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정통성 (Feat. 국사 교과서)
본격적으로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역사를 바라볼 때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서문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역사는 한쪽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위치에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다양한 사관이 존재하는 것이며,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사관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바라볼 때 한쪽면만 바라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사관으로만 공부를 하다 보면 편협한 사고를 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국사 교과서가 어느 순간부터 편향적인 한쪽 부분만을 서술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필자가 이야기하는 편향적인 부분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거나, 혹은 이념에 의한 편향된 서술을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주로 사실적 위주의 서술, 혹은 최초로 행해진 일들에 대한 내용들의 대한 기술에 그치다 보니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에 다가가는 모습이 매우 부족합니다.
필자는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한 가지는 연개소문과 김춘추 편에서 다룰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외세의 개입과 대동강 이남의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한계점을 분명히 기술하면서도, 민족문화의 통합과 나당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한 자주적 성격의 통일이라는 부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합리적인 기술이면서도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의의와 한계점을 모두 다루고 있죠. 그런데 이런 부분이 조선사에 와서는 약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신라의 통일 시점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확실치 않았으며, 한민족이 존재하지 않던 삼국시대를 현재의 민족주의 시각으로 평가한 '시대착오'적 인식입니다. 국사 교과서의 민족주의적 사관의 잘못된 인식 중 하나이죠. 다만, 이런 깊숙한 내용은 차치하고서 한계와 의의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예이면서, 사실적 기술에 의거하여 다양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국사 교과서의 편향된 기술의 대표적인 예가 광해군의 대동법입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대동법의 최초 실행을 광해군 시대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짤막하게 다룹니다. 대동법이 조선전기와는 차별화된 세제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인 것은 맞지만, 오직 최초로 시행되었다는 객관적 기술에만 그칩니다. 실제로 광해군은 대동법을 매우 탐탁지 않아 했으며 그마저도 금방 폐지했을 뿐 아니라, 기타 국가 토지에 대한 양전의 실시 등에 매우 무관심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 교과서는 최초의 시행에 집중할 뿐, 대동법이 언제 보다 보편화되었고, 어떤 왕들이 그를 위해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교육 자체가 사실 위주의 나열에 그치게 됩니다. 대동법의 최초 시행과 전국적 시행에 대한 어려움, 그리고 이를 위해 임금과 조정 대신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접근이 부족합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교육책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다양한 미디어와 SNS의 발달로 인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일부분을 재가공하여 부풀려지는 부분입니다. 그로 인해 더욱 본질이 호도되고 잘못된 역사 관점이 생기고 있습니다. 국사를 가르치는 역사 교사나 강사들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지만, 시험 출제 위주, 그리고 어떤 사건의 순서나 최초 사실에 입각한 시험 출제 방식으로 인해 강의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뉴라이트를 위시한 역사교과서 논란, 이른바 역사전쟁으로 지칭되는 갈등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위에서 설명했던 형태의 역사전쟁이라면 매우 반갑겠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역사전쟁은 초점이 조금 다릅니다. 역사 자체가 정치적 관점이 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대략적인 사관이나 정치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전쟁은 무의미한 이념갈등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보수 계열 쪽은 현재 역사학계와 국사 교과서가 좌경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반공과 반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맞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영웅화시키고 있고 이에 맞서 진보 측 역사학계는 보수 측의 주장을 일제 침략을 긍정하고 민족해방운동을 폄훼한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두 관점 모두 한국 현대사를 바라보는 방향 자체가 다르다 보니 의견은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하였듯 역사는 정치적 관점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명분과 정통성입니다. 정통성은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한국에서는 특히 조선에서 필요한 명분이었고, 그 정통성은 왕통과 연계된 있습니다. 명분은 정치 세력이 어떤 정치 행위를 벌였을 때 정당성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2004년 명분 없이 오로지 정치적 판단에 의해 무리하게 벌인 노무현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당시 양당이던 한나라당은 간신히 텃밭이던 TK와 PK 지역만을 사수했고, 새천년민주당은 원내단체 구성도 하지 못하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처럼, 명분이란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입니다. 성리학은 유교의 한 갈래이며, 불과 80년~9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성리학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많은 유교적 문화가 걷어지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유교 문화는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그만큼 유교, 더욱 정확하게 얘기해서 성리학은 지난 수백 년간 우리 역사의 근간이 될 학문이자 문화이고 전통이었던 것입니다.
명분을 얘기하면서 왜 갑자기 성리학이 튀어나오느냐,라고 물어보실 분들이 있는데, 성리학은 그 무엇보다도 명분과 정통성 부분을 강하게 주장한 학문입니다. 동아시아를 관통하는 핵심 이념인 유교의 심화한 부분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죠. 그리고 이런 명분과 정통성은 조선사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제사나 각종 정치적으로도 이 명분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심지어는 왕과 왕비의 합궁에서조차 이 명분론적인 부분들이 작용합니다. 조선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정치적 논쟁이나 싸움은 결국 누구의 명분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느냐가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현재의 관점과 시각으로 조선사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거기에 침략만 당한 한의 역사라 하여 넓은 땅을 영토로 삼았던 고구려나 고조선을 높이고 거기에 한발 더 나아가 허무맹랑한 소설을 쓰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환빠로 지칭되는 유사역사학자들입니다. 이런 유사역사학자들은 조선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나라이고, 위대한 영토를 모두 잃고 성리학이라는 학문에만 몰입하여 발전을 이루지 못한 한심한 나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튜브가 발달하고 여러 관련 서적들도 많이 출판되면서, 현재의 관점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접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습니다. 몇몇 조선왕들이 독살을 당했다거나, 혹은 몇몇 임금들이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을 망쳤다거나, 혹은 왜 임금에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짜증이 난다거나 하는 등의 평가를 합니다. 조선 현종 대의 예송논쟁을 의미 없는 논쟁이고,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쓸데없이 상복을 입는 문제로 떠들어댔다는 등의 감정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현대사에서도 이런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과 일으킨 전쟁은 신랄하게 비판을 넘은 비난을 가하면서, 우리가 타국을 침공하고 점령한 사실은 위대한 역사라고 바라봅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서 다루겠지만, 안중근은 우리 역사에서는 의사이고 위인이지만, 반대의 관점인 일본에 입장에서 안중근은 그저 자신들의 영웅이던 이토를 죽인 테러범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와 사관이 있다면, 일본에도 그런 역사와 사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동전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듯이 역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역사란 학문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하며 우리들의 시선에서만 바라보는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 부분은 토론과 대화를 통해 의견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대사적 관점과 감정적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나오는 폐해입니다. 광해군을 비운의 군주로 그리면서, 그의 폐위와 인조라는 최악의 임금의 등장으로 조선이 전쟁에서 굴욕적 패배를 겪었을 뿐 아니라 소현세자의 죽음,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 등 조선이 개혁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고 그저 성리학만을 신봉하는 경직된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렇게 극복하고 싶어 하는 식민사학의 핵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송을 그저 쓸데없는 논쟁으로 치부하고,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죽임을 당하며, 그 노론이 집권하는 세상이 이어지며, 국가의 주권을 박탈당했고, 또한 국가의 주권을 박탈에 도움을 주었던 매국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현대 정치와 경제의 상류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일부 보수 과격론자들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이런 흐름은 결국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조선사를 매도하고 왜곡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들의 주장이 바로 그 조선을 부정하고 왜곡하며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마저도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요.
뒤에서 다시 한번 다루겠지만, 예송논쟁은 그저 상복으로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 방향과 주체가 누구이냐이란 문제를 상복이란 매개로 논한 것입니다. 또한, 예송논쟁은 조선의 붕당 정치사에서 가장 평화적이고 이상적인 정치 논쟁이었습니다. 몇몇 유튜버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근이라는 대재앙이 벌어졌는데, 굶어 죽는 수많은 백성을 무시한 채 그들만의 논쟁을 벌인 것이 아닙니다. 대기근 기간 동안 예송과 관련한 상소문도 사라졌으며, 재상급 인사들마저도 이 대기근의 기간 동안에 숱하게 사망합니다. 성리학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수적이며 사상과 관념에 집착하는 학문으로만 바라보니 예송논쟁과 더 나아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현재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이어집니다. 바로 현대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나오는 폐해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은 무시한 채 현대적 관점으로만 역사를 바라보니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성리학과 조선의 지배층이 정말로 그들만의 세계와 논리에 빠져있었다면, 조선은 이미 훨씬전에 망해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해서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명 말기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양명학과 고증학조차 성리학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성리학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한국의 역사에서 왕조교체에서는 반드시 새로운 지배세력과 그들의 집권을 뒷받침할 새로운 사상이 등장했습니다.
사극을 보다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 적을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전례에 없던 일이옵니다”가 그것이죠. 이 전례라는 것은 명분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기본적으로 왕위 계승은 임금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차기 권력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했습니다. 거기다가 선왕은 보통 임금의 아버지인 경우가 많죠. 따라서 선왕의 권위는 임금의 권력남용을 제지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명분이었습니다.
그만큼 명분이란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무기입니다. 현대 정치를 살펴봐도 이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헌헌법에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4년 중임제입니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 재임 기간과 동일하죠. 그런데 이걸 사사오입 개헌으로 깨버립니다. 주요 내용의 골자는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대통령 재선 제한의 철폐입니다. 다만 이것이 얼마나 큰 파장을 미치고 올지 알고 있었기에 당시 집권 여당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초대 대통령에 한해"입니다. 당연히 독재적이고 민주적 파행이었습니다. 거기에 3.15 부정선거까지 겹치면서 이승만 정부하에 있었던 수많은 잘못된 정책들과 더불어 명분이 깨지면서 이승만은 결국 하야합니다.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그의 대통령 당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알선하고 경제개발로 빈곤을 해결하겠다는 당면한 사회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실제로 먹혀들어 가자 많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을 추진할 수 있었으며, 김대중을 이기고 당선이 될 수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몰락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명분에 있습니다. 박정희는 3선 개헌 당시 다시는 대통령 시켜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고 외쳤고 실제로 유신헌법을 단행하며 그 말을 지켰으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 명분을 모두 깎아 먹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조치였으며 이로 인한 수많은 민주화 투쟁이 벌어집니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범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고 끝내는 권력을 잃고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명분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전두환의 5공화국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개발을 이루고 올림픽 개최권을 따왔음에도 불구하고 범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고 끝내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하며 무너졌던 것은 그들의 집권과정에서 벌인 군사 쿠데타가 그 어떤 명분이 없는 정권 찬탈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의 문민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의 문민정부의 정권 이양을 최초의 민주적 정권교체라고 하지 않는 이유 역시도 그가 3당 합당을 통해 노태우와 야합으로 만들어진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영삼의 이런 기습적인 3당 합당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3당 합당에 반발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절규입니다. 미국이 최초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 테러를 당해 수많은 미국인이 목숨을 잃자 테러 단체를 박멸하겠다는 확실한 명분으로 미국 국민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전쟁을 일으켰고, 이것을 근거로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근혜의 당선과 탄핵이 조명받는 이유 역시도 박근혜의 명분은 곧 그의 부친인 박정희였기 때문이며, 그녀가 탄핵으로 몰락하고서 많은 보수세력의 외면을 받은 이유도 그녀가 박정희의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명분은 어떤 정치인과 정치 단체에 있어 목숨과도 같습니다. 명분과 각종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 정치가의 정치적 생명은 끝이 납니다. 현대에도 이럴진대 과거에는 그것이 더욱 심했습니다. 특히나 전제군주국의 경우 정치적 명분과 정당성을 잃는 것은 곧 정치적 생명과 동시에 그 목숨마저 내놔야 했던 것입니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으로 집권하고서도 무사히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명분이 태종에게 있었던 까닭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인정사의 콤플렉스를 앓던 태종은 막장 짓을 벌이던 양녕대군의 적장자 승계를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일이 자식 대에 벌어지면 안 된다는 부성애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아버지와 형제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명분이자 오명을 자식 대에서는 끊고 싶은 욕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조가 왜 끝끝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공신세력을 쳐내지 못하였는가에 대한 의문 역시도 정통성 만렙인 어린 조카 단종을 사사하고 명분 없이 차지한 용상이기에 공신세력의 지지가 없으면 그 역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를 수 있지만, 인조정권과 서인이 왜 끝끝내 명나라에 집착하고 모문룡에게 군자금을 대어 결국은 청에게 굴복당한 것 역시 그들이 내세웠던 반정 명분이 재조지은, 명이 조선을 구했기에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였던 까닭입니다. 명을 배신하고 청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들의 집권명분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죠. 실제로도 인조정권은 반정 직후 이괄의 난이라는 역 카운터 쿠데타를 맞아 몰락 직전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했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명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인조정권이 부당한 정권이었을까요? 그들에 대한 비판은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고, 현대적인 관점과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광해군과 인조파트에서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이던 효종의 즉위 정당성은 형수인 세자빈 강 씨와 그의 조카 삼 형제의 비극입니다. 전통 왕통 종법에 따르면 차남인 봉림대군은 즉위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세자에게 아들이 있어 세손이 있는 경우 차남이 아닌 세손이 왕위를 잇는 종법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왕가의 손이 귀해지고 반정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봉림대군, 즉 효종은 애초에 왕실의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효종은 즉위 이후, 인조의 공신이자 인조의 부정적 평가에 한 부분이기도 했던 김자점을 파면시켰으나 사소한 잘못이라고 선을 그어버렸고, 강빈을 복권해 달라는 숱한 조정 대신들의 주청에 매우 분노했던 것이죠. 강빈을 복권해 버리는 순간, 자신의 즉위에 대한 정통성과 명분이 동시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강빈과 그의 조카들을 복원하는 순간, 효종의 즉위가 잘못되었고, 더 나아가 선왕이던 인조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곧 스스로 명분과 정통성을 깎아 먹는 일인 것입니다. 인조와 효종, 그리고 현종으로 이어지는 왕통의 계승과 원자-세자-왕 루트를 통해 정통성에 흠결이 없는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단종과 세자빈 강 씨 등이 복권된 이유도 이들을 복권해도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에 흠집이 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던 까닭입니다.
정조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무사히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사도세자보다 먼저 태어나 세자가 되었으나, 일찍 죽었던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영조 역시도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죄인의 낙인을 찍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적통으로 원손을 거쳐 세손이 될 수 있었지만, 사도세자가 폐위되고 죄인이 돼버리는 순간, 그 적통의 지위를 잃고 마는 것이죠. 그렇기에 영조는 정조를 죽은 효장세자의 장자로 입적하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끝내 폐세자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명분으로 즉위할 수 있었던 정조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끝끝내 추존하지 못합니다. 흔히 잘못 알려진 정조의 즉위식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한 부분 역시도 전형적인 왜곡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정조는 스스로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즉위한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며 사도 세조를 추존하려는 시도는 스스로 정통성과 즉위 명분을 모두 날려먹는 정치적 악수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명분과 정통성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사극과 매체, 유튜브를 통해서 널리 퍼지고 있는 서인-노론 카르텔 역시도 정치에서 명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가깝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합니다. 수구 꼴통의 서인들이 조선을 망치고 친일파로 돌아섰다고 말이지요.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역사를 굉장히 편협하고 좁은 의미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노론이 아니더라도 당시 시대 상황에 맞춰 일본에 협력한 이들은 매우 많았으며, 또 그들이 모두 친일파로 돌아선 것 역시 아닙니다. 또한, 안동 김 씨 역시 정조를 반대한 노론 벽파가 아닙니다. 또한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앞장서고 정조의 즉위에도 반대판 적폐 무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벽파라는 이름의 명칭은 사도세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추숭을 이유로 남인과 왕의 뜻에 동조하는 일부 노론 세력이 시파가 되자, 그와는 반대의 정치 성향을 가진 이들, 즉 사도세자의 추숭을 반대하는 이들과 정조의 정치적 성향에 반대하는 세력일 뿐입니다. 또한 이들은 순조 이후 시파에 의해 다시금 조정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이 노론 음모론을 근거로 현재의 사학계 역시도 철저한 노론의 후예이며, 노론=친일파, 라는 프레임으로 몰아갑니다. 얼마나 그들이 편협한 사관을 가지고 조선 정치사의 흐름에 무지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명종 집권 말기에 이르러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과 훈구파들이 일소되었습니다. 이어서 즉위한 선조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사림들이 등용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곧 이조전랑 후임권을 위시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됩니다. 붕당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한번 이야기하기로 하고 조선의 붕당정치는 기축옥사를 계기로 갈등이 심화하기 시작했으며 광해군 시기 대북 일당 독재체제로 수많은 당파 인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환국 정치로 인해 서로를 증오하는 단계에까지 몰렸으며 경종과 영조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지경까지 다다릅니다. 그렇기에 예송논쟁이 조선의 붕당정치를 논할 때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몇몇 유튜버들이 그토록 의미 없는 논쟁이라 떠들어대는 예송은 단순히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싸운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서인과 남인이 각각의 정치적 이념과 성리학적 이해 방식에 따른 왕의 상징성과 권한에 대한 평화적 논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만 합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편견의 역사 사건 편에서 예송에 대해 자세하게 다뤄보겠습니다.
짧게 다루고자 했으나 예상외로 길어졌습니다. 비록 위에서 길게 주절주절 떠들었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각각의 정치세력에는 그들의 집권에 대해 정당성과 정통성, 즉 명분을 통한 정치적 승리, 즉 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분별한 선악과 흑백의 이분법적 논리는 지양해야 하며,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할 때, 당시에 놓인 시대 상황과 정치적 상황을 그 시대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현대적 관점에서 어떤 비판과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하지만, 작금의 상황에서는 현대적 관점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바라보고 비판합니다. 선후가 잘못되니 평가 역시도 감정적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견과 사실들을 전달하는 것이 역사 강사와 유튜버들이 해야 할 일이지만, 아쉽게도 대중에 노출된 많은 역사 강사들은 현대의 관점으로 감정적으로 역사를 가르칩니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