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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가면 Dec 21. 2024

편견의 역사- 문종과 세조 (1)

1. 들어가며 


 문종과 세조는 모두 한국사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의 아들들입니다. 다만, 아버지 세종대왕이 세자가 아니었던 탓에 세종대왕의 대군 시절 태어났던 아들들이죠. 백부인 양녕대군의 패악질만 아니었다면, 감히 임금의 자리를 꿈꿀 수 없는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큰아버지 양녕대군은 온갖 패륜을 저지르고 폐세자 되었으며, 갑작스레 아버지였던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이들도 신분이 뒤바뀌게 됩니다. 임금의 자식들은 보통 태어난 이후 혼례를 치르면서 대군이나 군이란 칭호를 부여받았던 까닭에 문종은 군호가 없는 최초의 임금입니다. 건국 조인 태조를 제외한 나머지 임금들은 모두 봉호, 즉 군호를 받았으나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군호를 받기 전에 세자에 책봉되었기 때문이죠. 또한 문종은 조선왕조 최초의 적장자 임금입니다. 드디어 왕조 국가에서의 전통적 방식의 적장자 승계가 이루어진 것이죠. 세조 역시 아버지 세종이 임금이 되면서 그 신분이 뒤바뀝니다. 보통 임금의 아들의 아들, 그리고 그 손자와 손녀까지 왕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다만 그중에서도 장자가 아니었기에 미묘한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두 사람 모두 임금이 될 수 없는(물론 왕위 계승 후보에는 엄연히 올라있기는 하지만)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이들의 위치가 바뀌어 버립니다. 어찌 보면 문종과 세조, 두 형제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할아버지 태종의 결단에 의해 조선을 넘어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탄생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조선의 비극이 시작되었으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입니다. 여담으로 태어나자마자 차기 국왕으로의 등극이 확정되고 임금에 오른 이는 원손-세손-세자-왕의 루트를 탄 단종입니다. 거기에 단종은 상왕과 노산군이라는 군호까지 얻어서 남자 왕족이 얻을 수 있는 모든 칭호를 다 얻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2. 문약한 임금 문종?      


 문종에 대한 편견은 바로 문약한 이미지입니다. 유약하고 병약한 임금인 문종이 강력하고 굳건한 동생 수양대군을 두려워하여, 아들 단종의 미래를 걱정한다는 설정의 사극은 숱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제가 보았던 매체상에서의 최초의 문약한 이미지의 문종은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한명회부터였습니다. 견훤역을 열연한 것으로 유명한 서인석 배우가 세조 역을 맡아서 강렬했던 인상이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채시라 배우가 연기대상을 받았던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임동진 배우가 열연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각종 드라마 매체상에서 묘사되었던 세조의 이미지는 강함과 올곧음이었으며 문종의 이미지는 유약하고 동생을 두려워하는 형태로 묘사되었죠. 거기에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육조직계제를 시행하며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앞장섰던 임금으로 태종과 더불어 세조가 꼽힘으로써 유약한 임금인 형 문종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라는 이미지가 형성되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문종과 세조의 이미지가 과연 사실일까요.     


 역사에 관심이 많고 조금이라도 깊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것이 잘못된 이미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 속에서의 문종은 매우 강건하고 잘생긴 외모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세조의 미화와 동시에 우리 문화에 자리 잡고 있던 장남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가 시간이 흐르며 옅어지게 되고 왕위 계승에서의 정통성과 적장자가 주는 위치가 얼마나 강하고 중요한 부분인가를 놓치게 되면서 문약한 문종이라는 이미지가 완성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이 단종과 세조 이야기를 하면서, 세종이 왜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느냐,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문종은 매우 병약하고 유약한 임금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남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문종이 이렇게 유약했던 임금일까요. 사실부터 말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종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매우 강력한 왕권을 가졌던 임금입니다. 문종은 조선 역사상 최초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임금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상징성은 매우 큽니다. 문종의 할아버지 태종이 무인정사를 일으켜 왕위에 오르면서 내세웠던 명분이 막내인 방석을 부당하게 세자로 세웠다는 부분입니다. 당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이후 태조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던 큰아들 진안대군 방우가 은거하자 당시 조정은 둘째인 영안군 방과와 건국에 공이 많은 다섯째 정안군 방원을 두고 적합한 후계자를 가리는 논의가 진행됩니다. 이러던 중 갑작스레 막내 방석이 세자로 지명되고 책봉되면서 발생했던 문제가 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무인정사입니다. 이 과정을 직접 지휘하며 형제들을 베었던 태종에게 있어서 그의 후계가 적법한 형태의 적장자 승계로 왕위를 물려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건국 초창기에는 택현(擇賢), 즉 현명한 군주를 택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집권했던 태종에게 있어서 왕가의 적법한 적장자 승계는 평생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태종이 왜 형이었던 정종의 후계로 거론되면서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 즉 왕의 동생이 아닌 왕의 아들로 즉위했는지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버지 태종 이성계의 개입을 막기 위한 정치적 노림수도 있었을 것이고, 적장자 없이 서자만 존재했던 정종의 가계로 인해, 더 이상의 승계논란을 없애기 위한 노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임금의 동생이 아닌, 임금의 아들로 즉위하여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던 태종의 노림수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종 사후, 그의 아들 자격으로 상주를 맡기도 했습니다.   

   

 태종과 정비인 원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던 여러 아들들이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습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얻은 금지옥엽이 양녕대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장자 승계에 대한 고집도 있었겠지만 어렵게 얻은 아들이기에 미련스럽게도 맏아들이던 양녕대군을 포기하지 못했을 겁니다. 실제로 태종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아들 바보스러운 모습이 수도 없이 보입니다. 다만, 한번 결정을 내리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태종은 오랜 고민 끝에 양녕대군을 폐세자 하고 셋째인 충녕대군을 세자에 책봉한 뒤 두 달 만에 양위해 버립니다. 다시 한번 택현이 이루어진 것이죠. 문종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적장자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습니다. 정상적인 과정으로 세자 책봉을 받고, 오랜 기간 동안 국본의 위치를 지키며 정상적인 승계를 이룬 최초의 적장자 승계라는 부분은 막강한 정통성을 가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종조 후기의 8년은 문종의 통치기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1442년부터 정식으로 정사에 참여하고 1445년부터는 대리청정을 통해 직접 조선을 통치합니다. 또한 세종 역시도 각종 조정 관리의 임명권을 차례로 문종에게 넘깁니다. 1446년 5품 이하 관리 임명권, 1447년 정 3품 이하, 그러니까 당상권을 제외한 당하관 임명권을 위임받았고, 1449년에는 당상관 이상 고위 관료의 임명 권한까지 넘기려던 것을 의정부가 반대하여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하들은 각종 상소문에서 문종에게 올리는 상소문에 신(臣)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문종의 권위가 그만큼 막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세자가 최초의 적장자 세자이고, 아버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오래도록 군왕 교육을 받았습니다. 세자로 있던 시기만 29년이며, 이 기록은 이후 숙종의 세자로 즉위한 경종의 30년 기록 전까지 가장 오래 세자에 있던 이가 문종입니다. 왕세제로 임명되어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조차도 이복형인 경종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떨었고, 경종의 죽음에 연루된 것이 아니냐는 비난 어린 시선을 평생을 안고 살았는데 세제는커녕 왕위계승권 순위에서 이미 멀어진 세조 따위가 문종에게 비빌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또한 문종은 선왕이던 세종의 치세 말기를 대리청정을 맡으며 성공적으로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절대 동생인 수양대군 따위에게 눈치를 본다거나 그를 두려워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문종실록이 화재로 인해 소실되면서 기록자체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면도 있지만, 세조에 대한 견제를 했다는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문종은 세조를 애당초 경쟁자 자체로 인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버지 세종의 적장자로 후계를 이었으며, 문종 또한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본 후사이긴 하지만, 역대 최강의 혈통과 정통성을 자랑하는 단종이 있어 후사 또한 안정적이었으니 감히 세조 따위가 어찌해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을 겁니다.      

 그만큼 왕정에서 정통성과 확고한 명분에서 오는 권위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산군과 숙종 편에서도 다루겠지만, 그들이 막강한 왕권을 구사하고 신하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 두 사람이 적장자 출신의 정통성 높은 임금이라는 것에서 옵니다. 보통 중국에서 황제를 천자(天子)라고 하는 것은 그의 혈통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하늘의 위임을 받은 선택받은 통치자가 나라를 다스린다,라는 전통적 명분론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역대 중국 왕조의 건국 시조들이 왜 기존 왕조의 선양을 받아 즉위하고 나라를 세웠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임 왕조의 황제 역시 하늘의 아들인 천자이기 때문에, 기존의 구질서의 천자로부터 새로운 새 질서의 천자에게로의 선양은 그만큼 중요한 정치적, 건국에 대한 명분을 주는 것입니다. 원명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 시절은 몽고족에서 한족으로, 한족에서 만주족으로의 지배층의 종족이 바뀐 까닭에 선양이 없었던 것뿐이지요. 삼국지연의로 유명한 위진남북조 시대에서 한의 헌제가 위문제 조비에게 강제에 의한 것이지만, 최초로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이 가지는 의의는 매우 큽니다.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겠지만, 이런 정통성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국사 열전에서도 유비의 계한(촉한)이 아닌 조조와 조비의 위를 정통으로 보는 것도 바로 이 선양을 통해 생성된 왕조라는 것에 있습니다. 또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으로 권력을 잡고, 이어서 사마염에 의해 창업되고 삼국을 통일한 진이 쉽게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마소의 수하였던 장수 성제가 당시 위의 황제였던 조모를 시해했던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전왕조의 황제를 죽였기에 선양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고, 그로 인해 오는 낮은 정통성은 진무제가 통일군주라는 위업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물론, 사마염의 성격자체가 매우 물렀다는 부분들과 다른 요인들 역시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로 인해 조정의 사치와 부패가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물론 진의 멸망을 이런 명분론 때문만은 아닙니다만,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서도 후삼국시대에서 고려가 새로운 통일 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 역시도 이런 전통적 명분론에 입각합니다. 고려의 왕건이 계림을 약탈하고 신라왕을 죽인 후백제의 견훤을 이기고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기존의 통치자였던 신라의 경순왕의 귀순으로 민심이 완전히 고려에게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시종일관 신라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했던 후백제에 비해, 신라에게 온건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고려에게 경순왕이 귀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통일 후 수백 년을 이어져왔던 통일신라라는 국가가 주는 정통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발해의 왕족들이 고려로 귀부 한 것 역시 고려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줍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국을 자처했기에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의 왕족과 그 백성을 받아들인 것 역시 고려 태조 왕건에게 매우 좋은 명분을 제공해 줍니다. 통일 이후 미약하나마 같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민족이다라는 민족의식이 싹텄으며,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왕족이 고려로 귀순한 것 역시 삼국통일을 이루는 중요한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조선 역시도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에게 선양을 받은 것 역시도 정치적 명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무튼, 본인 역시 선왕의 적장자이며, 본인의 뒤를 이을 후사가 적통 중의 적통, 최강의 정통성을 가진 단종이라는 것은 문종의 권위와 왕권을 공고히 하게 됩니다. 할아버지 태종 시절 외척과 공신들 세력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태종의 적장자는 아니지만, 정실 왕비의 소생으로 택군에 의해 즉위한 세종과 세종의 적장자인 문종의 즉위, 그리고 문종의 뒤를 이을 단종의 존재는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명분이 그만큼 확고하고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은 세종이 자신 있게 아버지 태종의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돌린 것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권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 권한을 신하들에게 일부 나누어준다 하더라도 왕권이 흔들릴 일이 없다는 것을 세종은 알고 있었던 것이죠. 문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종 치세 후반은 사실상 대부분의 인사권을 쥔 문종의 대리청정 시기였고,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 선왕 시절에 대리청정을 진행하고 왕위에 오른 임금은 문종과 숙종의 아들이던 경종과 영조의 치세 말기에 대리청정을 맡았던 정조뿐입니다. 경종은 아버지 숙종이 세자를 교체하기 위해 대리청정을 지시했다는 의혹이 있고, 정조 역시도 영조의 대리청정을 진행할 때 격렬한 저항을 받습니다. 그러나 문종은 사실상 이 대리청정기에 당상관 이상 고위 관리의 임명 권한을 제외한 모든 임금의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세종이 승하한 이후에도 임금의 죽음으로 인해 올 수 있는 국정의 혼란과 마비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흔히 육조직계제를 강한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는 국사교과서의 사실 위주의 편찬에서 나오는 오류입니다. 세종이 육조직계제를 철폐하고 다시 의정부서사제로 돌아갔던 것은 세종의 왕권이 그만큼 공고했던 것입니다. 문종 역시도 의정부서사제를 고수했던 이유는 의정부서사제를 진행해 봐야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만한 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조가 육조직계제를 실시했던 이유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의정부서사제로 정사를 볼 경우 자신 역시도 쿠데타로 정권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3. 계유정난과 정통성 없는 임금의 한계     


 지속적으로 문종과 단종의 즉위가 조선 왕실에서 그토록 바라던 적장자 승계원칙을 보여준 정통성 있는 왕위 세습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조의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이 얼마나 명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매체에서는 이 세조의 찬탈을 국가를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형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사 교과서 역시 세조가 조선의 몇 안 되는 왕권을 가진 임금이라는 식의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몇몇의 자질 없는 역사 유튜버들에 의해 세조가 미화가 되고 있죠. 최근 들어서는 영화 ‘관상’이나 ‘공주의 남자’ 등에서 세조의 이런 잔혹하고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가 있습니다. 영화 관상에서 극 중 수양대군이던 이정재가 “어린 주상을 끼고 늙은 대신들이 조정을 농단하고 있다”라는 대사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세조가 등장하는 모든 드라마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대사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계유정난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왕권을 위협하는 신권이라는 이 명분이 먹혀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종의 비인 소현왕후,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왕실의 최고어른이던 양녕대군이 계유정난을 적극 비호하자 수많은 종친들이 이런 세조를 지지하고 나섭니다. 실제로 세조의 세력은 안평대군이나 금성대군에 비해 가장 약했으며, 정난에 깡패들을 동원해서 테러하는 극단적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정통성 없는 집단이 권력을 차지하는 최악의 사례로 봐도 무방합니다. 현대의 한국에서 벌어진 12.12사태가 이에 비견될만하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조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각종 업적과 정치를 잘했던 임금으로 남아있습니다. 여러 유튜브에서도 이와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사실 세조가 나름 굵직한 치세의 업적을 남긴 것은 맞습니다. 교과서에서 서술하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왕권을 강화했고, 악법을 폐지하였으며, 경국대전 편찬을 명했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진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여색을 탐하지 않고 검소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가작통에 기반한 한국사 최초의 인구 조사를 진행하였을 뿐 아니라 종묘제례악의 개념을 완성하였으며, 금속활자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시행했습니다. 또한 한글과 서적 보급을 활성화하였는데, 이는 명실상부한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조의 대한 평가를 단순 이런 치적놀이로 재단하기에는 그의 불법 권력 찬탈이 조선사 전반에 미친 악영향이 너무나도 막대합니다. 세조 이후에 조선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 대부분의 씨앗은 세조 때 뿌려졌습니다. 세조의 계유정난으로 인해 생긴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새롭게 등장한 공신 세력입니다. 공을 세웠으니 공신에 봉하고 포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만, 이것을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절대 아닙니다. 우선 첫 번째로 건국공신과 함께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 공을 세운 공신들 이후 50년 만에 새롭게 생긴 공신이라는 점입니다. 외적을 방비하거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임명된 공신이 아니라 권력 찬탈 과정에서 생긴 공신이다 보니 이들의 입김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아버지 태종처럼 세조에게는 이를 적절히 제어하고 통제하며, 공신 세력을 정리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조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포용성이 높은 모습으로도 평가할 수 있겠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이런 공신 세력이 남아있는 것은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세조는 단종에게 양위를 받고 난 직후에 사육신의 난을 겪습니다. 집현전 학자들로 구성된 이들 세력은 세조가 추후에 국정을 운영하고 공신을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한 좋은 정치적 동반자이자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조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에게 세조는 명백한 찬탈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비록 사육신과 세조의 정치적 방향성과 복권 및 다양한 논란이 있을 수 있었으나 세조에게 있어서 단종복위사건으로 사라진 이들 세력은 세조가 가질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의 수를 줄이게 됩니다. 그만큼 사육신 사건이 세조에게 준 정신적, 정치적 타격은 컸습니다. 세조의 정치적 동반자로 성장해 공신세력을 견제할 수 있던 유일한 정치적 세력이 한 방에 무너져 버린 것이죠. 사육신 사건 이후 세조는 공신들과의 결속을 더욱 강화합니다. 유일하게 공신들을 견제할 세력이던 그들이 조정에서 몰살당한 이상 세조에게 비빌 언덕은 공신 세력뿐이니까요. 그렇게 세조는 공신세력과의 결탁으로 허상에 가까운 왕권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왕권을 바탕으로 각종 중앙집권정책을 펼칩니다. 추후 다시 설명하겠지만 세조가 강한 왕권을 누릴 수 있던 이유는 공신세력 역시도 세조의 몰락은 곧 공신세력의 몰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조는 친형제들마저도 죽여가며 혹시라도 있을 역 쿠데타를 미연에 방지합니다.  

    

 그러나 이런 도중 이시애의 난이 발생합니다.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북도 출신 함경도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을 대처하는 등의 과정에서 쌓인 불만이 폭발하여 터진 사건이죠. 사육신 사건 이후 세조는 정난공신등의 측근을 제외하고는 잘 믿지 않았는데요, 거기에 계유정난 직후 터졌던 이징옥의 난의 영향도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시애의 난이라는 그 사건 자체는 주목할 부분은 따로 없지만, 이후의 상황에는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시애의 난을 진압했던 구성군 이준과 남이, 유자광 등의 새로운 신공신 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기존의 정난공신인 구공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말이죠. 필자는 세조가 진정으로 구공신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들을 의도적으로 키웠는지에 대해서도 매우 회의적입니다. 세조가 진정으로 구공신을 견제할 목적이었다면, 왜 하필 왕족이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본인부터가 어린 조카를 밀어내고 재위를 찬탈하였는데,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능력 있는 종친에게 힘을 실어준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조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신공신세력을 형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가 사망함으로써 이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부터가 신공신세력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이의 옥사 사건으로 인해 신공신세력은 괴멸당하고 맙니다. 예종이 구공신세력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그들을 견제할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아버지 세조처럼 왕권에 직접적인 도전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구공신세력과 잘 지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명회와의 대립각을 세웠고, 그가 단명 후에 왕위계승권이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대군이 아닌 자을산군을 대왕대비가 지명하는 형태로 즉위하다 보니 예종 독살설이 나오고 있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보이는 부분에서는 강한 왕권을 휘둘렀던 세조와 그의 아들 예종이 죽고 왕위는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즉 성종에게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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