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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 광해군 재평가에 대한 비판적 Review(1)

by 철가면

1. 들어가며


최근 여러 이슈들로 인하여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글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와 대대적 수정, 보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글을 집필하면서 필자의 부족함이 여실히 느껴졌고,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개인적 감정에 의거한 문장과 해석들이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작업을 진행하다보니 글과 리뷰를 거의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오늘 우연한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황현필 강사의 황현필 재평가 - 광해, 폭군인가 개혁군주인가에 대한 영상입니다. 아래 링크를 달아놓았으니 관심있으시면 보시기 바라지만, 감상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bcfCfBd6AU)


그것은 바로 감정적 평가입니다. 황현필 강사는 (이하 황현필) 영상에서 과도할 정도로 색안경을 끼고 광해군을 평가합니다. 그가 영상에서 직접 언급한 표현을 빌려 인용하자면, 필자의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을 수 밖에 없는 해석입니다. 솔직하게 어디서부터 바로잡고 비판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중구난방의 해석을 가져다 붙입니다.


또한 사실관계를 교묘하게 뒤바꾸어 대중을 호도하고, 선동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영상 순서대로 하나씩 바로잡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2. 만선사관의 뒤틀린 해석


황현필은 인조반정을 이야기하면서, "진짜 조선을 맛탱이 가버리게 한 사건이죠" (영상 5분22초)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광해군을 재평가한 이나바 이와키치의 만선사관을 이야기합니다. 황현필은 여기서 이나바의 광해군 재평가를 조선을 깔아뭉개려는 취지에서 광해군을 재평가했다고 합니다. (영상 6분17초) 그리고 이는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음 황현필의 이야기는 확증편향적 해석을 합니다. 이병도를 식민사학의 거두라(영상 6분20초)로 이야기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할말은 많습니다만, 우선 넘어가죠.


그러면서 황현필은 광해군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모두 극복하려는 임금이라 평가합니다. (영상 6분47초) 그러면서 선조와 인조를 고종과 더불어 암군이라 이야기하며(영상 7분9초) 광해군이 그 사이에 낀 임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까요. 학계의 대표적인 정설과 주류 의견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오항녕 교수는 그의 여러 저서들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나바 이와키치의 광해군 재평가는 아무리 둘러봐도 성공이라 할 수 없는 그의 내치를 그나마 조금은 성과가 있던 중립외교의 외치와 분리하여 비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황현필은 이 만선사관을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됩니다. 필자는 만선사관의 핵심은 우리의 역사가 자율적으로 역사적 흐름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고 평가합니다. 이른바 타율성론, 즉 반도사관과 강하게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만주와 자주적이고 독립적 외교전략을 폈던 광해군을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되고, 이후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의 처절한 실패, 그리고 그로인해 조선의 역사는 철저히 청에게 종속되고, 타율적으로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황현필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항변하겠지만, 그의 옛 강의를 살펴보면, 그는 이 만선사관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곳에 등장합니다. 인조의 친명배금 정책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비난을 가할뿐 아니라, 이후 현종시기의 예송논쟁을 쓸데없는 백성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미친논쟁이라 치부해버리죠. (조선사 풀버전(17시간) - 고려말부터 철종까지 영상 12:05:15분)


예송논쟁은 상복을 별도로 입지 않는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효종의 법정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년을 입느냐로 싸웠던 쓸모없는 논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정말로 황현필의 말대로 민생을 벗어던진 그들만의 리그이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논쟁이냐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국사 교과서에서조차 예송은 상복을 몇년을 입느냐에 따라 논쟁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예송논쟁은 단순하게 상복을 입는 기간에 따라 나누는 오복(五服)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송은 왕가의 정통성에 대한 논의이며, 각 붕당별로 어떤 사상과 국정을 주도하는 주체가 임금이냐 신하냐를 놓고 싸웠던 평화로운 논쟁입니다. 이런걸 제대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싶어하는 시도조차 없으니 이것을 쓸데없는 논쟁이라 치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황현필의 논리가 바로 만선사관, 그리고 타율성론이라는 식민사관에 함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영상 4분 48초부터 이에 대해 언급합니다.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그 뒤에 나오는 임금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입니다. 네, 맞는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조선사가 엄청난 변화가 있었을까, 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필자의 편견의 역사 - 광해군과 인조편(https://brunch.co.kr/@6dc796cb17164ec/4) 언급하였듯이, 당시 명-후금-조선간의 동아시아는 일대 세력의 격변기에 있었습니다. 마치 10세기-11세기의 송-요(거란)-고려와 똑같은 구도로 말입니다. 뒤에서도 언급하겠지만, 관심 있으신분들은 위의 링크를 통해 해당 글을 확인하시면 좋겠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는 광해군을 폭군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진정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가 주장하고 이야기하는바가 진정한 식민사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광해군의 치적?


황현필은 단순 치적만을 놓고 설명했을 때,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뛰어난 치적을 가진 5군 주 중, 세종을 제외한, 영조, 정조, 세조, 태종에 비견될 만큼의 치적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영상 8분45초) 그러면서 광해군 최대의 치적을 전후복구 사업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인용한 내용이 바로 우리 역사넷의 자료입니다.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ta/view.do?levelId=ta_m71_0060_0030_0020_0020)


우선 필자는 필자의 글 편견의 역사 - 명분과 정통성에서 국사 교과서의 사실 위주의 서술 방식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최대의 수혜자를 세조와 광해군으로 꼽았습니다. 해당 링크를 걸어두었으니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편견의 역사 - 명분과 정통성 https://brunch.co.kr/@6dc796cb17164ec/3)


우리 역사넷에 기록된 중학교 7차 교육과정의 광해군 관련 내용이 바로 이런 사실적 역사 기술에 입각해서 벌어지는 최대의 실책이며 개정되고 비판받아야 하는 부분입니다. 황현필 본인이 가져온 자료에서부터가 심각한 몇몇 오류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전후복구 관련된 부분입니다. 사실, 전후복구는 선조가 임금이던 시기부터 대부분 진행되던 것이었습니다. 영상 후반부에서 나오기에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황현필은 선조가 창덕궁 재건을 명하고, 그것이 광해군대에 이르러서 완공이 된 것 뿐이라며 광해군을 비호합니다. 그런데 이 자체가 크나큰 오류입니다. 선조는 그가 죽기 3년전,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지 7년이 지난 1605년에야 재건을 명하게 된 것입니다.


창덕궁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자면, 창덕궁은 인조반정 시기에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는데, 이 창덕궁은 인조 말년에 재건되었고, 7개월만에 마무리 되었는데, 그 이유가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건물을 복구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영조 49년인 1773년에 기록된 어제금조흥감서시충자(御製今朝興感書示冲子)에 해당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정말 황현필의 말대로 이것이 선조시기에 이루어져서 광해군에 완공되어 광해군의 궁궐병이 말도 안된다는 논리로 사용된다면, 그가 광해군의 치적이라고 이야기한 대부분은 선조의 공이 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영상에서 띄워져있던 내용 중 동의보감은 광해군 시기에 편찬이 완료되었을 뿐이지 집필을 명한 이는 선조였으며, 이를 적극 지원한 이도 선조였습니다. 거기에 선조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백성을 살핀다는 이유로 아직 전쟁이 채 마감되기 전인 1596년에 동의보감 편찬을 명합니다.


황현필은 선조가 전쟁이 끝난 10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일갈합니다. (영상 9분13초) 필자는 그가 정말로 사료의 원문은 볼 수 있는지, 아니 최소한 사료를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고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역TV에서 그를 비판할 때 황현필이 나무위키를 베껴서 그대로 가져와 오역을 하는 부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필자 역시도 역TV에 그가 나무위키를 어떤식으로 활용하고 베끼는지에 대한 제보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요. 선조의 전후복구는 그가 그렇게 사랑해마지 않는 나무위키에서조차 명명백백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현필은 그의 영상 9분21초에서부터 선조가 하지 않았던 양전사업을 광해군이 실시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베끼기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군요. 최소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양전사업을 검색만 해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대동법의 기초가 되는 대공수미법은 이미 선조시기, 전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시행됩니다. 공납의 폐단에 대한 논의는 이미 그전부터 숱하게 있었습니다. 공안개정이라 하여 조광조 시기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고 그것의 기본이 되는 대공수미법은 선조시기에 이미 일부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광해군 시기에 공표되는 것입니다.


아래는 대공수미법에 관련된 기록입니다.


○命詳定貢案。 亂後貢法尤壞, 命減省舊案, 一從土産增損, 而未盡釐正而止, 貢物作米之議始此 (공안(貢案)을 상정(詳定)하도록 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로 공법(貢法)이 더욱 무너졌으므로 구안(舊案)을 감하여 한결같이 토산(土産)의 증감(增減)에 따르도록 명하였는데, 완전히 바로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만 두었다. 공물(貢物)을 쌀로 바치게 하자는 의논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선조수정실록 28권, 선조 27년 1월 1일 경진 2번째 기사.


이외에도 선조수정실록 28권, 선조 27년 4월, 유성룡의 상소문이 있고(https://sillok.history.go.kr/id/knb_12704001_006), 비변사에서 군량미 조달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자 임금이 따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709020_006).


이 기록들은 대공수미법의 시행방안들에 대한 논의였으며, 일부 시행된 부분들입니다.

또한 국사교과서의 사실 위주의 편찬의 최대 수혜자인 광해군은 대동법, 즉 기존의 경기선혜법의 확대를 명백하게 반대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 기록을 보시죠. 광해군일기 정초본 80권, 광해 6년 7월 3일 계축 9번째 기사입니다.


○司憲府請以宣惠法, 行于八路, 戶曹啓曰: "群議咸以爲: ‘防納不得禁, 則國用不可繼, 民生不得安, 將何以爲國。’ 如此云云, 今已久矣, 變而通之, 豈非今日之急務乎? 試以畿甸言之, 民不勝徭役之煩重, 流散相繼, 號怨未已。 自聖明嗣服之初, 下詢相臣, 創置宣惠廳, 一年只收米十六斗。 其初蓋欲只應畿甸貢賦之役, 而收米十六斗之後, 畿甸百役, 皆得以支過; 貢物私主人輩, 亦得以資活, 而國用不乏, 畿甸之民賴而少休, 咸仰聖澤, 實已試之明驗也。 今者憲府, 深燭弊源, 有此啓辭, 依此施行, 恐爲便益。 惟在聖斷。" 傳曰: "我國任土作貢, 其來久矣。 京畿收米, 徒爲本廳下人刁蹬之窟穴, 多有拘礙, 恐非經遠之道也。 八道決不可輕易竝行, 此公事勿施。"


사헌부가 선혜법(宣惠法)을 팔도에 시행하자고 청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방납을 금하지 못하면 국가의 경비를 계속 조달할 수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않을 텐데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변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시험삼아 경기 지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들이 많고 무거운 요역(徭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원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성명께서 왕위에 오르던 초기에 상신(相臣)에게 자문하여 새로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1년에 단지 쌀 16두를 거두었습니다. 그 처음에는 대개 경기 지방의 공물 징수에만 적용하려 하였는데, 쌀 16두를 거둔 뒤로는 경기 지방의 요역이 모두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공물 사주인들도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경비도 궁핍하지 않아 경기 지방의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보았는데, 이는 실로 이미 시험해 본 명백한 징험입니다. 지금 헌부가 폐단의 근원을 깊이 인식하고 이 계사를 올렸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함이 편하고 이로우리라 여깁니다.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경기에서 쌀로 거두는 것이 한갓 본청(本廳)의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되어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닐 것 같다.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 이 공사(公事)는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호조에서 공물 징수에 선혜청을 실시하여 폐단을 없애고자 건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광해군은 명백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는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지 오래이니, 선혜법의 확대는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니라 시행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 이외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동법을 검색해보면, 광해군 시기는 대동법이 시행되지만 공물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이들의 대한 상소문이 잇따라 있을뿐, 전국으로 확대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인조시기와 효종시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통설대로 인조가 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문제점들이 존재하니 충분히 논의 후에 따르자는 상소문이 대부분입니다. 황현필의 주장대로 광해군만이 대동법을 강행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현필은 그의 영상 9분51초에서 광해군이 치적이 없다는 말에 뒷목을 잡았다고 하는데, 필자는 그 반대로 이미 선조시기부터 행해지고 논해지던 부분들을 광해군의 치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 그대로 그의 이 말도안되는 왜곡에 필자가 뒷목을 잡을 것 같습니다.


너무 길어지니 한템포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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