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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살 Oct 19. 2024

재계약을 하다

학습지 교사입니다

학습지 관리교사로 C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의 장점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날이 더우나 추우나 선선하나 따뜻하나 좋으나 나쁘나 상관없이 집에서 일한다는 것. 하의는 어떤 것을 입어도 상관없어서 주로 잠옷바지를, 상의는 적당히 깔끔하고 환한 컬러를 입으면 OK. 얼굴은 활기 있게 보일 수 있는 가벼운 화장 정도. 근무장소는 뒤에 C사의 메인 배경을 세워놓을 수 있는 공간만 확보된다면 집안 어디서든 가능. 하루의 20명 가까이되는 아이들을 만나니까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은 행복할 듯. 집에서 일을 하므로 자녀들은 엄마가 가까이에 있다고 느낌. 일하는 중간에 한두 번 자녀들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음. 


단점은 평일오후 두 시부터 여덟 시의 근무 중 연차는 일 년에 두 번, 2년 차 되면 일 년에 네 번 이외에는 쉬는 날이 없다는 것. (7월 마지막주에 5일 여름휴가가 있다) 매일 똑같은 업무를 진행하기 때문에 지루할지도 모른다. 계속 같은 자세로 앉아있으므로 다리가 붓거나 피가 안 통하는 증상도 각오해야 한다. 한 달에 전화통화하는 학부모가 보통 100명이 넘는데 주로 월초에 몰아서 해야 하므로 그 즈음에는 스트레스가 가중된다. 상담과 화상수업 외 재구매, 해지방어 등등 다른 업무도 많다. 집에서 혼자 일하므로 때론 동료가 그립다.




일하면서 단점이 보이면 장점으로 덮고, 장점도 시들해질 때쯤 통장의 잔고가 불어나는 것을 위안 삼아 1년을 버텼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 오전은 본사 출근일이다. 재택근무만 하니 한 달에 하루는 출근해서 서로 얼굴도 보고 전달사항도 듣는다는 취지이다. 이번주는 해지를 하겠다는 학부모 세명을 방어해야 했고(물론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시간을 바꿔달라는 회원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많이 힘든 주였다. 차라리 하루라도 출근해서 바깥바람도 쐬고 잠깐이라도 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걸려 본사에 도착하니 비가 살살 내렸다. 한 시간 반동안 새로 바뀌는 시스템에 대한 교육을 들으며 피로가 몰려왔다. 무언가가 바뀐다는 건 내가 배워서 능숙하게 만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그만큼 할 일이 늘어난다는 얘기였다. 누군가가 볼멘소리로 외쳤다. 

"왜 할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월급은 그대로인가요?" 

"그러게요."

파트장님의 힘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곧이어 이번달 재계약을 축하한다며 앞으로 나오라고 한다. 일 년 전 만났을 때보다 더 수척해지고 볼살이 없어진 동기선생님이 앞장서고 나도 뒤따라 나갔다. 일 년간 일한 소감을 얘기하라며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힘들어 죽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자동으로 나온 말은 "벌써 일 년이 지났네요. 시스템이 새롭게 바뀌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파트장님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영혼 없는 소리였다.   


건물 지하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파트 선생님들끼리 모였다. 언제나 화젯거리는 월급 혹은 일에 대한 애로사항이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해지회원이 늘어났고, 회원모집이 어려우니 원하는 월급만큼의 학생수 확보가 어렵다. 오랜 근무한 선생님들 중에는 작년보다 월급이 100만 원 이상 줄었다는 선생님도 있다. 줄어든 월급을 메꿔보려고 오전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힘들어서 그만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N잡러로서 너무나 공감되는 얘기였지만 007 작전중이라- 궁금하면 전 글을 읽어보시길^^- 그냥 공감만 했다)


귀가해서 남은 화상수업과 상담을 진행해야 하므로 오래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데 밖은 어둑하고 살랑거렸던 비는 소나기로 바뀌어 있었다. 두 시간 걸려 집에 돌아가 오늘의 화상수업과 상담을 진행할 일이 까마득했다. 상담과 화상수업이 지겨워서 출근이 낫겠다 생각했더니, 이런 날씨면 차라리 집에서 일하는 게 나았다 싶었다. 다 같이 지하철을 타서 역마다 내리고 내가 내릴 때쯤엔 두 명 정도 남아 있었다. '다음 달에도 무탈하게 만나요.' 마음속으로 인사를 했다. 


집에 돌아오니 문자가 와 있다. 신규회원에게 준다는 카메라 선물 사진과 함께 "이건 신규회원만 해당되나요?"라고 3개월 전에 등록한 회원이 물었다. '뭐 이런 당연한 물어보지?' 생각하면서도 "신규회원만 해당되고 님은 3개월 전에 등록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라는 문자를 최대한 정중하고 기분 상하지 않게 보냈다. 




일 년 전,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너무 기뻤더랬다. 매달 월급이 들어올 것도, 재택근무하는 것도 모두 감사했는데 일 년 후 많이 지친 나를 발견한다. '그동안 고생한 만큼 다시 시작될 일 년은 더 성장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재계약할 때까지 일 년을 잘 버텨준 나와 우리 동기들, 그리고 재계약 후 열심히 달리고 있을 모든 임시직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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