볼모로 잡힌 자식들을 처음에는 불쌍하게 여겼을지 모르더라도 그 스스로 재위가 위협받고, 그뿐만 아니라 청에서조차 인조를 협박하는 카드로 소현세자를 사용했던 순간,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 정적이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기에 소현세자가 저 멀리 타국에 있는 아버지 인조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 역시 인조의 불안감을 키웠을 가능성 또한 존재합니다. 장성하여 타국의 볼모로 잡혀간 자식이 불모지에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불쌍한 처지에 있어야 했으나 오히려 그 상황을 극복하고 나름의 기반을 다진 순간, 아버지 인조의 눈에는 자식이 아닌 정적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논란은 아버지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재위에 앉아 청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했던 군주라는 것과 못난 아버지 덕에 볼모로 끌려갔으나 그 와중에도 조선의 왕세자라는 기개를 잃지 않고 이를 극복해 낸 영웅적 스토리를 함께 자극하며 현대인에게 환상을 심어준 것입니다.


5. 소현세자,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통성 논란


소현세자 역시 사도세자 못지않게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불과 10세에 아버지 인조가 반정을 일으켰습니다. 실패하면 반역죄로 집안 모두가 몰살당해야 했으며 세자 책봉 이후에도 두 번의 호란을 겪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청에게 굴복했을 뿐 아니라 아버지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는 것을 직접 지켜봤으며 동생인 봉림대군, 아내 세자빈 강 씨와 함께 전쟁포로로 청나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 귀국 후 갑자기 사망하고, 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기구했던 데다가 아버지 인조의 평가가 최악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소현세자에 대한 인식은 매우 좋은 편입니다. 거기에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서 발전된 서양의 문물을 소개받고 그것을 조선에 들이려고 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는 급진적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현세자의 출중한 능력을 시기한 인조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의견이 만연했습니다.


특히나 소현세자 독살설은 의외로 그 떡밥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타살 가능성에 동의한 설이기도 합니다. 승정원일기나 각종 사료들이 번역되고 전산화되기 이전, 실록에만 의지해야 했던 시절 나왔던 내용들입니다. 해당 사료들이 번역되고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가 되는 현 상황에서 소현세자 독살설은 그 근거에 대한 반박이 이루어진 상황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양한 이유로 소현세자 독살설 관련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죠.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 소현세자 독살설이 조선왕가에 미친 영향입니다. 또한 현대적 관점에서 인조를 부정하고 조선의 중흥을 이끌 수 있던 소현세자의 죽음이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이야기의 위험성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선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왕가에 많은 상처를 남깁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을 주도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왕가는 오랜 시간 동안 정통성 논란에 휩싸입니다. 바로 봉림대군이던 효종의 왕세자 책봉이 그것입니다.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이런 정통성 문제로 인해 그가 행할 수 있는 왕권이 제한됩니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서인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효종에 비해 정통성면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현종대에서도 국론은 예송논쟁으로 분열됩니다. 다만, 아버지 효종과 비교해서 정통성 논란에서 조금은 자유로웠기에 분열된 국론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를 현명하게 주도합니다. 연산군대에 벌어진 무오사화와 같이 임금의 정통성은 역린으로 피바람이 몰아쳐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현종은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현종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현종이 이를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아마 두 붕당은 일찍부터 피의 살육을 벌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왕위 계승권 1순위였으며, 그대로 장성하여 즉위를 한 숙종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런 정통성 논란은 사라집니다. 이미 인조부터 시작해 숙종까지 4대에 이르는 왕통을 계승해 왔으며, 숙종 본인부터가 인종 이후로 최초로 태어난 순간부터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적장자 승계를 이룬 임금이기에 정통성이 확고했습니다. 편견의 역사 인물 편에서 지금까지 총 6명의 임금을 다루면서 계속해서 언급되는 이야기가 바로 정통성입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바로 그 조선왕조 500년 내내 끊임없이 벌어지고 왕들을 괴롭혔던 문제였습니다. 그 씨앗을 뿌린 것은 다름 아닌 인조였습니다. 비록 인조가 조선을 새롭게 개창한 것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지만 고평가 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조 스스로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며 자신과 후손들의 정통성에 흠짓을 냈습니다.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의 후손들을 탄압하면서 말이지요. 소현세자의 죽음이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그가 서양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조선 왕실이 끊임없는 정통성 논란에 휩싸이고, 그 여파로 통치의 강한 탄력을 받지 못한 것에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사도세자 역시 그의 죽음으로 아들 정조에게 크나큰 정치적 부담감을 선물했습니다. 비록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으나, 생물학적으로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자신의 즉위 정통성과 선왕이자 할아버지였던 영조의 유지를 이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붕당을 제어하고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습니다.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각종 개혁책을 밀어붙일 수 있던 이유는 그가 생물학적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추존과 그에 따른 복수를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아왔던 까닭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부분은 노론이 사도세자를 죽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정조가 즉위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을 위해 저항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사 몇몇 과격한 이들이 주장하는 노론 카르텔이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노론에게는 정조를 몰아낼 정치적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조는 즉위하고서부터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지만, 자신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효장세자의 양자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미리 선포했던 까닭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통성과 선왕이자 할아버지였던 영조의 선택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법적 아버지인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며 정통성을 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즉위기간 내내 노론을 위시한 각종 당파들, 좀 더 좁은 의미로는 노론을 끊임없이 제어합니다. 조선의 정치 시스템은 숙종 시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칼자루가 주어졌습니다. 숙종의 환국으로 정상적인 정치 시스템이 무너지고 그저 왕의 선택에 따른 붕당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숙종과 경종대에 벌어진 환국, 그리고 영조 즉위초기에 벌어진 이인좌의 난 등을 이유로 조정은 대부분 노론으로 채워집니다. 왕은 자신의 의지대로 신하들을 좌지우지하며, 왕에게 신임받기 위한 신하들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왕의 선택을 받은 당파는 상대당파를 몰살시키는 피의 살육전이 벌어집니다. 병약하고 유약한 이미지였던 경종마저도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때문에 영조는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사이였던 당파를 조정하기 위해 탕평책을 펼쳤습니다. 소론과 살아남은 일부 남인이 끊임없이 거병하고, 심지어는 영조에게 이복형이던 경종의 독살의혹까지 씌우며 저항했으나 영조는 이들을 끝내 모두 죽이지는 않습니다. 끝끝내 일부 강경 소론과 남인을 품으려고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벌어진 일이 사도세자가 죽음에 연관이 있는 임오화변입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영조의 탕평책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국사 교과서에서 대놓고 노론 카르텔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뒤 전후 내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붕당으로 인한 정치세력의 혈투, 그리고 살아남은 노론과 그의 뒤를 잇는 안동 김 씨를 동일시해 버리는 오류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절대다수의 노론과, 절대소수인 온건소론과 남인만이 조정에 남아있었으며, 이들을 제어하기 위한 임금의 노력, 그리고 임금의 조정자의 역할을 포기했을 때 벌어질 정도로 조선의 정치체계가 망가져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대중들과 심지어 역사를 잘 안다는 역덕들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소현세자가, 혹은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으면, 정조가 조금 더 오래 살았으면, 효명세자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과 같은 증명 불가능한 내용을 가지고 논쟁을 벌일 뿐입니다.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내용으로 키보드 배틀을 벌일 뿐입니다. 그만큼 그들의 죽음이 아쉽다는 반증이겠지만 유쾌하고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뒤이어 즉위한 정조 역시도 스스로 효장세자의 아들로 즉위했음을 천명하며 노론에 손을 내밀었고, 그들을 제어하기 위해 재위 기를 모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드라마 이산의 영향으로 정순왕후 김 씨와 그의 오라비였던 김귀주 등이 정조 최고의 정적으로 표현되지만 그마저도 사실이 아닙니다. 정순왕후 김 씨와 김귀주는 친정조 세력이었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을 통제하고 제어하던 정조가 조금은 이른 나이에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순조가 즉위하자 균형을 잃고 무너집니다. 왕이 붕당과 대신들을 통제하지 않는 경우 어떤 국가적 참사가 벌어지는 것을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시기에 유지가 되었으나 정순왕후가 1805년 사망하자 조정의 균형이 일거에 무너지고 김조순을 위시한 안동김 씨의 세력이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득세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김조순의 대한 평가는 세도정치를 이끈 장본인이며 나라의 간신배라는 평가를 받지만, 실제로 김조순은 순조를 보필하고, 왕실의 위엄을 내세우기 위해 앞장선 장본인입니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김조순과 세도정치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다만, 그가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은 비판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6. 마치며

조선을 포함한 동서양 왕실의 권력 승계는 아버지인 선왕의 죽음이 전제됩니다. 따라서 차기 국왕이자 왕세자인 이들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충과 효입니다. 왕세자 입장에서 아버지인 국왕은 충성을 바칠 주군이자, 효심을 다해 모셔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이 선위 파동을 벌이면 왕세자들은 이유 불문하고 정전 앞에 무릎 꿇고 석고대죄를 하며 선위를 거두어달라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세자라는 지위는 차기 왕이면서 권력 승계까지 매우 조심하고 몸을 사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거기에 살인적인 교육 스케줄은 세자들을 정신적 스트레스의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신병에 걸려 죽은 이가 사도세자입니다.

조선 왕실은 효종 이후 왕손이 매우 귀해집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외아들이고, 숙종 역시 외아들입니다. 숙종은 경종과 영조를 낳았으나 경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선사신이 청에 사신으로 가서 성불구라는 막말을 내뱉었으며, 그의 뒤를 이을 후사도 두지 못하고 이복동생인 영조에게 왕세제를 내려 차기 국왕으로 즉위하게 했습니다. 영조 역시도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됩니다. 정조 역시도 문효세자를 얻으나 일찍 죽고 늦은 나이에 순조를 얻습니다. 순조 역시도 효명세자를 잃고 그의 아들이자 순조의 손자였던 헌종이 즉위하게 되며, 헌종은 후사도 얻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상대를 악마화시키는 것이죠.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인조를,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노론을 비난합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이 발전하지 못한 아쉬움,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노론이 득세하여 결국 세도정치로 이어졌다고 하는 이 프레임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세도정치의 득세는 숙종시기 발생한 환국으로 인해 왕에게 너무나도 많은 권한이 위임된 나머지, 왕의 능력과 의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습니다. 거기에 장희빈의 폐위시절, 장희빈 소생이던 경종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시킨 전례에 따라 정조부터는 모두 이런 전례를 따라 정통성에 문제 역시도 없었습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의 죽음과 그의 아내와 아들 삼 형제의 비극으로 인한 조선 왕실의 정통성 논란에 휩싸이게 한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왕실을 넘어 권력의 비정함과 부자간의 비극적인 결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노론이 득세하고 세도정치를 맞아 조선이 멸망했다는 프레임은 이제 걷어낼 때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멸망은 숙종 시기 이후부터 이어져 온 조선 정치 시스템의 붕괴로 시작되었으며, 왕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한을 왕이 포기하는 순간 어떤 비극이 불어닥쳤는지로 바라보는 것이 옳습니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는 아버지처럼 조정을 제어하고, 수 백 년간 쌓여왔던 각종 통치 체재의 문란을 수습했어야 하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순조는 이를 포기했습니다. 그렇다고 순조가 허수아비 임금이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그는 막후에서 노론을 박살내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관철시킬만한 힘과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조는 이를 수수방관했고 그 결과가 세도정치의 시작이었으며, 각종 삼정의 문란이 터져 나오면서 조선 멸망을 가속화시킨 임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의미 없을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이 조선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 보다 본질적인 부분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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