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황현필, 광해군 재평가에 대한 비판적 Review(2)

by 철가면

4. 정통성 논란


황현필은 그의 영상 10분57초에서 선조 이후부터 조선이 맛탱이가 갔다고 표현합니다. 전형적인 식민사관이군요. 황현필이 극혐하는 선조와 인조는 당연히 비판받을 점이 많은 임금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를 위해 가져온 논거 중 선조의 방계 즉위에 대한 열등감은 철지난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근 학계에서 선조의 방계 컴플렉스는 적거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명종은 국모인 인순왕후를 비롯하여 6명의 후궁 등, 총 7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부인들이 있지만 자식으로는 순회세자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순회세자가 13살의 나이로 요절합니다. 왕실의 직계 혈통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왕세자를 국본이라고 했던 이유는 그만큼 왕조에서 후계구도의 안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입니다. 왕실에서는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 필요했습니다. 선조는 하성군 시절에 중종의 서장자이기도 했던 복성군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복성군이 어머니였던 경빈 박씨의 문제로 인해 죽음을 당한 뒤, 중종 말기에 복권이 되었기에 명종이 하성군으로 하여금 복성군의 가계를 이어가기 위한 배려였습니다.


왕실에서는 이런 사례가 매우 흔했는데, 사실 이 당시 명종의 이런 조치는 왕가의 가계를 잇기 위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순회세자가 요절하면서 하성군은 차기 왕위계승권자로 급부상합니다. 조선왕실은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부자관계로서의 즉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태종 이방원은 왕세제가 아닌 왕세자, 즉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는 태조 이성계의 정치적 훼방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인조반정으로 즉위했던 인조가 무리하게 아버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했던 이유 역시도 왕실의 부자계승의 전통을 잇고 싶어했던 이유입니다. 이는 인조가 할아버지 선조의 손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이 아닌 선조-원종(정원대원군)-인조의 3대에 이른 정통성 있는 즉위라는 것을 나타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무리한 정통성 강화는 선조의 서자들, 즉 인조의 또다른 숙부들이 인조 즉위에 대한 반기를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중종의 서장자였던 복성군의 양자였던 선조, 당시 하성군은 중종-복성군-하성군이라는 법적 혈통에 덕흥군의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난 적통의 위치를 가진 중요한 왕위계승권 1순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끝내 명종이 더이상의 적통 후사를 보지 못하고 승하하자, 명종과 인순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명종의 법적 적통 장남의 자격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는 후에 선조가 벌이는 영창대군의 문제로 인하여 숱한 논쟁을 야기했습니다. 바로 선조 자신이 적통 승계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방계 컴플렉스를 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조는 엄연히 명종의 법적 아들입니다. 거기에 왕이 후사, 또는 고명 없이 승하하는 경우 국왕의 지명권은 엄연히 내명부 최고 어른이 결정하는 것이 법도였기에 인순왕후의 지명을 받았기에 그 어떤 정통성 논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황현필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선조가 그저 중종의 서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선조는 중종의 9번째 아들의 3번째 아들이고, (영상 11분23초) 방계이며 서손이라고만 이야기합니다. 필자가 위에서 이야기했던 저런 부분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황현필이 과연 조선 왕가와 왕통, 그리고 법통과 정통성에 대해 아주 조금의 고민과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런 왕실의 정통성은 매우 중요한데, 단종의 정통성이 조선을 넘어 세계사를 통틀어도 보기 힘들 정도인 이유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 문종의 아버지이자 단종의 할아버지인 세종의 3대에 이르는 적통이었던 까닭입니다. 숙종이 무소불위의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이유도 인조부터 이어진 왕통이 효종-현종-숙종에 이르는 3대 적통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영조가 경종을 끊임없이 추모하고 그리워하며 이 삼종의 혈맥을 중시 여겼던 이유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숙종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숙종의 후계자였던 경종의 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조는 자신의 뒤를 이으는 후계 왕통은 적통에게서 나오길 원했을 수는 있습니다. 다만, 선조가 정통성이 부족하고 컴플렉스를 앓았다는 주장에는 그 신빙성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선조가 정말로 정통성이 부족했다면 그를 국왕에 임명한 법적 어머니인 인순왕후가 수렴첨정을 1년만에 그만둘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황현필의 영상 12분32초에서 황현필이 주장하는, 자기 뒤를 이을 후계자는 정식 왕비에게서 보려고 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는 추론은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황현필은 희안한 논리의 이야기를 합니다. 의인왕후가 사망한 이후 선조가 계비를 맞이하는 것을 두고서 짓거리라 표현합니다. (영상 16분28초) 이어서 후궁으로 들이는 것이 아닌 정식 왕비로 책봉하는 것을 두고 강하게 비난합니다. (영상 16분37초) 그가 얼마나 조선 역사에 무지하고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를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조선 왕실은 문종 이후 병적일 정도로 정식 왕비, 그러니까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수양대군이 일으켰던 계유정난이 일어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왕실의 왕후, 대비 등과 같은 왕실의 어른이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종은 공혜왕후 사망 이후,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등을 통해 왕비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고 중종 역시도 단경왕후 사후, 장경왕후와 문정왕후를 연속으로 들였던 것입니다. 인조도 인열왕후 장렬왕후를 들여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았으며 숙종 역시도 인경왕후, 인현왕후, 폐비 장씨, 인원왕후 등의 왕비를 계속해서 들였고, 영조 역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새 왕비인 정순왕후를 들입니다.


이건 조선왕들이 젊은 여자와 혼인을 위해 했던 일들이 아닙니다. 황현필의 주장대로 그저 색을 위해 들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유사시에 벌어질 수 있었던 이들을 대비한 조선왕가의 대비책이었던 것입니다.


황현필은 이러한 조선 왕실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가 없습니다. 단순히 몇몇 인물들에게 악의적 의도를 가지고 왜곡을 하고 이 왜곡을 통해 특정 인물에 대한 선악의 이분법적 프레임을 뒤집어씌웁니다. 역사와 인물을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선악의 구도로만 파악하려고 하고 그저 교과서 수준의 공부만을 해왔으니 시선이 편협해진 것이죠. 또한 사료를 읽는 능력이 거의 없다 보니 몇몇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만, 그것도 나무위키 등에서 긁어서 가져오고, 그마저도 제대로 가져오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수많은 단면과 사건, 그리고 우리가 알지못하는 역사의 이면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를 통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역사는 단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광해군에게도 당연히 폭군이나 또는 억울한 측면이 존재할 겁니다. 그러면 선조와 인조에게도 마찬가지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해야합니다. 더 나아가 수많은 역사적 인물을 마찬가지로 접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황현필은 광해군의 대한 재평가를 한다면서 기존의 자신의 의견에 뚜렷한 자료와 식견 없이 앵무새처럼 반복되게 이야기합니다.


5. 광해군의 옥사


황현필은 위의 인목대비가 새로 왕비로 간택된 이후부터 영창대군의 존재로 인해 광해군이 많은 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 류영경의 대한 옥사를 시작으로 영상 18분 17초부터 광해군 옥사의 대한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그러면서 봉산옥사, 허균옥사, 임해군 옥사, 계축옥사등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영상 18분40초에 고변이 없는 옥사냐 묻습니다. 그러면서 그럴만한 옥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사람 이거 큰일날 소리를 하는군요.


그가 봉산옥사를 이야기하는데, 이 봉산옥사에 대해서 제대로 학습은 했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는 자세입니다. 이 역시도 광해군에 대한 좋은 색안경을 끼고 이야기하니 별거 아닌 옥사라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봉산옥사에서 친국을 했던 광해군의 성향을 파악한 대북들이 이후의 옥사를 주도하면서 오직 조정에 대북만이 남게된다는 것을 황현필은 전혀 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봉산옥사 자체는 매우 별거 아닌 사건입니다. 이 봉산옥사에는 김제세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체포되면서 시작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김제세라는 이름을 조선왕실록에서 검색해보면 해당 기사만 광해군시대에 184건이 검색됩니다. 더 나아가 인조실록에도 그 이름이 보일 정도로 악명 높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광해군이 철저히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봉산옥사를 통해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등의 서인과 남인의 세력이 약화되고 대북의 세력이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김제세와 봉산군사 신율, 그리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계속해서 진술이 번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짐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그들을 모두 잡아다가 친국했습니다.


이 봉산옥사는 그저 그럴만했다는 옥사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임해군 옥사부터 시작되었던 광해군의 병적인 정적 제거의 가능성을 보았던 대북의 기자헌, 이이첨 등은 이 사건 이후 대북을 제외한 붕당 세력을 거짓 고변과 옥사의 확대를 통해 제거하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해나갔습니다.


또 황현필은 보통의 임금이었다면 영창대군이 장성할 때까지 죽이지 못하고 바라본다고 합니다. 정치적 생리를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영창대군은 태어나자마자 말도 못하는 아이를 지지하는 당파가 생겨납니다. 류영경을 비롯한 소북이 그들입니다. 영창대군은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이미 광해군에게 정적인 것입니다. 본인의 강의에서 이미 인정했습니다. 선조가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라는 아들을 얻어 광해군의 지위를 끊임없이 뒤흔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창대군이 무사히 성장한다면?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가장 큰 정적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본인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영창대군은 광해군 반대파들에 의해 끊임없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거론될 것입니다. 그만큼 선왕의 적통이라는 정통성이 주는 파괴력은 큽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 전기의 세종의 큰형이던 양녕대군, 성종의 형이던 월산대군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양녕대군은 폐사자 되었기에 정통성이 부족하고, 월산대군은 스스로가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냈을뿐 아니라, 성종의 후원세력이 훈구파 공신들이었기에 월산대군이 무엇을 해볼 여지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영창대군은 다릅니다. 존재자체가 무서운 정치적 돌풍의 핵이며 광해군 제1의 정적입니다. 문제는 이미 광해군이 즉위하기도 전이고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아이에게 정치적 뒷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황현필은 영상 19분7초에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을 언급합니다. 그러면서 김제남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부정축재하고 부패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돈이 있어야 쿠데타를 하든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상 19분15초) 그런데......... 김제남이 부정축재하고 부패하여 돈을 모았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조선왕조실록과 그외의 여러 기록들을 뒤져보았지만 이렇다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나마 그가 부정축재를 했다고 볼만한 기록이라고 해봐야 광해군일기 광해 5년 5월 4일 신유8번째 기사인데,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0505004_008)인데 이미 계축옥사로 인해 파직당하고 투옥당한 뒤의 일이기에 신빙성은 떨어집니다. 앞서 봉산옥사에서 이야기했듯 몇몇 고변을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않고 음해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계축옥사는 철저히 광해군과 대북세력이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과 그를 위시한 다른 정치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벌인 옥사입니다.


광해군이 아버지 선조는 물론,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에 비해서도 그 정치력이 형편없었다는 것이 바로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선조가 분명 붕당을 부축이고 자신의 왕권 강화에 써먹은 것은 맞지만, 특정 당파에게 힘을 몰아주지는 않습니다. 정여립의 난으로 인해 벌어진 조선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로 서인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건저 사건을 계기로 서인을 날려버려 조정의 균형을 맞춥니다. 인조 역시도 대북을 몰아내지만, 상대적 소수 세력이었던 남인을 완전히 박해하여 날려버리진 않습니다. 그러나 광해는 시종일관 오로지 대북을 위해서만 옥사를 감행합니다. 그리고 무고에 대한 부분들도 충분한 조사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옥사의 규모가 더욱 커집니다. 광해군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가 바로 여기에서 들어납니다.


또하나, 광해군은 친국을 어마무시하게 벌인 임금입니다. 친국은 왕이 직접 국문을 진행하는 것인데, 광해군은 실록상 남아있는 영조의 347건에 이어 282건으로 2위입니다. 그런데 영조가 52년을 재위했던 것에 비하면 단기간 국문은 광해군의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광해군과 영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금들의 친국 기록이 한자리수에 달하는 것은 광해군이 얼마나 정치적 식견이 형편없고 조정의 균형을 잡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황현필이 절대 역사를 강의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영상 21분 49초에 나옵니다. 황현필은 광해군 때 죽인 사람의 숫자가 많냐면서 죽인 사람의 숫자를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영상 22분 8초에서 선조 때의 기축옥사의 절반의 절반도 안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연산군도 폭군이 아닙니다. 연산군 당시의 갑자, 무오 사화에 죽은 숫자를 다 합쳐도 선조의 기축옥사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어떤식으로든 광해군을 옹호하려다 보니 그가 가져온 논리는 부적합하고 비논리적입니다. 거기에 인조반정 당시 죽은 관료가 100명이고 파직된 관리가 400명, 5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통계의 근거는 어디서 왔는지가 궁금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옥사 등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죽은 이들의 대한 숫자를 제대로 명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이를 모두 하나씩 찾아보고 통계를 직접 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라도 이글을 황현필이 본다면 답변을 바랍니다.


황현필은 광해군을 옹호하려다보니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들만 언급을 하게 되는데, 광해군의 폐모살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행위의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이후 벌였던 각종 실책이 반복해서 발생했고, 그 과정에서 명분과 조정의 지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광해군의 축출되고 실패한 임금일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이미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고, 같은 묘호를 가진 당태종 이세민 역시도 형제들과 조카들마저 모두 죽이고 황제의 위에 올랐습니다. 그 외의 수많은 동서고금에서 가족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렇기에 광해군의 다양한 옥사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태종 이방원이 평생에 걸쳐 적장자 계승을 원했던 이유도 자신이 했던 행위의 대한 반성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으며, 당태종 역시도 평생을 부도덕한 논리에 의해 발목이 붙잡혔고, 후대에서도 내내 비판받았습니다. 광해군 역시도 비록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국내외 정치를 균형있고 조정하며 현명하게 이끌었다면 광해군의 계축옥사는 그저 하나의 도덕적 흠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모든 신료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작했던 왕입니다. 황현필 영상 초반 부분에 이미 나와있듯이 광해군은 세자 시절 전쟁을 겪었던 전쟁 영웅이고 온 당파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반정으로 축출될 무렵,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소수집권파인 대북파 뿐입니다. 그가 아버지 선조에 비해서 정치력이 한참 모자랐던 이유입니다.


선조가 비록 비판받을 여지가 무수히 많은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를 과소평가할 수 없는 부분은, 조정을 적당히 분열시키고 적당히 조정하며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현필이 입이 닳도록 비판하는 무수한 선위과정 역시도 선조 개인의 인격을 비판할 여지가 있을지언정, 훌륭한 정치적 묘수로 그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또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황현필, 광해군 재평가에 대한 비판적 Review(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