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력한 왕권, 그러나 그것은 허상일 뿐이었다?
3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세조는 본인 살아생전에는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긴 했습니다. 그의 집권명분이었던 신권의 왕권 위협을 의식하였듯이 세조는 공신세력들을 나름대로는 쥐락펴락 했습니다. 그러나 세조가 간과한 것은 공신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강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이는 그 자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세조 정권은 애초에 탄생할 수 없었던 정권입니다. 그가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정난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기습적이면서도 본인의 특정 지지세력들의 완벽한 결집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조정 대신들을 때려잡았고, 또한 사육신 사건으로 그나마 조정에 남아있던 젊은 관료들마저 사라졌습니다. 조정의 세력이 공신세력만 남아있게 되어버렸고, 이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공신세력과의 결탁이 세조가 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다 하더라도 세조에게는 이들을 자제시키고 견제하며 그들의 대항마를 빠르게 키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결국 부패하고 썩기 마련이며, 그나마 그들의 대항마로 키워졌던 신공신 세력이 예종에 의해 박살이 나면서 이들은 결국 보수화되며 변질되고 맙니다. 훈구파로 변질된 공신세력은 세조를 지지하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배척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절대적 왕권을 숭상한 왕당파였습니다. 그렇기에 세조가 겉보기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이며 탈성리학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세조의 불법 권력 찬탈과 구공신세력의 결탁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만, 세조대의 내치가 나름 성공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굉장히 유연적이었으며 대놓고 환구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거나 군사적으로도 화끈한 정책을 통해 자주성을 표방하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이런 세조의 내치가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릅니다. 사실 이 구공신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인물은 세조뿐입니다. 세조 사후에 거대해진 공신 세력들은 왕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조는 후임 임금들을 위해 권력의 적절한 안배 조치를 필수적으로 진행돼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 작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조가 할아버지 태종에 비해 평가절하는 물론이요, 비교대상의 존재조차 될 수 없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가 키운 신공신 세력들은 그 구성원 자체가 너무 어렸으며, 남이와 같은 인물의 등장은 신공신세력에게 커다란 불안요소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는 그대로 적중하여 구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공신세력은 괴멸을 당해버립니다. 예종이 조금 더 오래 살아 구공신세력을 견제하고 그들의 대항마를 키웠다면,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예종 역시도 15개월의 짧은 재위기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그리고 조선사에 길이 남을 밀실 결탁이 이루어집니다. 예종의 아들이자 왕위계승권 순위 1위인 제안대군,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의 장남이며 왕위계승권 순위 2위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3순위인 자을산군이 조선의 9대 국왕으로 지명된 것입니다. 조선사 전체를 뒤져봐도 이런 경우는 신정왕후 조 씨와 흥선대원군의 결탁으로 왕위에 오른 고종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선사에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임금이 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가 없이 유명을 다하는 경우, 차기 임금의 지명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있습니다. 조선사에서는 선조와 광해군, 철종의 경우 왕실 최고어른인 대비가 지명하여 왕위에 오른 케이스입니다. 선조는 선왕인 명종이 후계 없이 죽자 인원왕후의 지명을 받고 즉위하였으며, 이는 그전부터 명종이 하성군과 그의 형제들을 후사로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성군의 즉위에 아무런 이론조차 없었습니다. 광해군의 경우 역시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던 일부 소북파의 반발은 있었으나 임진왜란부터 오래도록 세자로 있으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도왔고 신료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목왕후 역시도 영창대군을 왕위에 지명하여 수렴청정을 하라는 소북의 의견을 기각하고 광해군에게 즉위하라는 교서를 내린 것입니다. 반정으로 즉위 한 중종과 인조 역시도 왕실 최고 어른인 대비에게 명목상이기는 하지만 즉위 교서를 받고 옥좌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철종의 경우는 세도정치 시기였기에 조종하기 쉬운 안동 김 씨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워낙에 왕실 후손의 씨가 마르다 보니 적합한 왕위 계승권자를 찾기 어려웠던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종의 즉위에서는 왕실 최고 어른이던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안대군이 워낙에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배제가 되었다면 월산대군이 지명돼야 했으나 자을산군이 한명회의 사위였던 까닭에 성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공신세력들이 더더욱 부패하게 된 이유가 됩니다. 이제 한명회는 자타공인 최고의 권력자에 더해 임금의 장인이라는 외척 타이틀까지 얻게 된 것이죠. 다행히도 세조의 왕후인 정희왕후는 현명했던 까닭인지, 나이가 많았던 원상들이 하나둘씩 나이가 들어 은퇴하거나 사망하는 혼란한 시기에 성종을 끝까지 지켜주다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지시합니다.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이 비록 성종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세조와 예종시기를 거치면서 강해지고, 거기에 어린 임금을 위한 원상제가 도입되면서 이 공신세력은 너무나도 비대해집니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은 적극적으로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사림 자체는 세조 시기부터 등용되기는 하였으나, 공신세력에 눌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으며 세조 자체도 이들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종 시기 이들이 적극적으로 등용되면서, 이들이 사간원과 사헌부에 자리잡에 대간의 중심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 대간들은 성종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줍니다. 원리원칙과 성리학의 유교적 정신에 물들어있던 이들에게 성종은 사소한 사생활 하나까지도 간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성종은 이것에 대해 짜증 내고 화를 낼지언정, 그들을 처벌하지도 않았고, 결국 대부분은 대간들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실제로 성종에게 칭해지는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거주 라는 사관의 평은 당시의 대간들이 성종을 얼마나 고평가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영향으로 성종은 재위기간 내에 뚜렷하게 알려진 업적이 없음에도 세종과 함께 조선의 양대 성군으로 추앙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관점으로 보나 지금의 관점으로 바라보나 대단한 것입니다. 사사건건 간언하고 귀찮게 구는 이들에게 화를 낼지언정, 그들의 간언을 들어주고 어떤 정치적 보복도 해내지 않았다는 것은 성종의 능력과 인품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종 역시도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후계자가 자신만큼의 뛰어난 자질과 인내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놓친 것이죠. 거기에 세자의 생모를 폐비시켰을 뿐만 아니라 끝내 사사함으로써 재앙의 불씨를 남겨놓은 것이 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연산군과 숙종 편에서 더 다뤄보기로 하고 중종반정 이후의 시기로 넘어가 봅시다. 중종반정 이후 즉위한 임금인 중종은 당시 사관들이 그에 대한 평이 하나로 뚜렷하지 않듯,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임금이었습니다. 세조와 성종, 그리고 중종반정을 거쳐 더욱 거대해진 공신세력을 중종은 그 나름대로 제어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말죠. 이어 즉위한 인종은 야사에 조선의 해동공자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훌륭한 임금의 재목이었으나 즉위 8개월 만에 죽었습니다. 세조시기에 뿌려진 각종 사회적 문제가 성종-연산군-중종-인종 기를 거치며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명종시기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으로 대표되는 소윤파에 전횡으로 인하여 그동안 숨겨져 있던 조선의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일거에 터져버렸습니다. 여기에 세견선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을묘왜변과 민란인 임꺽정의 난이 발생하는 등 온갖 사회적 혼란이 발생합니다. 모 유튜브는 명종을 일컬어 짜증 나는 임금이라며 뭐 한 게 있냐고 비판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세조시기부터 누적됐던 사회적 문제가 명종 시기에 이르러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만행으로 일거에 폭발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으나 결국은 세조시기부터 이어져 내려왔던 거대한 공신세력, 즉 훈구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비로소 조정을 깨끗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세조시기에 생겨 온갖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데 많은 지분이 있는 훈구들을 100년 만에 몰아내고 선조에게 안정적인 조정을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명종의 업적입니다.
5. 마치며
모든 왕조에는 흥망성쇠가 있듯이 조선 역시도 흥망성쇠를 겪어왔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나 조선은 태종이 기틀을 닦고 세종이 발전시켰으며 문종과 단종은 통치체계와 질서를 보편화시키고 갖출만한 충분한 역량이 있었습니다. 물론 단종은 어렸으나 그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국가를 통치했다면, 혹은 문종이 보다 건강하여 오래도록 통치하였다면 조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또 그런 조선은 이후 어떤 식의 결과를 맞이했을지 궁금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대체 역사 소설에서 단종과 문종시기로의 회귀가 많은 이유 역시도 필자와 비슷한 의견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조의 명분 없는 찬탈과 집권은 결국 조선의 뿌리 자체를 흔들어 버렸습니다. 그의 권력욕으로 인해 조선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겪지 않아도 되었을 많은 사회적 문제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또한 세종시기부터 이어져오던 많은 기조가 변하게 되면서 세조 사후 임금들은 신료들이 커진 권력을 제어하고 조절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했으며, 임금이 그 조정자 역할에서 손을 떼버리는 순간 엄청난 혼란을 맞이했습니다. 쏟지 않아도 되었을 사회적 통치적 문제가 세조의 의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조가 왕권을 강화하고, 다양한 통치적 성과를 남겼다고 하더라도 세조를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종과 세조에 대한 보다 엄격하고 올바른 역사적 시선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탓할 수는 없지만, 그런 역사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합니다. 박정희 사후, 비정상적인 쿠데타를 통해 집권을 한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혼란, 사회적 갈등을 야기했습니까.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집권과 그 당시 행해졌던 불법적이고 강압적인 통치의 잔재로 인해 수많은 민주항쟁과 투쟁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그로 인해 생겼던 부정적인 여파가 40년이 다되는 지금까지도 각종 사회적 문제와 갈등을 야기하는 것을 보았을 때, 세조의 찬탈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정당성과 명분 없는 행위였는지는 명명백백합니다.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이를 올바른 국정 운영의 주체로 사용한 것이 아닌 개인의 향락을 즐기는 데 사용합니다. 갑자사화 이후의 연산군은 빈말로도 좋게 평가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종반정이 발생하게 되고, 임금이 될 수 없던 운명인 진성대군이 반정공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합니다. 또 다른 공신세력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조선에게 있어서는 비극이었습니다. 워낙 막장짓을 행했던 연산군에 대한 폐위 명분은 확실했으나 뒤를 이어 즉위한 중종은 불행하게도 명군이라 부르기에는 아쉬움이 있는 임금입니다. 당시의 사관의 평이나 교과서에서도 중종에 대한 평은 하나로 뭉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대다수입니다. 대장금의 시대적 배경이 중종시대인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며, 여인천하 방영 당시 최종환 배우가 열연한 임금이 중종인 것을 아는 분도 많지 않죠. 대표적인 예가 후대에 루머일 가능성이 높은 주초위왕이라는 사건으로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을 일거에 소탕한 중종의 친위쿠데타입니다. 반정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키웠던 조광조를 위시한 진보 사림들을 처단한 것도 그렇고 중종은 끝내 공신세력을 견제하지 못합니다.
세조라는 인물은 이미 숱한 사람들에게 물고 뜯기고 비판받은 임금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일부 역덕들에게 제한된 부분이며, 그 외에는 세조는 조카를 몰아낸 비정한 숙부가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의 기틀을 닦은 임금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특히나 이런 대중적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국사 교과서입니다. 세조시기에 시행된 육조직계제도가 왕권을 강화하는 상징으로 부각되고 태종과 세조 시기에 왕권이 매우 강했던 것처럼 서술합니다. 이후 명종시기에 있던 을묘왜란으로 상설 기구화된 비변사가 왕권을 약화시켰다고 표현하는 것이 현 국사 교과서입니다. 다만, 조선의 관직은 겸임제도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극에서 이야기하는 도제조 대감이라던가 다양한 형태의 표현이 바로 이런 겸임과 겸직이 자주 이루어진 조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비변사가 있다고 의정부의 권한이 약해지거나 왕권이 약해지는 것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의정부의 역할을 비변사가 대신하는 정도였기 때문이죠. 비변사가 진정으로 문제가 된 것은 세도정치 시기였으나 이에 대한 서술이 부족해 비변사가 왕권을 제약시키는 일등 공신처럼 보이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육조직계제를 시행한 세조 시기의 왕권이 강해 보이는 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면서, 틀린 서술이 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세조의 대한 우호적인 시선을 조금 걷어내고 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필자 개인적으로 세조를 조금 더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외의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