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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가면 Dec 15. 2024

편견의 역사 - 광해군과 인조 (2)

5. 광해군의 내치


 외교전략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든,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이든, 각각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대전략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두 전략 모두 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의 외교전략이 지지세력을 얻지 못한 반쪽짜리 정책이었던 것과 동시에 권좌를 뺏기면서 실패한 전략이라고 한다면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은 청과의 일전에서의 승리라는 대전략의 마침표의 부재와 집권세력의 무능으로 인한 실패입니다. 똑같은 실패를 놓고 광해군에게는 비운의 군주라는 평가와 인조에게는 무능한 암군이라는 평가로 극명하게 나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각 임금의 내치는 어땠을까요. 먼저 광해군부터 살펴봅시다. 광해군의 내치는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실패했다는 말 이외에는 별다르게 할 말이 없습니다. 광해군의 내치가 실패인 근거로 다양한 내용을 제시할 수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딱 2가지 정도만 내세워보려고 합니다.      


 우선 첫 번째는 궁궐공사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이 모두 불에 탔기에 선조가 거처할 곳도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월산대군의 사저를 일부 증축하여 궁으로 승격시키고 궁궐공사를 명합니다. 이는 왕정국가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도 전쟁이 끝나고 7년이 지난 1605년에 이르러서야 창덕궁 중건이 시작된 것이죠. 이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선조가 마냥 무능한 임금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단적인 부분입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의 막장 행각과 정치적 행보가 워낙에 두드러진 까닭이지 선조의 내치 자체는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많습니다. 일각에서는 수많은 인재가 있음에도 그들을 써먹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뛰어난 인재들을 발굴하고 등용한 것은 선조라는 사실을 다들 간과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조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이들은 선조시기에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는 것 역시도 이루어진 것이 무엇이 있느냐, 라며 힐난하지만 이를 반대로 대입하자면, 광해군 시기에 대동법이 시행되었다가 철폐된 것 역시 흐지부지된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가능해집니다. 광해군 시기에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나 결국 슬그머니 철회된 것은 긍정적으로 보면서 선조시기에 대공수미법 등의 다양한 논의가 있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던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너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향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히 광해군을 좋게 평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치적 중 하나를 이 대동법으로 보는 경향이 매우 강한데, 이 역시 광해군의 내정-외교 분리 프레임과 같이 국사 교과서의 영향이 매우 큽니다. 대동법은 수능을 포함한 모든 한국사 시험에서 단독 문제로 출제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문제는 대동법 문제가 보통 어느 시기에 최초로 실시되었는가를 묻고 있으며, 교과서의 기술 역시도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이 아닌, 최초의 시행에만 집중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단순 암기만 시킬 수 없으니 설명할 때 광해군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가미되고, 이때 ‘광해군에 대한 선험적 평가’가 스며들게 되고, 이것이 곧 광해군 재평가와 광해군 열풍에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과서를 그대로 가르치는 역사 교사와 강사들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시험에 출제되는 것 위주로 오랫동안 가르치다 보니 새로운 연구와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아 단편적인 몇 가지 내용을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반정으로 쫓겨나 폐위당한 것을 지난 한국 현대사의 정치 투쟁에 투영하여 감정적 대응으로 나아가 광해군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였다는 주장까지 하는 상황이죠. 그런데 그런 주장들이 그들이 그렇게 극복하고 싶어 하고 싫어하는 식민사관이라는 것을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요.      


 다시 돌아와서 민생의 안정을 돌보는 측면에서 광해군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릅니다. 숱한 궁궐공사를 끊임없이 일으켜 민생을 파탄까지 몰고 간 부분입니다. 백성들의 부역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토목 공사는 언제나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지우는 일입니다. 수문제가 통일 이후 대운하의 필요성을 느끼고서도 백성의 피해가 크다는 이유로 중지시켰던 일을 수양제가 강행시킨 것, 그 외 수많은 토목 공사는 언제나 백성에게 피해를 주기에 많은 군주가 조심해야 할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재위 기간 내내 마치 궁궐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한 궁궐공사를 명합니다. 광해군을 높게 평가하는 이들 중, 이런 궁궐공사에 대해 정확하게 짚는 인물은 아예 없습니다. 특히 어떤 유튜버는 이 궁궐공사를 광해군의 업적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 궁궐들이 현재까지 남아서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는 이유로 말이죠. 그런데 우스운 점은 광해군이 그렇게 지었던 궁궐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창덕궁의 경우는 인조정권 시기 이괄의 난 당시 대조전만 남겨놓고 전부 다 불타 버리죠. 전형적인 현대적 관점에서, 그리고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려니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광해군의 내치가 실패한 이유 중 두 번째는 편향된 인사입니다. 각종 옥사와 역모죄 처벌, 궁궐공사와 재정 파탄 등이 겹치면서 광해군 시기는 막장 그 자체가 됩니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의 행보와 아버지이자 선왕이던 선조의 끊임없는 광해군 흔들기로 인해 그 권위가 부족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의 황위 계승권이 광해군의 상황과 비슷했던 이유로 오랫동안 세자 책봉의 고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광해군의 권위와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집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명나라의 책봉 교지는 매우 큰 명분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정변이 일어나는 경우 후대의 임금은 반드시 이 명나라에 책봉의 교지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왜란 시절의 활약이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광해군은 당파와 관계없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부족한 권위를 신하들의 지지로 인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여기에 선조 말년에 태어난 영창대군은 태어나자마자 광해군의 강력한 정적이 됩니다. 물론, 이미 오랫동안 국정을 수행해 온 광해군의 권위에는 미칠 수 없겠으나 선왕의 적통이라는 정통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소북이라는 적은 수이지만 광해군지지 세력이 이탈했는데, 그런 영창대군이 무사히 장성하게 되었을 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영창대군이 사사된 부분은 도덕적으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당시 광해군이 즉위한 배경과 선조의 흔들기, 명나라에서의 책봉 거부 등의 주변 상황은 광해군의 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했기에 권력의 비정함이라는 측면에서 폐모살제에 대해서는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습니다. 당 태종 역시도 현무문의 변을 통해 형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황제가 되었으며 조선의 태종 역시도 이복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밀어내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의 성공적인 치세를 통해 그들에게 쓰여 있는 비판의 칼날을 일정 부분 치워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므로 광해군 역시도 마찬가지로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국정운행을 펼쳤다면, 이복동생을 죽이고 법적 어머니를 유폐시키는 등의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정권의 안정성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 정도로 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광해군의 행보는 과연 이 사람이 임진왜란 시기의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의 막장 국정 운영을 보여줍니다. 광해군의 국정 운영 능력은 아버지 선조는 물론, 예송을 성공적으로 조율하며 붕당정치의 좋은 예를 보여준 후대의 현종과 비교해서도 매우 부족합니다. 선조의 국정 운영 능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그는 특정 하나의 당파에 힘을 몰아주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좋은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선조는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며 본인이 원하는 형태의 정치를 진행합니다. 기축옥사를 겪고서 기세가 오른 서인이 건저를 건의하다가 서인이 일거에 조정에서 쫓겨납니다. 선조는 누구보다도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본인의 의도에 맞게 국정을 운영해 나갔습니다. 결코, 우습게 볼 처사가 아닙니다. 현종 역시도 예송으로 남인과 서인의 대결 측면에서 어느 한쪽에게 치우치지 않고, 또 이 사건으로 피로 얼룩진 정치 보복을 가하지 않습니다. 현종이 결코 과소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결국, 기자헌과 이이첨을 위시한 대북이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수많은 역모 사건과 옥사가 벌어집니다. 정치의 불안정은 민생의 불안정과 같습니다. 거기에 대북에게 권력을 몰아주었으나 대북이 광해군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것 역시 아닙니다. 즉위 초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과도한 궁궐공사와 재정 파탄, 편향된 인사 등용으로 인한 부분은 결국 광해군 외치의 핵심인 중립외교조차 지지받지 못할 정도였고, 이는 곧 광해군의 몰락을 의미하는 바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 유튜브는 이를 정반대로 해석합니다. 폐모살제를 통한 명분을 잃고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하며, 궁궐을 새로 지어 문화유산을 남겨주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하는 것 등을 그의 업적이라고 높게 평가합니다. 이 부분을 보고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과연 광해군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좋지만, 그것을 그의 업적이라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궁궐 병에 걸리고, 신하들이 재정의 과도한 지출의 대비를 위해 양전을 제대로 시행하자고 간한 것을 무시한 것이 바로 광해군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광해군의 내치는 0점에 가깝습니다.      


 6. 인조의 내치


 많은 사람이 인조를 암군으로 평가하며 조선사 최악의 임금 중에 한 명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중립외교로 명청교체기에 현명한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되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그 일로 인하여 두 번의 호란을 통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등의 의심을 받으며 부정적 평가가 끊이질 않죠.      


 근데 과연 인조는 암군이기만 했을까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조가 아주 암군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인조는 조선을 재창업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양란을 겪으면서 왕권이 추락하고 국가가 멸망 직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사회 혼란상을 수습하고 왕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만한 업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조가 왜 조선을 재창업했다고 봐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죠. 그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인조 이후부터의 왕통은 모두 인조의 혈통입니다. 인조부터 헌종까지는 모두 인조의 직계 혈통이었으며, 철종과 고종 역시도 먼 방계이기는 했으나 인조의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혈통 상으로만 따져봤을 때는 후한의 광무제와 비슷한 포지션이죠. 물론 소현세자와 원손인 원철의 숙청을 통해 이후 효종, 현종에게 정통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긴 했지만, 그의 직계가 왕통을 유지했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큽니다. 특히나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은 아주 중요한 왕실의 종법 계승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조가 그의 즉위 내내 경종과의 우애를 자랑하고, 경종을 황형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만큼 인조의 혈통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삼종의 혈맥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가 적자가 아닌 서자 계승이라는 측면을 끊어낸 중요한 사건입니다. 선조가 정철을 위시한 서인이 광해군 건저를 이야기할 때, 화를 내며 서인을 쫓아냈던 것 역시 적통, 즉 왕비에게서 나온 적자의 계승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풍토에 기반을 둡니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의 탄생을 경계하고 결국은 그를 사사할 수밖에 없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조 역시도 적통이 아닌 적자였던 효종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효종과 현종도 각각 적통의 왕자가 계승했었기 때문에 숙종 대의 강력한 왕권을 형성시켰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리학의 교조화입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내부적으로 혼란기였는데, 이를 예학의 강조를 통해 지배질서를 다시 확립하고,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지될 수 있도록 통치제도를 재정비합니다. 이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업적입니다. 왕권이 추락하고 적국에 항복한 군주가 그 재위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수습했다는 것은 그가 아주 무능한 군주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해 예학이 강조되고 각종 사회 차별 책이 등장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지만, 왕조 질서를 위한 인조와 인조정권의 노력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그가 이룩한 것이 절대로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조 이전의 조선 사회에서 성리학이 통치 이념으로 나름 뿌리 깊게 자리 잡았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성리학을 대신할 새로운 정치 이념의 등장이 부재했다는 평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내려진 성리학의 예학적 질서는 오래도록 뿌리내려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기준으로는 매우 불합리하고 부정적 평가로 볼만한 여지가 충분합니다. 다만, 양란을 계기로 조선 전기와 후기는 전혀 다른 사회적 문화를 가지게 되었고 사회적으로도 이런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시대에서 강조한 성리학이 오랜 시간 동안 민중에 뿌리내렸음을 의미하고, 또 이에 대한 대안이 없었던 것 역시 한몫을 거듭니다.   

  

 세 번째는 국가의 조세제도 및 재정을 손보고 전후복구를 성공적으로 했다는 부분입니다. 흔히 광해군이 대동법을 시행했고, 인조가 그 대동법을 철폐하였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광해군 시기는 주기별로 진행해야 하는 양전 사업마저 진행하지 않았으며 각종 사회 정비에 무심했습니다. 다만 이는 최초의 실시에 주목하는 현 국사 교과서의 폐해가 매우 큰데, 광해군은 대동법의 시행 자체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를 확대한 것은 인조와 효종을 거쳐 확립된 것이지만, 최초로 시행한 임금이 광해군이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평가가 비정상적으로 과대평가되었다는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조선 창업 시기의 과전법, 이어진 직전법과 관수관급제를 거쳐서 조선의 조세제도의 문란을 정비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실제로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만을 했을 뿐, 금방 철폐하였고, 인조 역시도 강원도를 제외하고 대동법을 철폐하였으나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을 보였으며, 이를 통해 조세제도를 재정비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재정의 방만한 운영을 축소하고, 긴축 재정을 펼치고 세금을 완화하는 등의 각종 노력이 지속합니다. 이런 국정 운영은 멸망의 위기에 놓여있던 조선을 유지하고 이후 효종, 현종기를 거치며 대동법이 확립되어 국가 경제를 안정시켜 조선이 유지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이바지 했습니다.   

   

 부정평가 요소가 많은 임금이지만, 그가 암군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가 대외적인 부분과 다양한 명분론에 집착하여 국가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군주임은 틀림없으나, 이를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어떻게든 수습하여 이후 국가가 존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는 부분까지 무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7. 마치며      


 광해군과 인조를 비교하는 글을 쓰면서 제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어느 한쪽의 편향된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광해군에게는 조금 엄격한 잣대를, 인조에게는 조금은 너그러운 잣대로 평가했다는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광해군은 비운의 군주, 인조는 임금이 돼서는 안 됐을 임금 등의 평가는 조정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를 가르치는 강사가 이런 식의 편파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제가 쓰는 모든 책과 영상에서 이것을 누누이 강조하겠지만, 역사를 단면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평범한 사람의 일생을 보는 것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고 부정적, 긍정적, 양면적인 부분들이 있는 것이 당연할지인데 특정 부분을 물고 뜯는 형태의 역사 강의는 지양돼야 합니다.      


 조심해야 할 것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와 인조의 정치적 세력이던 서인에 대한 악마화입니다. 곧, 광해군의 몰락으로 이후의 조선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정치세력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인조 이후 정치권의 핵심 정당은 서인과 서인으로부터 갈라진 노론이니까요. 그리고 그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친일 매국노가 이어지고, 또 그 매국노가 지금의 정치세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몇몇 편파적인 이들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 자체가 바로 우리가 그토록 없애고 싶어 하는 식민사학의 당파성론과 정체성론의 핵심입니다. 왜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일지,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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