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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가면 Dec 07. 2024

편견의 역사 - 광해군과 인조 (1)

광해군과 인조 (1) 

1. 들어가며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계획을 할 당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조선의 임금들입니다. 수많은 대중매체와 역사 강사 및 유튜버들은 광해군을 비운의 임금이라 그리고 있으며, 인조는 시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조선 역사상, 아니 한국사 최악의 암군이라며 비판합니다. 필자 역시도 초등학교 당시 이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존경하는 역사 속 인물을 말하라고 할 때, 광해군을 발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중립외교라는 외교적 전략을 쓰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보며 그를 욕하고 비난했습니다. 이런 생각에 변화를 주게 되었던 계기는 대학교 시절 전공과목으로 배웠던 조선의 사회경제문화사를 배우면서였습니다. 이 과목에서 광해군의 내치에 대한 부분을 다루었는데, 의외로 많은 문제들을 발견하고서 내가 못보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전 서점에서 광해군과 인조에 관련된 많은 서적을 살펴보았습니다. 광해군의 내정과 중립외교, 그리고 인조 정권에 대한 평가에 대한 다른 관점의 이야기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전히 광해군과 인조 정권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대중적 관점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오항녕 교수의 저서에서 새롭게 관점의 전환에 대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광해군은 내치보다는 외치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며, 그 중 대표적인 정책이자 광해군 최대의 치적이라 여겨지는 것이 바로 중립외교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립외교는 과연 성공한 외교적 전략인지,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 중 하나인 친명배금 정책은 정말로 국제 정세를 파악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외교 전략이었는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더불어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내치에서도 인조보다 광해군이 더 월등하게 잘 통치했는지에 대한 부분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임진왜란과 선조의 몽진, 그리고 광해군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 한국사의 주요 무대는 한반도로 국한됩니다. 이후 한국사는 대체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물론 고려사는 치열한 대중(對中) 투쟁을 이어가지만, 실제로 전화가 한반도 전체로 퍼진 시기는 거란의 2차 침입으로 인한 개경 함락과 대몽항쟁, 그리고 고려 후기 왜구와의 항쟁 등으로 고려사 500년 전체를 놓고 살펴봤을 때, 극히 일부로 봐도 무방합니다. 조선으로 넘어가서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조선은 여진족과의 국경 지역에 한정된 소규모 국지전과, 을묘왜변 등이 그들이 겪었던 전란 전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임진왜란은 전쟁 초기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모하며 황폐화됩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파죽지세로 인한 이유가 매우 컸습니다. 일본이 이렇듯 한양으로 미칠듯한 기세로 진군했던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선조를 포로로 삼아 전쟁을 조기에 끝내겠다는 전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몽진을 비난하는데 이는 전근대에서 왕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선조의 몽진 자체는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그 뒤에 의주에서 벌인 그의 행태는 비판받을 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몽진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일례로 명의 정통제는 오이라트군에 맞서 친정하였으나 대패 후에 포로로 잡힙니다. 중국의, 그것도 통일 왕조의 황제가 침략군에 맞서다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닌, 친정 중에 포로로 잡히는 전무후무한 사건에 명 조정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급하게 정통제의 이복동생이었던 경태제가 즉위하게 되고, 정통제는 명 조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습니다. 오이라트가 이에 쓸모가 없어진 정통제를 석방하자, 명 조정은 다시 둘로 나뉘게 됩니다. 명 조정은 정통제 복위와 경태제의 후계 구도 설립에 실패하는 등, 엄청난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것은 명의 영토내에서 벌어진 일도 아닌 명의 토벌전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영토가 유린당하고 있는 와중에 세자를 책봉하였다하여 조선 그 자체인 왕이 한양에서 결사항전을 벌인다? 막아낸다면 다행이지만, 실패해서 임금이 사로잡히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뒤에 벌어질 혼란과 파국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전근대 국가, 특히나 중국과 한국에서의 임금은 말 그대로 나라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선조는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자 곧바로 몽진을 결정했으며, 혹시라도 그가 사로잡힌 경우를 대비하여 급하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이끌게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극에서 국본, 즉 다음 왕통을 이을 세자나 세손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까닭입니다. 임금은 대체 불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간에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던 시기 대단한 활약을 펼칩니다. 불과 15~16세의 나이에 적진 한복판을 뚫고 들어가 위문을 하고 분조를 이끈다는 것은 현대를 기준으로 봤을 때도 대단한 일입니다. 당시에는 15세 이후를 성인으로 보긴 했으나 세자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권위와 명분, 정통성을 챙긴 것이 아닌, 갓 세자에 임명된 초짜 세자가 제대로 된 제왕학의 교육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연륜이 있을 리 없는 상황에서 저런 행보를 펼쳤다는 것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매우 고평가받을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위 파동을 일으키고 요동으로 도주하겠다고 했던 선조의 행동은 더더욱 광해군의 권위를 높여주었습니다. 선조가 진정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은 그가 몽진을 한 것도 아니고, 원균을 높여 이순신과 동급에 놓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두 행동 모두 명분자체는 충분합니다. 원균을 높여 이순신을 견제하려고 했던 부분들도 선조라는 인물의 편협함을 보일지언정 정치적 명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본인이 직접 행하고 이끌어야 할 조정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을 하려고 했던 행동은 쉴드가 불가능한 행위였습니다. 


 선조의 이런 논란은 뒤로 하고,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끈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고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 그의 권위는 확고해지며 북인과 남인, 서인 등에게 확고한 지지를 받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특히나 서인에게 지지를 받았다는 부분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몇몇 극단주의자들이 비난하는 서인들이 세자로 밀었던 인물이 그들이 그렇게 고평가하는 광해군이라는 것이죠. 기축옥사로 조정을 장악했다고 믿었던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이 광해군 건저를 주청하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죠. 그런데 재밌게도 그렇게나 확고하게 광해군을 지지하던 서인들이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능양군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켰다는 부분입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는 광해군의 내치와 외치가 당시 서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잘못된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정말 성공한 외교전략인가.


 현재 국사 교과서는 어느 부분에서는 대단히 편향적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광해군입니다. 이상하게도 광해군의 실정에 관해서 국사 교과서에서는 제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2009년 검정으로 바뀐 뒤에 편찬된 미래엔컬처그룹의 교과서 204쪽에서만 광해군의 궁궐공사와 폐모살제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서 미래엔컬처그룹을 제외한 어떤 교과서에서도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내내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혼군, 또는 암군이라는 평가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만선사관을 비롯한 식민사관을 형성해낸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키치는 광해군을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친 군주’로 표현했습니다. 특히나 이나바 이와키치는 식민지시대 광해군 재평가의 선두주자였죠. 광해군을 재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도 실드를 칠 수 없는 광해군의 내정과 외교를 분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런 내정과 외교를 분리하고 나서도 외교 부분에서마저 그 전략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매우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광해군의 내치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광해군 최대의 치적으로 대중들이 알고 있는 외교전략인 중립외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절반의 성공과 절판의 실패로 볼 수 있습니다. 왜 절반의 성공으로 봐야 하느냐의 이유는 서인과 남인, 거기에 본인의 지지세력인 대북까지도 이를 격렬하게 반대한 이유입니다.  광해군이 온갖 옥사를 통해 키워왔던 그의 친위세력이던 대북까지도 그의 외교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전략의 추진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결국 광해군이 내세웠던 중립외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인조 정권이 결국은 청에 패배한 것도 그의 중립외교가 절반의 성공으로 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관점과 이후의 역사적 사실과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의 시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광해군의 외교전략은 고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당시에 처한 동북아시아 정세와 명이 우리를 도와주었다는 명분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을 때, 이후의 인조정권이 주장한 친명배금 정책의 방향자체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는 언급했던대로 결과를 모두 알고 있는 현대적 관점에서 당시를 바라보기에 발생하는 오류입니다.


 또한 광해군의 외교전략이 정말 제대로 된 외교전략이고 확고하게 밀어붙여야 했다면, 광해군은 신하들을 설득시키고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소수의 대북세력에게 권력을 몰아주었고, 조정내에 그의 대외전략에 지지를 할 수 있었던 서인과 남인을 쫓아내었고, 대북조차도 중립외교에 대한 필요성을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전략의 철학을 당시의 신하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했던 부분들 역시도 우리는 주의 깊게 살펴봐야만 합니다. 친명배금,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세력들 역시도 광해군의 외교전략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하는 스탠스를 취한 것이 실록에서 여럿 보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재위 내내 벌인 옥사는 결국 스스로 외교전략에 동력을 잃어버린 꼴이자,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으며, 이후 명분론에 입각한 어설픈 청에 대한 배척으로 인해 두 번의 호란을 얻어맞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것 역시도 넓게 살펴봤을 때,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절반의 성공으로밖에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또한, 중립외교를 절반의 실패로 볼 수 있는 까닭을 알아보기 전에 당시 조선이 명청교체기에 두 제국에게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느냐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7세기 초 당시의 조선과 명, 청간의 삼국 사이의 동아시아 정세는 고려 초기 송과 요, 거란과의 관계의 복사본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17세기 초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살펴보기 전에 11세기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무너뜨리고 만주 일대를 호령하는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거기에 후당의 석경당이 연운16주를 할양하는 대가로 군사를 빌리면서 거란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연운16주의 할양은 만리장성 안쪽, 거란이 송을 침공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이 없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 외에도 언제든지 유목민족인 거란이 농경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생산력과 인구를 충원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에 중원을 통일한 송과도 맞설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후방의 고려가 문제였습니다. 고려 역시도 고구려의 후계국을 자처하며 북진정책을 피며 거란의 사신을 홀대하고 선물 받은 낙타를 죽이는 등의 거란에 대한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송은 당의 몰락했던 원인 중 하나였던 절도사에 대한 권한을 축소하고 문치주의를 강화한 결과 국방력의 약화로 이어졌으며, 북방 기마민족을 막아주는 경계였던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를 거란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기에 송과의 일전을 치르고 싶지만, 후방의 고려가 걸림돌이 되었던 거란과 연운16주를 차지하여 거란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내쫓고 싶은 송, 그리고 송의 도움을 받아 거란의 압박을 이겨내고 싶은 고려의 삼국 간의 대결이 이어집니다. 결과는 모두 아시다시피 넓은 범위로는 3차, 좁은 범위로는 7차에 이르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이 삼국 간의 힘의 균형이 맞아들어가며 동북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 시기 고려는 현종과 문종 시기를 거치며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결국, 이런 국제 정세를 살펴봤을 때, 11세기의 고려, 거란, 송 삼국은 국제적 질서에서의 역할과 각 국에게 기대했던 방향이 모두 다릅니다. 우선 고려는 건국 조인 왕건부터가 고구려의 후예국인 발해를 멸망시켰던 이유로 거란에 적대적인 자세였으며, 송과의 협공으로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했던 것이 주요 외교전략이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송은 고려에 제대로 된 지원을 해줄 의지도 없었고 실제로도 다양한 이유를 들어 지원을 거부합니다. 송에게 있어서 고려는 그저 거란의 침공을 대신 받아줄 방패 정도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7세기 당시의 명이 조선에 기대했던 것과 딱 같습니다. “니들이 청을 막아주면 좋은데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은 좀 끌어줘, 나중에 복수는... 할 수 있음 해줄게” 정도의 인식이죠.


 유목민족은 기본적으로 생산력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약탈 경제로는 거대한 영토의 경제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이전의 위진남북조 시기의 유목민족들이 그러했으며, 거란이 그랬으며, 이후의 이민족 왕조인 여진의 금과 몽골의 원이 그렇게 동화되어 갔습니다. 그러므로 거란은 송과의 결전을 통해 중국 내륙 깊숙하게 내려가고 싶어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후방의 안정이 필요했습니다. 송과 고려 양면전선으로는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여 거란은 끊임없이 고려에 굴종을 요구합니다. 고려는 때로는 유화적으로 때로는 강경하게 거란의 외교전략에 맞섰고 결국은 고려거란전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동북아 삼국의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 17세기의 조선과 11세기의 고려가 놓인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성종 시기의 거란에 대한 유화책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그 결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조선 또한 고려가 그러했듯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중립외교를 통해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던가, 그게 아니면 고려처럼 거란에 대승을 거둬 동북아 삼국 간의 힘의 균형자가 되던가 양자택일의 상황에 부딪힌 것입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거란에 화해적인 제스처를 보내며 전쟁을 막으려고 했던 고려 성종의 정책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후 고려는 성종 사후 즉위한 목종이 강조의 정변으로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 후 거란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며,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이후 호란이 벌어진 것까지 복사 붙여넣기 형태로 똑같아집니다.


 조선이 어떤 외교전략을 취하든 그것은 당시 집권세력들이 책임을 지면 되는 것이지만, 중립외교가 결국은 실패로 평가받아야 하는 책임 역시 광해군에게 있습니다. 과거 고려처럼 정변으로 인한 정권의 교체로 인해 외교전략 자체가 변하게 되며 전쟁으로 치닫게 되고, 고려와는 반대로 처절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가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고 그것을 설득하며 정책의 연속성이 생기고 성공했을 때가 결국은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절반의 실패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외교전략은 실패한 전략인가.      


 그렇다면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외교전략은 실패한 전략일까요.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처절한 실패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단순한 패배가 아닌 임금이 오랑캐라 업신여기던 여진족의 우두머리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굴욕을 당했으니 더더욱 비참한 치욕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하나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각종 매체에서 삼전도의 굴욕에서의 삼배구고두례를 매우 치욕적이고 비참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때로는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의 이마에 피가 흘렀다고 표현한다거나, 혹은 예절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만주족의 장수가 여러 번 다시 하게 시켰다는 등의 말들이 종종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는 그저 외교적 절차의 한 부분이며 민족적 패배의식을 고조시키고 인조를 비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여 과장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청은 승리하고 조선은 패배하였다, 패배한 조선의 국왕이 청이 제시한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을 뿐이며, 그것이 조선의 임금이 직접 청의 황제 앞에서 예를 취하라는 것일 뿐, 이것이 국가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자 굴욕으로 평가되기에는 과한 감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살펴봤을 때, 당시 인조정권은 국가의 존망을 앞에 두고 국가 존속을 위해 항복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삼전도의 굴욕을 비난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왜 그런 치욕스러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과 그들이 택한 외교전략이 왜 실패하게 된 부분들을 되짚어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적 이해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인조의 대외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닌 결과에만 집중합니다. 결과만 놓고 살펴보다보니 광해군과 비교 분석되게 되고, 또 그에 따라 광해군에게는 동정을, 인조에게는 분노를 하게되는 것입니다. 인조 정권이 왜 강경한 대외정책 노선을 펼쳤는지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없습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자세는 왜 그들이 그런 노선을 취했는지에 대한 배경과 패배 원인을 분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들이 택했던 친명배금 정책은 정말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었는지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다시 여기서 11세기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요는 오대십국 기간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중국 내부를 잠시 장악하기도 하지만, 잔인한 점령정책으로 인해 중국 내륙 깊숙하게는 접근하지 못합니다. 이어 등장한 송과 오랜 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송에게 위기를 겪기도 했고, 반대로 송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송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지 못했던 이유는 유목민족의 한계상 그 인구와 병력의 수가 농경제국인 송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던 까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거란은 후방을 안정화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고려를 복속시키길 원했으며, 금방 끝날 것이라고 여겼던 고려와의 전쟁은 고려의 거센 저항과 패배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전쟁의 장기화를 두려워하던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상호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고려는 형식상으로 요와의 사대관계를 이어가고 강동 6주의 보장과 평화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한 현종과 거란의 압박은 매우 거센 상황이었으며, 이 와중에 강조는 거란의 성종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조선 역시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당시의 정세는 매우 급박했습니다.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인조에게는 똑같이 이런 복잡한 국제 정세와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나갈 강한 리더쉽과 지도력이 필요했습니다. 2차 침입 당시 고려 현종 역시 나주까지 몽진하면서 저항하였으며, 끝끝내 거란이 개성을 점령하고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 양규와 김숙흥을 위시한 고려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 심각한 피해를 보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귀결되는 고려거란전쟁의 최종 승전을 울리게 되면서 고려는 평화를 이어가게 됐습니다. 인조에게 참고해야 할 전례가 바로 고려 현종의 예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서 살펴보자면, 고려의 사례를 살펴보았을 때, 친명배금 정책은 충분히 현실적인 실현이 가능한 외교전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미 고려가 이런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평화를 누렸던 것도 당시 인조정권의 계산에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조선에 필요한 것은 단 한 번의 승리였기 때문이죠.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오해는 인조정권은 청에 대해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인조반정 이후 청에 대한 강경책과 함께 평안도에 방어 태세를 강화하려는 명령을 내렸으며, 수많은 대책이 조정에서 오갑니다. 다만, 이괄의 난 이후로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는 역 쿠데타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평안도 방어에 온 힘을 다하지 못했으며, 조정에서도 숱한 대책이 나왔으나 이상론이 나오거나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려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거기에 당시 모문룡에게 막대한 군비를 지원하는 등 조선의 부족한 재정이 더욱 부족한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은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인조정권이 강한 친명배금 정책을 펼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의 건재와 후금이 명의 만리장성을 뚫지 못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집권 명분이 친명배금이기에 후금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명분론적인 부분들도 분명히 존재하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은 비록 내부가 망가지었을지언정, 후금이 중국 내륙으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인 산해관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까닭입니다. 후금은 이 산해관을 공략하는데 많은 애로 사항을 겪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후금의 건국 시조인 누르하치가 산해관에서 홍이포를 맞고 사망했다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야사를 실제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야사가 돌만큼 만리장성 산해관의 방어가 그만큼 굳건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한국에서는 졸장으로 평가되지만, 수많은 국지전과 게릴라전을 통해 후금의 전력이 산해관에 투입되지 않도록 했던 모문룡의 분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졸장이며 비겁한 장수로 여겨지는 모문룡이 중국에서의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을 봤을 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종합해보면, 후금의 중국 내륙 진입을 만리장성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으며, 명이 쉽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원숭환 처형 이후에도 십수 년 동안 끝끝내 산해관은 뚫리지 않았으며 결국은 오삼계의 투항으로 열리게 됩니다. 원숭환 처형 이후 명군의 지휘체계가 흔들리고 무너지며 숱한 약탈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산해관은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조선 조정이 친명배금 외교정책을 폈던 것이 시대적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 실패한 전략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조정권에서는 충분히 내세울 수 있는 외교적 전략입니다. 조선이 후금의 공격을 막아낼 수만 있다면 11세기와 같은 삼국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환경 자체는 조성이 되어 있던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판단하에 외교전략을 수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본적으로 그들의 외교 전술이 현실감각 자체를 아예 잊어버린 전략은 아니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거기에 인조 즉위 초반에 전쟁을 대비한 다양한 방안이 나오고 이괄을 위시한 서북면 방어군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본다면 그들의 외교전략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이괄의 난 이후의 한심했던 평안도 방어 태세는 핑계가 불가능하지만요. 따라서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에 대한 외교노선의 비판이 아닌, 그에 알맞은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인조 정권을 비판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한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조선과 명, 청 삼국 사이의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상황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청과의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과거 고려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동북아 평화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가 될 수 있었듯이, 조선 역시도 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지만, 본인들이 제시했던 친명배금 정책의 명분도 지키며, 본인들이 그리려고 했던 삼국의 평화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조선이 청을 정벌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무지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명의 농민반란으로 결국은 멸망했기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조금 뒤로 생각하고 오직 조선의 입장에서만 살펴보자는 것이지요. 만약이지만, 청태종 홍타이지가 직접 친정을 행했던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이들을 막아내고 장기전 구도로 나아가 청이 더 이상 조선에 신경을 쓰지 못할때까지 버텨냈다면, 청은 조선이라는 후방의 위협 때문에 대명 전선에 온힘을 쏟아붓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의 산해관이 명의 혼란으로 있어도 무너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거기에 한족과 만주족의 교체라는 명청교체가 아닌, 한족내에서의 새로운 왕조가 등장할 수도 있던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반드시 후금과의 전쟁에서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형식상의 승리라도 조선에게는 절실했던 것이죠. 일단 조선이 후금에게서 승리를 해야, 이후의 일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모두 아시다시피 처절하게 패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역량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어서 있는 힘껏 맞붙고 패배했다면, 지금과 같은 조롱과 비난이 인조정권에 쏟아졌을까요. 역사에 가정이란 없기 때문에 IF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그랬다고 한다면 한국사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무언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배했다는 것입니다. 기껏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고 나라를 통치할 위치에까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패배했습니다. 그들을 위한 변을 해줄 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변명들이 패배를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웠던 외교의 대전략이 실패했기에 비판할지언정, 시대착오적 외교전략이며 인조는 최악의 암군이라는 비난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조라는 임금은 조선사 최악의 암군이라는 평가와 함께 온갖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두 임금의 외교전략을 종합해서 살펴보자고 한다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나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이나 방향이 다를 뿐 그들이 추구했던 대전제는 같습니다. 명청교체기에서 명과 청이 대립하는 와중에 조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힘의 균형을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겠다는 전체적 구성은 동일하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이것을 실현하는 것에 있어서 광해군은 조금 더 평화적이고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중립외교를 쓴 것이고, 인조는 한번의 승리와 그로인해 생기는 국제 정세의 억지력으로 피해를 최소화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에서의 마지막 한 방은 청과의 전쟁에서 상징적인 승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전략의 방향은 같습니다.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이 조금 달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뛰어난 외교 전략 전술의 대가로 평가받고, 누군가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눈조차 없다고 비난받습니다. 결국, 이것은 정치적 패배를 겪은 광해군과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인조 간의 견해 차이와 더불어 인조 정권에게 과도한 비난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인조 정권의 외교 전략이 실패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의 실패로 조선은 다양한 성장 동력의 제한이 걸리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 사회는 예학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경직성이 생기게 됩니다. 병자호란 이후에 생긴 조선 사회의 새로운 문제였죠. 만약에 인조 정권이 고려 현종처럼 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인조에게는 다른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주라는 타이틀만큼 강력한 타이틀은 없을테니까요. 결국은 결과론적인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의 외교전략의 대한 접근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전략이 아니라 왜 실패했는가를 짚어봐야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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