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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 광해군 재평가에 대한 비판적 Review(3)

by 철가면

6. 양전과 공명첩


황현필은 조선의 군주 중에 양전사업을 제대로 했던 군주는 태종 이방원과 광해군, 흥선대원군 밖에 없었다고 영상 26분37초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제는 지적하고 반박하기도 힘이 빠질 지경입니다.


성종시기에 완성된 경국대전에서부터 고종시기에 이르는 대전회통까지 법제상으로는 양전은 20년에 한 번씩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양전 사업은 전 국토의 토지를 조사해야했기 때문에 그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드는 범국가적 사업이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는 일부 지역에 한해서거나 어사나 감사등을 파견하여 일부 지역에 한해서 진행하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양전을 검색해보면 양전을 시행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부분들이 많다는 상소문이 빗발칩니다. 황현필 그가 입에 피가 나도록 비판하는 선조시기에도 수많은 양전 논의가 조정에서 있었으며, 전국적 단위의 양전사업이 실제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다만, 양전을 시행하는 단계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을 뿐입니다. 이에 대한 비판의 상소는 꾸준하게 올라옵니다.


그리고 태종과 광해군, 흥선대원군만이 양전을 실시했다고 했는데 이조차도 황현필은 틀렸습니다. 또 전후복구 주장 과정에서 광해군이 양전을 실시했다는 것도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반계수록(磻溪隧錄)』권6, 전제교설(田制巧說) 하(下)의 「국조전제부(國朝田制附)」에는 임란을 전후로 한 경지 면적 변화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사료에서는 총 세 시기의 면적을 제시합니다. 임란전의 토지와 임란이후 양전사업의 토지 면적, 더 나아가 인조시기의 토지 면적을 제시합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전결은 총 151만 5500여 결이었으며, 임란 이후 대규모 전국적 양전이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여기서 이른바 계묘양전이 발생되는데, 호구는 임란 이전의 1/10 수준이며, 토지는 30만여 결로 평시의 1/5수준에 불과해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을 겪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란이 후 1600년대에 계획되었으나 지방관이 각기 조사하여 보고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하여 그 실행이 지지부진할뿐더러 정확하지도 않았기에 1603년에 다시 전국 단위의 양전이 시행됩니다. 그리고 이 양전으로 인해 기존보다 30만결이 많은 토지가 재조사됩니다.


황현필의 주장과는 다르게 양전은 수많은 임금들과 신하들이 직접적으로 수많은 논의를 진행합니다. 농업국가인 조선에게 있어서 토지는 즉 세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규모 양전사업이 잘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것에 있지 않습니다. 양전사업 자체가 백성들에게 많은 피로와 피해를 발생시키는 국가적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광해군의 양전 사업 역시도 전국 규모가 아닙니다. 선조시기에 진행된 계묘양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토지관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최초로 하삼도를 대상으로 한 양전사업이 실시가 된 것이고, 이후 인조와 효종, 현종 시기에도 지속적인 양전사업을 도별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숙종 말년인 1720년에 진행된 경자양전을 끝으로 더이상 대규모의 양전사업을 벌어지지 않습니다. 황현필이 말하는 흥선대원군의 양전 사업도 대규모가 아닌, 그저 은결을 색출하기 위한 소규모 양전 사업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전사업은 광무개혁 당시에 벌인 양전을 마지막으로 진행됩니다.


또 황현필은 영상 27분 2초에서 양전사업을 벌이면 지주들이 xx이라고 욕을 한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선악의 이분법 프레임에 사로잡힌 편협한 역사관입니다. 아주 틀린말은 아닙니다만, 여기서도 황현필은 전형적인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집니다. 인조시기에 벌였던 감술양전은 조티를 구분하여 면세 혜택을 줍니다. 광범위한 개간지, 누락된 토지를 많이 보유한 지주층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었는데, 이게 바로 황현필이 입이 닳도록 암군이라고 까대는 인조 시기에 있었던 갑술양전의 효과였습니다.


또 공명첩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습니다. 황현필은 영상 27분 47초에서 공명첩을 언급하면서 이 공명첩의 남발로 인해 신분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이를 통해 양반 지주들이 욕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 정말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식민사관에 함몰되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공명첩은 이미 세조 시기에 공명 공신이라는 이름으로 상소가 진언된 바 있었습니다.


"명 공신(空名空身)167) 을, 동반(東班)은 참판(參判)으로부터 좌랑(佐郞)까지, 서반(西班)은 동지중추(同知中樞)로부터 부사과(副司果)까지 수백 통을 써서 반적에게 함락된 주군(州郡)마다 수십 통을 보내어서, 토관(土官)·향리(鄕吏)·여수(旅帥)·대정(隊正) 등에게 주어 큰 공을 세우게 하여, 즉시 〈논상의〉 진실을 보이게 하소서."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5월 28일 임진 4번째 기사


수십 통씩 발급되고 그 대상이 토관, 향리, 여수, 대정등과 같은 중인 신분들에게 부여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공명첩은 단순한 국가 재정을 위한 역할도 있겠지만, 임란 당시 이 공명첩을 통해 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공명첩을 통해 병사를 모으는 일을 겸하게 하려고 했던 목적이 큽니다.


그런데 황현필은 영상 27분 37초에서 광해군이 폐쇄적 신분질서를 흔들기 위해 공명첩을 남발했다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기록된 공명첩의 관련된 기사는 거의 대부분이 국가 재정이 부족한 부분들로 인해 발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나마도 국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여 발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분질서를 뒤흔들고 싶다면 차라리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이 훨씬 나았을텐데요.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편은 조금 짧게 가겠습니다. 다음편은 광해군의 궁궐병과 중립외교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미 필자의 편견의 역사 광해군과 인조편에서 자세히 다루었기 때문에 짧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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