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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소현세자와 사도세자

by 철가면 Jan 18. 2025

 1. 들어가며     


 조선의 왕세자들 중에서 적장자 출신의 왕위 계승 사례는 많지 않습니다. 어떤 변란이나 폐세자, 혹은 병사로 인해 죽고 세손이나 대비의 지명을 받아 즉위한 임금들을 제외하고 적장자 출신의 세자와 정상적 승계를 살펴보자면 조선 최초의 적장자 승계가 이루어진 문종과, 원손-세손-세자의 정통성 끝판왕인 단종과 성종의 장남으로 즉위한 연산군과 중종의 장남으로 즉위한 인종, 효종의 장남인 현종과 현종의 장남인 숙종, 숙종의 장남인 경종으로 이어집니다.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의 적장자로 즉위한 순종 등, 조선 임금 27명 중 고작 8명뿐입니다. 태종은 정통성과 명분을 위해 형인 정종의 아들 자격으로 왕세자에 임명되어 즉위했으나 그는 무인정사를 통해 집권한 임금입니다. 세조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예종, 중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명종, 인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에 임명되어 즉위한 효종이 그나마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 출신의 임금들입니다. 명종의 적통이 없어 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선조와 선조의 차남에 서자로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임진왜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의해 왕세자에 임명하고 즉위한 광해군,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하였으나 중종과는 달리 선조의 서자의 셋째 아들에 불과했던 인조, 숙종의 아들이었으나 천한 신분의 무수리에 아들이었던 영조, 사도세자와 세자빈이던 혜경궁 홍 씨의 적통 출신이었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한 정조, 효명세자의 아들로, 순조의 손자로 실로 오랜만에 정통성 만랩으로 즉위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세자시절을 건너뛰고 즉위한 헌종, 왕실의 씨가 말라 즉위한 철종과 고종 등 변란이나 정변, 세손의 신분으로 세자를 건너뛰고 즉위하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으로 즉위하였으나 정변으로 쫓겨난 단종과 연산군, 그리고 짧은 재위기간으로 인해 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문종과 예종, 인종을 제외하게 된다면 현종-숙종-경종으로 이어지는 삼대만이 제대로 된 적통승계와 안정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다만, 경종은 어머니 희빈 장 씨가 중전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나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했으며, 이후부터는 후궁 출신의 아들들 모두 경종의 전례에 따라 왕비의 양자로 입적되는 형태가 있어 형인 경종의 죽음으로 정통성 논란에 시달렸던 영조 이후부터는 정통성 시비는 없는 편이기는 했습니다. 그만큼 왕실의 손이 귀해진 이유도 있었습니다.     


 왕세자는 차기 임금입니다. 차기 최고 권력자이기에 왕세자의 거처를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의미로 태양이 뜨는 동쪽이라는 의미의 동궁(東宮)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차기 권력자이기 때문에 왕세자들은 그 몸가짐을 매우 올바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특히나 차기 임금의 즉위는 양위를 통한 즉위를 제외하고는 임금의 죽음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왕세자들은 더욱더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혹시라도 임금이 양위를 한다고 한다면, 왕세자는 아무런 죄도 없이 나와 석고대죄해야만 했습니다. 권력의 승계가 임금의 죽음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조선 왕세자 수난시대  

   

 그런 의미에서 살펴보았을 때, 조선의 왕세자들은 대부분 매우 불행했습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살인적인 교육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으며, 부왕의 기대에 충족해야만 했습니다. 조선사를 통틀어 폐세자 된 이는 총 세 명입니다. 연산군의 아들이던 폐세자 이고, 광해군의 아들인 폐세자 이지, 그리고 양녕대군 이제가 그들입니다. 정변에 의해 폐위되었기에 자연히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아들들은 그렇다 치고 양녕대군 이제는 조선역사에 다시없을 망나니 왕세자였습니다. 각종 매체에서 양녕대군 이제가 충녕대군 이도의 왕재를 알고 물러났다, 아버지 태종을 보며 형제들 간의 피를 뿌리고 싶지 않다 등으로 묘사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이것도 대표적으로 잘못된 프레임 중 하나죠. 양녕대군 이제의 행동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금수저의 망나니짓 이상으로 보기 힘듭니다. 그는 훗날 조카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르려고 할 때 왕실의 큰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이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죠. 왕권에 방해가 된다면 양녕대군을 죽여도 좋다는 말을 듣고서도 끝까지 큰 형을 비호했던 세종이 지하에서 통곡할 만한 일입니다. 

     

 세조의 맏아들이던 의경세자는 요절합니다. 항간에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의 세자빈이었으며 세조의 형수이기도 했던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요설도 돌았지만, 이는 야사에 불과합니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죠. 이후 성종의 맏아들인 연산군이 즉위하지만, 연산군 역시 폐위됩니다. 중종의 맏아들 인종이 즉위하였으나 계모인 문정왕후의 시달림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숱한 괴롭힘을 받았다고들 하죠. 명종의 아들이던 순회세자 역시 요절합니다. 덕분에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선조가 즉위할 수 있었죠. 오늘의 주인공이자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의 맏아들이던 소현세자 역시 요절합니다. 독살설과 함께 말이죠.

      

 숙종의 장남인 경종 역시도 아버지 숙종에게 숱하게 시달리고, 즉위 후에도 노론에게 숱한 괴롭힘을 넘어 생식 능력이 없다는 극언까지 듣는 등의 수난 속에 4년 만에 세상을 뜹니다. 이후 영조시기에 들어서부터는 조선은 손이 매우 귀해집니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얻었으나 요절했고, 나이 40이 넘어 얻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입니다.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이 뒤편에 좀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죽 위하였으나 정조 역시도 아들을 몇 보지 못했으며 문효세자는 그나마도 요절합니다. 다행히 순조가 즉위하였으나 순조 역시도 아들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중에 죽게 되었으며, 손자인 헌종 역시도 젊은 나이에 요절합니다.

      

 왕세자들 중에서 가장 혹독하고 험난한 시기를 보냈던 세자를 한 명 꼽자면 누가 뭐라 해도 광해군일 겁니다. 최초의 방계 승통으로 왕위에 오른 선조의 방계 콤플렉스를 앓았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방계 승통이기 이전에 명종이 후사가 없는 경우 가장 높은 왕위 계승권자는 본인이었던 데다가 적합한 절차로 즉위한 선조가 방계 콤플렉스를 앓았을 가능성은 없지만, 본인의 후사는 적통으로 삼고 싶어 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따라서 광해군 건저의 건의가 있을 때 정철을 포함한 서인이 박살이 났던 것이고 가장 명망 있던 광해군은 세조가 되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치 부도가 난 회사를 떠넘기듯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하고 본인은 요동으로 도망가고자 했으며,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자신이 저질러놓은 짓은 생각도 안 하고 양위 파동이나 각종 생떼를 부리며 왕권을 회수하려고 하죠. 거기에 명나라 황실의 후계문제가 당시 선조 시기의 문제와 비슷했던 이유로 그저 의례에 불과했던 책봉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는 광해군이 아닌 다른 세자였다면 심각한 정통성의 문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끌었던 까닭에 모든 신하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숱한 견제와 영창대군의 존재, 거기에 친형이면서도 광해군에게 끊임없는 피해를 주던 임해군의 존재 등으로 광해군은 흑화 해버리죠. 이 내용은 광해군과 인조에서 다루었으니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조선의 왕세자는 차기 권력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임금의 가장 큰 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차기 임금을 두고 줄을 대려는 이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며, 이들로 인해 임금은 아들이 정적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례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난 두 세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입니다.

      

 3. 사도세자와 노론 음모론   

 

 차기 최고 권력자인 세자이기에 그 교육과 훈육, 예절 등이 매우 엄격했습니다. 특히나 사도세자는 다른 어느 세자보다도 더 엄격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나이가 40이 넘어서 얻은 귀한 자식입니다. 영조가 재위 52년을 하고, 나이로도 80세가 넘는 장수를 했습니다만, 당시의 기준으로 40이 넘은 나이는 매우 높은 연령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조는 사도세자의 교육에 더욱 집착합니다. 거기에 효장세자가 일찍 요절하고 연이어 옹주만 탄생했던 까닭에 사도세자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과도한 관심과 교육의 성과를 요구받으며 성장합니다.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당시 왕비인 정성왕후 서 씨의 양자로 받아들여 원자에 책봉하고, 이듬해에 곧바로 세자에 책봉합니다. 이는 매우 파격적인 행위로 아무리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손이 귀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버지 숙종이 형인 경종을 태어나자마자 원자로 봉하고 3세에 왕세자에 책봉했던 것보다 더 빠른 처사입니다. 조선 최고의 정통성을 지닌 영조의 아버지인 숙종조차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후에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조선을 넘어 전 세계 정통성 끝판왕인 단종조차 태어나고 7년이 지난 후에야 왕세손에 책봉되었습니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왕자에게 왕세자를 책봉함에 있어 신하들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지 않고 모두 찬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사도세자의 탄생 자체가 조선왕가와 조정에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사도세자의 유년기는 금지옥엽이란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축복과 보살핌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런 세자는 성장하면서 점차 이상행위를 보입니다. 이상행위를 넘어 정신병적인 기질까지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세자의 이런 정신병을 앓은 듯한 모습을 보였냐는 사실보다는 그 뒤에 벌어진 몇몇 왜곡적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 보다 옳은 일일 것입니다. 특히나 2000년대에 이덕일 소장의 저서 사도세자의 고백은 대중에게 매우 큰 파장을 일으킵니다. 이덕일 소장은 재야사학계의 선두주자를 자처하며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가 역사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부분만큼은 인정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덕일 소장이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들도 바로 이 역사 대중화에 있습니다. 이덕일 소장은 풍부한 사료를 소개하며 책을 쓰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매우 이상합니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1차 사료인 실록이나 각종 사서들에 대한 접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실 검증과 실록을 검증하는데 매우 중요한 교차 검증을 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억울한 희생양이다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화변을 노론에 의해 조작되고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흔히 노론카르텔이라 불리는 이 친일노론사관은 대한민국 대중적 역사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왜곡을 가합니다. 그 여파로 여러 영화나 드라마에서 노론 세력이 사도세자와 정조를 죽이기 위해 애쓰고, 그뿐만 아니라 정순왕후가 노론의 수장이며, 정조의 죽음 이후 정조가 노력했던 모든 개혁을 물거품을 만들었다는 등의 왜곡이 들어간 드라마들이 쏟아집니다. 거기에 2008년 방영된 드라마 이산은 정순왕후를 노론의 거두로 만들며 노론 음모론의 끝판왕을 달립니다. 임오화변당시 불과 15~16세에 불과했던 정순왕후가 노론의 우두머리로 등장하며 모든 정치적 술수를 부리며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를 핍박하는 것으로 표현되죠. 그뿐만이 아닙니다. 드라마 비밀의 문은 이 노론음모론의 절정을 찍습니다. 사도세자는 아주 정상적이었으며, 김창완 씨가 열연한 노론의 거두가 한석규 배우가 열연한 영조에게 하대하며 임금을 모욕하는 장면까지 촬영하여 방영합니다. 두 배우의 열연과는 별개로 당시의 그 장면을 보며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산의 작가는 그의 후속작품인 화정에서도 인조를 천하의 둘도 없는 망나니로 그렸으며, 광해군을 불운의 임금으로 그리며 편향된 역사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두 드라마 모두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좋은 시청률을 보여주었으나 편향된 역사적 시선을 보여줍니다. 이런 왜곡되고 편향된 시선은 대중들에게 노론과 서인, 더 나아가 사림 전체를 꼰대화 시키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사로잡혀 조선을 망쳤을 것이란 왜곡된 인식을 심어줍니다. 이보다 더 나아가 조선은 존재하면 안 되는 나라였다며 자조하는 이들도 등장합니다. 이런 사상들이 당파성론, 정체성론,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굵직한 식민사관과 연결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니면 인지하고도 애써 외면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각각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송강호, 유아인 주연의 영화 사도에서 사실과 유사한 내용으로 영화가 소개되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사도세자가 정신병에 걸렸었어?‘와 같은 의외다,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노론은 단 한 번도 임금을 무시한 채 국정을 농단한 적이 없습니다. 숙종의 환국정치 이후, 모든 조정의 대소사는 임금이 주도했습니다. 허약한 임금이고 대중적 인지도가 적은 경종조차도 단 한 번의 신임사화로 노론을 조정에서 모두 내쫓았으며 영조의 왕세제 폐위를 주장하던 소론들조차 경종의 일갈에 벌벌 떨며 경종에게 죄를 빌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세도정치 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도정치의 희생양처럼 그려지는 순조조차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킵니다. 영화 명당에서 안동 김 씨에게 무릎 꿇고 굴복하는 것처럼 그려지는 헌종조차도 그가 친정을 시작하고 안동 김 씨를 견제하자 안동 김 씨는 변변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풍양 조 씨에게 주도권을 뺏기며 무력화됩니다. 특정 가문인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에 의한 전횡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임금이 조정의 조율이라는 책무를 거의 포기했을 때 나오는 현상이고, 숙종의 환국정치 이후 조선왕실이 가지는 정치체계의 한계일 뿐이지, 노론이라는 붕당 자체가 임금의 권위를 무시하고 나라를 들어먹었던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각종 커뮤니티나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노론은 천하의 매국노들입니다. 

     

 필자가 이 부분에서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소수의 분탕종자들로 다수의 일반 대중들이 선동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가 사도세자와 노론음모론입니다. 대중들은 역사, 더 좁은 범위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와 사상, 사회의 모습을 깊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몇몇 키워드와 자극적인 사건으로 왜곡된 선동에 의해 그 주관이 충분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조금 잠잠해졌지만, 환단고기 열풍이 크게 일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합니다. 사실 환단고기는 주류 학계에서는 이미 90년대에 논파가 끝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대중화되지 못했을뿐더러 당시 인터넷의 발달 미비로 소수만이 이를 알고 있었고, 이틈을 이용한 유사역사 추종자들이 인터넷의 발달을 노려 퍼트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 임오화변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폐세자 되지는 않았으나 끝내 추존되지 못합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정조에게는 백부이며 사도세자에게는 형이기도 했던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어 즉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끝내 추존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를 추존하는 순간, 정조의 즉위 정당성과 명분을 잃게 됨과 동시에 선왕이며 할아버지였던 영조의 정통성과 치적에도 금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정조는 즉위식에서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러나 자신은 효장세자의 법적 아들로 즉위했음을 천명하며 이를 그대로 지킬 것이다는 선언으로 그의 정적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의 대한 복수는 없을 테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죠. 그러나 이를 이덕일은 뒤의 맥락은 무시한 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 것으로 표현하여 노론들에게 공포를 준 것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정조 사후 벌어진 노론이 나라를 망쳤다는 그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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