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아마 대부분의 분들이 이번 목차를 보고서 연산군과 숙종을 비교하고 잘못된 것이 있는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고, 숙종은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러브스토리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임금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임금이 왕권을 행사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조선의 임금은 생각보다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왕권을 행사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끊임없는 견제를 받는 존재가 임금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연산군과 숙종은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거침없이 왕권을 행사한 임금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스스로의 신분과 정통성에서 오는 권위입니다. 연산군과 숙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차기 임금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탄생한 이들입니다. 조선사에서도 보기 드문 적장자 출신의 정통성 높은 임금이죠.
연산군과 숙종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의 재위기간이 드라마화하기 좋은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일대기 자체가 워낙에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넘치다 보니 사극의 단골 소재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런 이유가 있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알게 모르게 연산군과 숙종에게는 일종의 낙인이 씌워집니다.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 윤 씨를 그리워하다가 미치광이 폭군으로 전락했다는 것과 숙종은 악녀인 장희빈의 손에 놀아나면서 진정한 사랑인 인현왕후를 버리는 불운한 임금이라는 식의 낙인이죠. 이 두 임금을 다루는 대부분의 사극들이 이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용 자체는 틀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잘못된 낙인이 깊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연산군과 숙종에게 씌워진 거품과 낙인에 대해서 하나하나 파헤쳐보도록 합시다.
2. 정통성과 무오사화.
연산군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사극들은 연산군을 어머니의 사랑에 굶주린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넘치다 못해 광기에 다다른 것으로 그려지죠. 무엇보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가 사약을 마시며 피를 토하고 죽은 후 남긴 ‘피 묻은 적삼’은 연산군 내부에 잠들어있던 아이덴티티를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연산군 관련 수많은 사극들에서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과 이복동생들을 죽일 뿐 아니라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마저도 대들고 패악질을 부린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한 부분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 이야기의 지나침과 한쪽으로의 치우침의 정도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필자가 연산군의 이런 이야기를 지나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연산군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말 그대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첫 장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정치 세력에게 있어 명분이란 매우 중요합니다. 전두환의 쿠데타가 끊임없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힌 이유는 그들의 벌인 12.12 쿠데타가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무력을 앞세워 권력을 탈취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조 역시도 끊임없이 공신 세력과의 유착을 강화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죠. 문종과 세조 편에서 언급하였듯이 당시의 사회상에서 세조가 즉위할 수 있는 방법은 불법적인 방법이 아닌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의 5 공화국 시기에 수많은 민주화 세력이 활동하고, 세조 시기를 지나서도 단종에 대한 야사 등이 남아있는 이유는 동일합니다. 불법적 권력 찬탈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이 비판받는 이유도 정치적 명분이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만큼 정치 세력에게 명분과 정당성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성종은 세조 대에 비대해진 공신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고 그들의 견제를 받아가면서 공신 세력을 억제하고 사림 세력을 키웠습니다. 신하들의 제어에 성종은 재위 기간 대부분을 소진했으며,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제어에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성종 개인에 대한 인내력과 도덕성과 능력은 인정할만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합니다. 모든 임금들이 성종처럼 조정 대신들 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조가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왕이자, 성공적인 임금으로 평가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조가 정리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친위세력으로 남겼던 공신세력은 이후 명종시기까지 조선의 임금과 통치체계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연산군대에 벌어진 두 번의 사화 역시도 세조가 남긴 공신세력과 임금 간의 대결구도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서 희생된 사림세력이라는 폭넓은 방향에서 살펴봐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산군 실록을 살펴보자면 연산군이 성군이나 명군은 아니더라도 중간 이상은 한 임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위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심각한 폭정을 행했던 기록을 찾기 힘듭니다. 그의 악행 중 하나로 평가받는 무오사화 역시도 정상적인 범주 내에서 임금이 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무오사화의 주요 골자는 사림의 거두였던 김종직이 남긴 조의제문이 그 원인입니다. 조의제문 내용 자체가 세조의 집권에 대한 비판입니다. 임금에게 있어서 선왕의 즉위가 비판받게 되는 경우, 그 정통성에 심각한 흠집이 나게 됩니다. 선왕의 즉위로 인해 선왕의 아들인 임금이 현재 왕일 수 있는 것인데, 선왕의 집권이 부정했다는 비판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정통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효종 역시도 형인 소현세자 부인이자 형수인 민회빈과 그의 조카들의 복원에 대한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불같이 노했던 이유 역시도, 그들을 복원시킬 경우 자신의 집권에 대한 정통성 자체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영조와 정조 역시도 각각 경종의 동생과 효장세자의 양자라는 명분으로 즉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경종의 대한 우애를 내보이고 사도세자의 대한 추존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왕조 국가에서 임금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입니다. 이른바 역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조를 명군이라 평가할 수 없습니다. 세조의 집권 자체가 불법이었으며, 그런 여론이 전체적으로 퍼져있던 까닭입니다. 세조가 집권한 지 40년이 훨씬 지나고 세조의 손자인 연산군이 재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오사화 같은 일이 생겼다는 것은 그의 집권 정당성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세조가 능력 있는 임금이라는 평가에는 개인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세조의 집권이 조선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고 왕권을 강화했다고 주장하는 몇몇 역사 유투버들의 평가에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몇몇 유튜버들의 주장처럼 세조가 도덕성은 없지만, 능력은 좋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입에 거품을 물고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전두환이 정치를 잘했다,라고 평하는 것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이치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군요.
따라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놓고 살펴보았을 때 선왕, 즉 세조에 대한 즉위 정통성을 부정하고 비판했던 조의제문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는 절대로 지나치고 내버려 둘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두는 경우 정통성에 심각한 훼손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처벌을 해야만 하는, 왕정국가에서는 당연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정통성에 대한 공격은 곧, 왕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부분이고, 이는 왕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용납해서도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폐비 윤 씨와 갑자사화
폐비 윤 씨는 장희빈과 더불어 조선 역사 사극에서 사골이 우려 지고 닳아 없어질 정도로 주목받는 사극 단골 주제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인생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에 너무 좋고 많은 스토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희빈과 폐비 윤 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따로 언급할 수 있도록 하고, 지금은 폐비 윤 씨와 연산군이 벌인 갑자사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아버지 성종이 구축해 놓았던 대간을 박살 내버렸습니다. 대간은 그들이 간언과 간쟁을 통해 임금을 견제하는 역할도 있지만, 그들이 중요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세조시기부터 이어져왔던 공신세력, 즉 훈구세력들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계속해서 언급하지만, 조선의 임금은 상당히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 왕권이 고려왕이나 고대의 임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중국의 황제, 특히 명나라의 황제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합니다. 애초에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로 건국된 것이기도 했으며 그 이외에도 상호 견제가 통치체계의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세조가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 그리고 이어진 사육신 사건등을 겪으며 중요 언로 중 하나였던 집현전을 박살 내놓았고, 사실상 대간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대간이 중요했던 이유는 그들이 유교적 정신과 사상에 의해 왕과 대신들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선초기의 경우 이런 대간들이 이후 조정의 주요 관리가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역할이 작긴 했습니다만, 그 태종조차도 대간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까닭이 바로 상호 견제라는 부분에 있습니다. 임금과 공신을 견제할 수단이 없어졌고, 공신 세력들 역시 세조가 존재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임금에게 딱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세조 역시도 자신의 정통성이 부족하니 공신세력에게 과도한 권력을 부여하고, 허상뿐인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박살 낸 대간을 다시 복구시킨 것이 바로 성종입니다. 그 덕분에 평생을 시달리긴 했으나 이 대간을 다시 부활시키고 그곳에 젊은 유림인 사림을 등용한 것은 성종 최대의 업적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애써 부활한 대간의 주축은 사림이었습니다. 여기서 이극돈과 유자광이 사림을 음해하기 위해 조의제문이라는 떡밥을 문 것처럼 대다수의 사극들에서 표현하고 있으나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실제 각종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극돈은 김종직과 김일손의 이런 표현들에 대해 매우 우려를 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내용 자체는 이미 퍼질 대로 퍼져서 사초를 가져오라고 길길이 날뛰는 연산군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피해로 타협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 이극돈으로 보입니다. 다만, 김일손의 조의제문이라는 내용 자체가 세조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고 피바람을 가져올 수 있는 초대형 폭탄이었던 까닭에 그런 이극돈의 시도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훈구와 사림의 대결이라는 형태의 프레임으로 읽히다 보니 아무래도 훈구세력이기도 했던 이극돈이 본의 아닌 피해를 입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필자 역시도 훈구 세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필자가 집중하는 것은 비대해진 공신 세력에 대한 견제로 인해 발생하는 불필요한 정쟁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입니다. 후편으로 집필 예정인 편견의 역사 시대 편에서 훈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자세하게 언급할 기회를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사료를 하나하나 다 비교 대조하며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것을 연산군이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연산군은 대간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듯 보입니다. 일설에는 아버지 성종이 대간들에게 시달리는 모습등을 보면서 그 모습을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예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최초의 원자입니다. 단종의 경우가 있으나 단종은 원손이었지, 원자는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아무튼 연산군은 조선왕사에서 몇 없는 적장자 출신의 임금입니다. 거기에 최초로 궁궐에서 태어난 적장자 출신의 원자라는 타이틀은 더할 나위 없는 강력한 정통성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통성을 가진 까닭에 어머니인 폐비 윤 씨가 폐위가 되는 시점에서도 폐세자를 하자는 등의 논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성종이 백 년간 폐비 윤 씨 사건에 대해서 함구할 것을 명하기도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매우 조심스럽게 이 일에 대해 언급되는 것을 꺼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즉위했습니다. 그의 나이가 성년이 아니었던 까닭에 할머니인 인수대비가 충분히 수렴청정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대로 그에게 친정을 명하죠. 이는 그만큼 연산군의 즉위 정통성이 확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숙종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숙종이 즉위한 14세에는 수렴청정이 충분히 가능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는 숙종에게 그대로 친정을 명하죠. 이 두 사례에서 살펴봤을 때,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라는 운명이 주어진 이들의 명분과 정통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즉위 이후 갑자사화 직전까지는 연산군은 매우 정상적인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성종에 비해 대간들에게 확실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며 국정을 운영합니다. 대부분의 사극들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이지만 연산군은 공사 구분을 매우 잘하는 임금이었습니다. 업무는 잘하면서, 개인의 사생활을 즐겼습니다. 연회를 베풀거나 사냥을 한다는 등의 행동을 보였지만, 이는 전대의 임금들도 즐겼던 문제였기에 지적을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성종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로 상소를 올리자 상소자를 처형하였고, 이를 근거로 연산군을 성종처럼 휘어잡을 예정이던 대간들이 이에 대해 간쟁하자, 기회를 벼르고 있던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근거로 대간들을 쓸어버리며 절대왕권을 장악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왕정 사회에서 임금의 정통성은 왕의 역린으로서 결코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의제문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무오사화는 아버지 성종이 애써 구축해 놓았던 사림 세력이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간은 임금의 정통성 문제로 벌어진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된 간쟁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잔혹한 형벌들이 벌어지는 등의 모습도 있을 수 있었으나 당시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용납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이렇게 귀찮지만 괴로운 사림을 제거한 연산군은 강한 왕권을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장자 출신의 임금이라는 확고한 정통성과 왕의 행위를 제한하는 수단인 대간들의 세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산군은 또 하나의 세력을 정조준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세조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와 훈구화 된 공신세력들이죠.
조선 건국의 이념과 사상은 유교, 즉 성리학입니다.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절대로 침범하고 넘볼 수 없는 이념적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과 효입니다. 무오사화가 충을 바탕으로 일어났다면, 갑자사화는 효를 바탕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왕의 어머니, 즉 대비가 되었어야 마땅할 여인이 폐위당하고 사사당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이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효를 명분 삼아 숙청을 감행하는데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신하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나마 이를 제어해 줄 수 있는 대간들 역시도 무오사화로 인해 이미 쓸려나갔으며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도 왕의 행동을 보았기에 몸을 사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 연산군이 들고 나온 어머니에 대한 효라는 명분은 반박이 어렵습니다.
연산군의 이 행동은 고도의 계산이었을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아마도 연산군은 어머니 윤 씨가 폐위되어 사사되었을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폐비 윤 씨가 사사될 시점의 연산군의 나이는 7세입니다. 현재의 기준으로 7세는 어린 나이지만, 당시의 7세의 나이는 이미 학문적 교육을 받는 시기입니다. 그것도 차기 왕위계승 1순위인 원자의 신분이던 시절이며 지금도 어려운 고등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며 당시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그러나 성종의 함구령도 있고, 또한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 역시 자신에게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필자의 뇌피셜이기는 하지만, 연산군 자체가 어머니 윤 씨의 사건을 크게 문제 삼으려 하 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도 크죠.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부분들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와있으며 사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이를 모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무튼 연산군은 겉으로는 임사홍의 고변으로 이를 최초로 알게 되었다는 형태의 모습이 가장 적절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연산군이 정말로 피의 복수를 위해 20년이 넘는 기간을 참고 인내해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인내심입니다. 그 복수를 위해 지난 모든 순간을 참아왔던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보다는 훈구파를 몰아내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와 명분을 어머니 폐비윤 씨 사건으로 찾았다고 보는 편이 보다 옳은 시선일 것입니다. 갑자사화로 연산군은 지금껏 그 누구도 얻어내지 못했던 강력한 왕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서슬 퍼렀던 태종조차 얻지 못했던 강력한 왕권입니다. 굳이 비견해 보자면 이다음 다룰 숙종 정도가 그에 비견할만한 왕권을 누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 왕권을 바탕으로 지난 재위 10년간의 모습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면 연산군의 대한 평가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 감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왕권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조금은 부정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면도 있지만, 왕정 국가에서의 왕권은 곧 국정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의외로 이를 혼동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왕권이 강하다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태종이 그토록 양녕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태종이 구축해 놓은 강력한 왕권 앞에 적장자였던 양녕의 재위 승계는 그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왕권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태종이 닦아놓은 토대 위로 명분과 정통성을 갖춘 적장자의 승계를 통한 국정을 운영하고 이끌 수 있는 강한 힘이 조선의 임금들이 그토록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목매달았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산군이 해냅니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갑자사화로 훈구 세력을 몰아낸 연산군에게는 이제 본인의 의지와 방향대로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강한 힘이 생겼습니다. 연산군이 이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용했다면 그는 충분히 명군, 아니 성군 이상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대 왕권을 손에 넣은 연산은 이후부터는 거짓말처럼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국고를 탕진하고, 각종 연회로 주색을 탐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중종반정이라는 카운터를 얻어맞고 옥좌에서 강제로 끌려내려옵니다. 반정으로 공을 세운 새로운 반정공신이라는 또 다른 특권 세력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애써 훈구의 힘을 약화시켜 놓은 장본인이 그 훈구에게 역 카운터를 맞아 그들을 다시 부활시키고 만 것입니다. 세조 이후 시기부터 발생했던 각종 사회 문제는 중종과 치세가 짧아 뭘 해보지도 못했던 인종 시기를 넘어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전횡으로 곪아 터져 버렸습니다. 명종 치세말기에 가까스로 이를 정리하고 조정을 일소하였으나 그 명종 역시도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승하하였습니다. 이제 조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