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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연산군과 숙종 (2)

by 철가면

4. 붕당정치의 폐해를 만든 군왕 숙종


많은 사람들이 붕당 정치를 조선이 망한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이 일제에 의한 식민사관, 당파성론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죠. 추가로 광해군 재평가와 더불어, 인조시기부터의 붕당과 예송논쟁을 의미 없는 논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거기에 붕당정치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서로 죽고 죽이는 제로섬 게임의 살육전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붕당정치의 끝이 세도정치였고, 그 세도정치로 인하여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식의 프레임이 형성된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에 와서도 여전한 두 거대 양당, 그리고 지역주의의 심화 등의 이유로 붕당은 안 좋은 것이다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잡혀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이런 붕당 정치가 변질되어 서로 간의 당파 싸움과 함께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치킨게임이 된 이유 중의 하나를 바로 숙종이 제공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환국정치인데, 이 환국정치를 그저 집권세력이 변동하는 정도로 여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이런 환국정치로 재집권을 한 붕당에게도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데, 그것이 같은 세력들 간의 분화인 것이죠. 선조 당시 정여립의 난으로 집권한 서인이 정철의 건저사건으로 실각하자 서인에게 강경책을 주장했던 이들이 북인이고, 온화 책을 주장했던 이들이 남인입니다. 그리고 환국정치의 달인인 숙종에 의해 남인에 대한 보복을 강경하게 주장한 이들이 노론이고, 온화한 처벌을 주장한 이들이 소론입니다. 노론 내에서도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되고,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세력이 분화하여 영조에게 협조적이던 이들이 완론이고, 영조에게 적대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 세력이 준론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분화된 당으로 인해 영조와 정조, 특히 영조는 재위기간을 매우 힘들게 보냅니다.


숙종은 지금껏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스토리로 유명한 임금이었습니다. 그가 행했던 정책들과 내용들보다는 두 여인사이의 사랑놀음을 했던 왕으로 대중에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그 누구보다도 정치세력을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던 임금입니다. 붕당 사이에서 적절한 견제와 처벌로 균형을 잡았던 선조, 소수파인 대북에게 과도한 힘을 몰아주다가 오히려 쫓겨난 광해군, 서인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남인 등의 등용에도 힘썼던 인조, 정통성 문제로 서인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던 효종, 그 누구보다도 평화롭게 서인과 남인 사이를 조율하며 붕당정치의 표본을 잡아준 아버지 현종과 다르게 숙종은 그 어떤 임금보다도 이 붕당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장희빈의 사사와 아버지 숙종과 이이명과의 정유독대로 인해 정통성마저 불안전하여 소론의 지지에 의지해야만 했던 아들 경종과 끊임없는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며 탕평을 주장하였으나 결국은 노론에게 힘을 몰아줄 수밖에 없던 아들 영조,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효장세자에게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기에 노론과 잘 지낼 수밖에 없던 손자 정조 등, 붕당 정치시기의 조선의 임금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붕당들과 협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자들은 이 붕당정치를 조선사 최악의 일 중 하나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그 의견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 어떤 역사 속에서도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반정으로 물러나게 된 연산군과 광해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붕당정치 자체가 변질되고 서로를 향해 적개심을 드러내고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 변질하게 만든 것은 숙종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숙종은 이번장의 비교대상인 연산군과 함께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통성의 끝판왕인 단종을 제외하고, 원자-세자-왕으로 이어지는 태어나자마자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으며, 즉위하기 전까지 그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는 것은 왕정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정통성이자 명분입니다. 연산군 역시도 숙종에 비견할 만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폐비가 되었다는 흠집이 있으며 끝내 폐위당했고, 세계사를 둘러봐도 다시없을 정통성의 끝판왕 단종은 즉위 후 3년 만에 숙부에게 강제로 양위당했고, 이후 폐위되어 사사되었습니다. 엄연히 법적 어머니인 정현왕후와 인수대비로 더 유명한 소혜왕후라는 왕실 어른이 살아있어 나름의 견제와 제재를 할 수 있던 연산군과 달리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와, 법적 할머니인 장렬왕후가 각각 1683년과 1688년에 사망하며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왕실 웃어른조차 없었습니다. 거기에 삼종의 혈맥을 잇는 이이기도 했으며 선왕 현종의 유일한 적통 출신의 외아들이었으니 숙종을 대신할 수 있는 이도 없었습니다. 이처럼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숙종이었기에 할아버지 효종의 역린이던 강빈과 그 아들들을 모두 사면 복권 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에 대한 정통성 시비로 복권 시도조차 되지 않았던 사육신과 단종이 숙종시기에 복권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들을 복권시켜 봐야 자신의 권위와 왕권을 위협받을 일이 없을 것이라는 숙종의 강한 자신감이기도 했습니다.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면 수렴청정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했으며 즉위하자마자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현종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서인의 거두 송시열을 단 한방에 삭탈관직시켜버리고 귀양을 보내버리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은데, 태생에서부터 나오는 정통성이 얼마나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입니다. 송시열은 서인카르텔을 주장하는 이들, 특히나 그들의 대표주자인 이덕일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인물이지만,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국왕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산림의 거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림의 지지를 반드시 받아야만 했던 효종은 송시열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현종은 예송으로 대표되며, 그의 아버지 효종이 차자라고 주장하며 왕실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송시열을 두고만 봐야 했습니다. 현종은 아버지 효종이 백부였던 소현세자와 민회비 강 씨,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사촌 삼 형제의 비극으로 즉위했다는 원죄로 재위기간 내내 심각한 정통성의 흠집을 입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의 상복을 문제로, 그것도 아버지가 적통이 아니라는 주장에 피로써 숙청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통성이 주는 정치적 명분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는 효종에 비해서는 정통성 논란에서 그나마 가벼운 현종이 정통성의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숙청이 아닌, 대화와 토론의 장이 열린 예송논쟁을 통해 붕당을 얼마나 잘 제어하고 조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후에 편견의 역사 – 사건 편에서 예송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할아버지와 아버지조차 함부로 하지 못했던 송시열을 단번에 날렸다는 것은 숙종이 가진 정통성의 권위가 얼마나 강한지를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송시열을 귀양 보내며 숙종은 자신감을 얻습니다. 즉위 초 송시열의 귀양사건은 아버지 현종시기의 갑인환국의 연장선으로 보아야 하지만, 이를 후임 국왕이 이어서 처리를 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는 것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아무튼 이 갑인환국으로 숙종은 남인의 지지를 받으며 국정 운영의 동력을 얻습니다. 거기에 서인에 비해 왕권강화적 측면에서 도움을 주는 남인이 집권을 시작하면서 숙종은 더욱 강한 왕권을 행사합니다.


숙종시기에는 현종시기에 이어진 갑인환국을 포함한 총 4번의 환국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환국을 중심으로 서인과 남인의 피비린내 나는 제로섬게임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환국의 중심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장희빈과 인현왕후입니다. 환국의 내용을 모두 정리하면 지면이 모자라는 관계로, 간략한 사건의 개요와 장희빈,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내용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환국의 경우도 편견의 역사 – 사건 편에서 자세히 다룰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즉위 후에 송시열을 날려버린 숙종은 남인을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합니다. 갑인예송과 갑인환국으로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고 기회를 엿보던 서인들에게 홍수의 변이라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문제는 이 변을 고변한 이가 서인이며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의 외할아버지인 김우명이 낸 고변으로, 근거를 찾지 못해 무고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곧바로 남인에게 역공을 맞았으나 명성왕후가 울며 숙종을 찾아와 억울함을 토로했습니다. 모후가 울면서 자살로 협박하는데, 효를 중시하는 나라인 조선의 임금이 이를 물리기란 어려웠을 겁니다. 이로서 사건이 무마되는 듯했으나 윤휴가 왕대비의 개입에 불만을 토로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는 숙종에게 하나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경신환국이 벌어지게 되었고 남인이며 영의정이던 허적이 사임하자마자 서인 김수향이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며, 보름에 걸쳐서 남인들은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삼복의 옥이 터지며 역모 문제로까지 커지며 남인은 대대적인 숙청을 당하게 되고 권력은 다시금 서인이 잡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서인이 둘로 분화하게 되는데, 남인에게 대대적 보복을 가하자는 송시열의 노론과, 그래도 파국은 막고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하자는 윤증의 소론으로 나뉘게 된 것이죠. 선조시기 정철의 건저사건으로 밀려난 서인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던 모습이 다시금 재현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붕당은 피로 점철된 역사를 걷게 됩니다. 그리고 숙종은 이것을 보면서 하나의 가능성을 본 듯합니다. 왕인 자신이 어떤 세력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바뀌는 상황을 보며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숙종은 또 다른 기회를 엿봅니다.


5.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종은 총 3명의 왕비를 둡니다. 첫 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와는 동갑내기에 사이도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왕실은 문종 이후로 정비가 세상을 떠나면 반드시 계비를 들였습니다. 문종이 강한 왕권의 자신감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세자빈이 여러 번 바뀌는 과정 속에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사후에는 또 다른 계비를 맞지 않습니다. 세조의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단종을 보호해 줄 대비가 없다는 것이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후 조선의 임금들은 정비가 죽으면 거의 대부분 계비를 들입니다. 선조가 그러했고, 인조가 그러했으며, 영조가 그러했습니다. 숙종 역시도 이런 전례에 따라 계비를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인현왕후였습니다. 사실 정비가 죽으면 상이 끝나는 3년간은 계비를 맞이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으나 송시열과 명성왕후의 주도하에 숙종은 인현왕후를 계비로 맞이했습니다. 문제는 당시에 숙종이 당시 상궁이던 장옥정, 즉 장희빈과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드라마 상에서는 장희빈을 악독하게 꾸미고 인현왕후를 훌륭한 조강지처로 묘사하는데, 실제는 조금 다릅니다.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견제하기 위해 장희빈의 종아리를 치기도 했고, 장희빈이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라며 불순한 무리, 즉 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을 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의외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멸시하거나 무시했다는 기록은 단 한건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숙종을 제어할 수 있던 명성왕후와 장렬왕후가 차례로 사망합니다. 장렬왕후가 사망하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장희빈은 곧 왕자를 생산합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할 경종이 태어난 것이죠. 그리고 숙종은 여기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경종에게 원호, 즉 원자로 정한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왕실의 경사였으나 그는 서장자, 즉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이가 아닙니다. 후사 없이 죽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 스스로 반정을 주도하며 왕위에 오른 인조를 제외하고, 서자 출신의 임금은 광해군,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마저도 원자-세자가 아닌, 왜란 중에 갑작스럽게 책봉된 왕세자 자리였으며, 서출 원자정호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왕실의 적통, 즉 정실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주는 명분은 대단했습니다. 왕자가 태어난 것은 나라의 경사이지만, 그가 적통이 아니라는 약점과 숙종의 나이가 젊고, 왕비 역시도 젊으니 원자의 칭호를 주는 것을 서인이 반대한 것이죠. 덜컥 후궁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했는데, 왕비에게서 적통 왕자가 태어나는 경우, 심각한 정통성 논란과 함께 피바람이 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광해군과 영창대군이라는 전례도 있었기 때문에 서인의 반대는 지당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를 빌미로 숙종은 왕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며 이를 반대하던 서인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노론이자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과 김수항을 사사하고 중진들을 줄줄이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습니다. 남인마저도 반대했던 일이었으나 청년 국왕 숙종은 단호했습니다. 그렇게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에 책봉했으며, 남인이 국정을 장악했습니다. 당연히 그대로 경종은 적통 왕비의 소생이 되어 원자로 책봉되고 차기 국왕으로 선포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장희빈과 남인에게 염증을 느낀 숙종은 또 한 번의 환국을 단행합니다. 이른바 갑술환국인데,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복권되고 장희빈은 다시금 왕비에서 빈으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축출되었을 뿐 아니라 대다수의 남인 거두들이 사사당합니다. 그리고 끝끝내 장희빈을 사사합니다. 그와 장희빈의 아들이자 차기 국왕인 세자 경종이 연산군과는 달리 이미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갑술환국으로 이미 경신환국 당시 남인에 대한 처벌에 따라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윤증과 송시열간의 회니시비로 대표되는 사건으로 갈등이 격화된 상황에서 그나마 서인이라는 틀에 함께 있던 노론과 소론을 완전히 분리시킨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절대 다수인 노론과 소수인 소론, 그리고 완전히 극소수였던 몇몇 남인만이 조정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였는데, 소론 역시 경종 즉위 후 노론 탄압에 강경하던 중소와 비교적 온건적이던 완소로 다시 나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준소는 남인에서 분화한 몇몇 탁남들과 손을 잡고 영조 즉위 후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인은 완전히 조정에서 축출되었으며 그나마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던 채제공 일파의 청남만이 조정에 남아있게 됩니다.


이처럼 숙종은 증조할아버지 인조부터 아버지 현종까지 삼대에 걸쳐 이어지고, 나름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건전한 논의의 장을 펼치던 붕당을 완전히 박살 냅니다. 그리고 숙종 이후의 경종과 영조는 아버지가 저질러놓은 환국으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경종은 숙종과 노론에 의해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당할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거기에 어머니 장희빈이 아버지인 숙종의 손에 죽음에 따라 매사를 조심스럽게 살아야만 했으며, 또 다른 아들인 영조는 평생을 탕평에 매달렸으나 결국은 절대다수의 노론과 일부의 소론을 통합하기 위해 재위기간 내내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탕평책을 폈다고는 하지만, 이는 불완전한 탕평에 불과했으며, 그는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노론은 정조 사후 노론의 일파였던 안동 김 씨 세력에게 주도권을 내준 채 세도정치 기를 맞이하여 조선의 멸망을 가속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시작이 숙종의 환국정치에서부터였습니다. 숙종은 우리가 알던 로맨틱한 남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부인마저도 정치에 장기짝으로 사용한 냉혹한 임금이었습니다.


6. 마치며


그동안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 그리고 숙종은 로맨스의 대명사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들을 벗기고 속을 들여다보면 연산군과 숙종은 매우 공통점이 많습니다. 연산군과 숙종은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정통성으로부터 매우 강한 왕권을 휘두릅니다. 또한 연산군은 사림과 훈구를, 숙종은 서인과 남인 모두를 숙청하며 조선에서 가장 강한 왕권을 손에 넣습니다. 선대부터 이어져내려 오던 권력의 틀을 뒤바꿔버린 임금들입니다. 차이점은 연산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은 이후 정신줄을 놓고 타락하며 조정의 조정자 역할을 포기했다면, 숙종은 신하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조정하고, 조정자의 역할은 충실히 하며 자신의 마음대로 정치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연산군은 숱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쳤으나, 숙종은 의외로 백성들에게는 자상한 임금이었다는 차이점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두 임금 모두 후대 임금에게 막대한 부담을 끼칩니다. 연산군은 그 스스로가 용상을 지키지 못해 훈구파에게 또 다른 공신세력의 등장을 허용하여 세조대부 터 이어져오던 훈구세력들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어 후대 임금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했습니다. 숙종 역시도 환국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키고 제 입맛대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했으나, 이로 인한 폐해로 영조와 정조는 한평생을 이런 조정의 분란을 조율하는데 온 힘을 쏟게 만들었습니다. 선조시기와 광해군시기에 피로 얼룩졌던 붕당을 인조-효종-현종의 삼대에 이르러 간신히 맞춘 균형을 파괴하여 붕당의 마지막 건전성을 파괴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영조와 정조가 불완전하지만 이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두 임금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며, 정조 사후 이를 컨트롤할 수 없던, 혹은 조정자의 역할을 포기한 순조 이후부터 조선의 통치체제가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숙종의 실책입니다.


조선의 붕당은 그저 붕당 자체로만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정치적 환경과 사건들로 인해 변질되고 무너지기 시작한 거대한 조선 붕당 정치사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봐야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과 숙종은 분명 뛰어난 자질을 가진 임금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질을 잘못 사용한 결과는 조선 역사에 매우 악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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