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마이 홈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소감은 수상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단아한 재킷차림에 자연스러운 헤어스타일,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흰머리, 다섯 페이지는 족히 될 듯한 길고 섬세한 문장들까지 모든 게 한강 그 자체였다. 원래 팬이었냐 하면 그렇진 않았다. 하필 제일 처음 읽게 된 책이 <채식주의자>였고, 2/3 가량 읽고 더 이상 소화가 안 되어 포기한 후로 한강의 책을 읽는 게 겁났었다. 내 상상 속의 한강은 굉장히 차갑고 도도하고 무서운 느낌의 사람이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매체에서 한강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상상 속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신기했다. 중저음일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는 작고 여렸으며, 차가운 매의 눈이 아닌 부드럽고 그윽한 시선을 가졌다니...
그전에 들었던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내가 만든 과거 이미지로 이 시를 들었을 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재'라는 느낌뿐이었는데 이제는 작가의 시선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내가 처음부터 한강의 팬이 아니었다는 변명이었고, 다시 노벨상 수상소감 이야기로 돌아간다.
장문의 수상소감 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이 있었다.
"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을 좋아합니다."
자연스레 내 책장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쏟아져 들어온 책들을 가감 없이 수용하느라 꽉 차다 못해 무질서한 모습은 전혀 호감이 가지 않았다. 내 책장도 좋아할 만하게 바꿔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래도 바로 정리를 안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한강작가의 다른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는 또 다른 욕구도 생기면서 책이 오기 전까지 책장을 정리하자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D-1까지 책장정리를 못했고, 결국 책이 먼저 도착했다.
난감했다. 손님이 왔는데 집이 엉망이라 허겁지겁 치워야 하는 상황이랄까. 다행히 오후에 조금 여유가 있어 팔을 걷어붙이고 책장정리를 시작했다. 몇 년간 쌓인 책들을 끄집어내어 보니 얽혀있는 추억의 실타래도 풀어보게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책들을 같이 읽어가면서 소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 에세이로 가득했던 책장이 소설들로 다채로운 색을 지니게 되었고, 조금씩 보이는 인문학 과학 심리학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보며 책을 읽는 범위가 다양해졌다는 것. 책장에 새로 온 손님(?)을 위한 쉼표를 둬야 했기에 지금 설레지 않는 책들은 서브책장으로 보내기로 했다. 두어 시간을 낑낑댄 끝에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책장을 정리하니 개운하다. 우리 집을 돌아보면 모든 방과 거실에 책장이 있다. 정리되지 않은... 궁여지책으로 메인책장만 정리를 했지만 이 여세를 몰아 온 집안의 책장을 정리하고 나면 꽤 행복해질 것 같다는 예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도, 그만큼 멋진 수상소감을 듣게 된 것도 기쁘고, 그 덕에 우리 집 책장도 정리하게 되어 감사하다. 달라진 책장과 함께 맞이할 가을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