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누리는 호사
우리 동네는 유난히 언덕이 많다. 언뜻 보면 평지 같지만 동네 자체가 원형으로 만들어져서 길이 이리저리 통하는 대신 오르락 내리락 길을 다녀야 한다. 걸어서 운동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지만, 더 운동효과를 주려면 자전거도 좋다.
다니는 한의원이 자전거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평지인데 달리다 보면 산을 타는 것 같은 언덕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올라갔지만,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된 요즘은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기분으로 허벅지에 집중해 끝까지 페달을 밟는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바람을 가르며 밑으로 내려갈 생각에 기분이 째진다. 물론 지난번엔 저 멀리 보이는 플래카드에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횡단보도에 있는 기둥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기도 했다. 자전거를 탄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조금만 방심해도 넘어질 수 있어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난 자전거를 한여름, 한겨울, 눈비 올 때를 제외하고 사계절 내내 타고 다닌다. 자전거는 가끔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바퀴를 교체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절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예전엔 예쁜 자전거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만, 몇 차례 도둑맞은 뒤로는 마음을 비웠다. 지금 타는 자전거는 친구가 준 건데, 장마 때 비를 맞혀서 바퀴에 녹이 슬고 바구니도 자전거랑 색이 안 맞아서 도둑맞을 염려는 없을 듯하다. 주 1-2회 정도 자전거로 가까운 마트에서 장을 보고 바로 실어서 온다. 오가는 시간과 장 보는 시간을 합쳐서 15-20분이면 해결되니 만족도가 높다. (쓰다 보니 마치 자전거 전도사가 된 기분)
처음 자전거를 배운 건 6학년 때 여의도 공원에서였다. 씽씽 달리는 사람들 틈에서 친구가 알려준 대로 페달을 밟으면서 휘청거렸는데 어느 순간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를 타는 경험을 했다. 뭐든 어릴 때 배우면 시간이 지나 다시 시작했을 때도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나도 공감한다. 6학년 이후에 다시 자전거를 탄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고 그때도 원래 잘 탔던 것처럼 탔으니까. 자전거를 타면서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고, 집 근처 공원을 돌며 20대를 보냈다.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하니 직장도 가까운 곳을 지원했고, 정장차림에 구두를 신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다. 자주 타니까 한 번씩 심하게 넘어지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요령을 터득했다. 자전거는 바퀴가 얇기 때문에 바퀴 옆면으로 살짝 올라간 땅이 붙어 있는 곳에서 속도를 냈다가 순간 균형을 잃고 넘어진다. 지금도 간혹 달리다가 휘청이는 느낌이 날 때가 있는데 여지없이 미세하게 땅이 갈라지는 곳을 지나고 있다. 그럴 때는 당황하지 말고 살살 속도를 줄이면서 지나가야 한다.
30대에 들어서 결혼과 임신, 육아에 전념했던 7-8년 간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자전거 대신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다니면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부럽게 바라봤었다. 가끔 아기띠를 매고 자전거를 타볼까 하는 상상도 했지만 혹시라도 넘어질 가능성 때문에 행동에 옮기진 못했다. 막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을 때 지금의 자전거를 친구에게 넘겨받고 오랜만에 페달을 밟았다. 방금까지 자전거를 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되어 바람을 느끼며 달렸던 초여름의 상쾌함은 한동안 눌려있었던 자존감도 쫘악 펴주는 듯했다.
다시 자전거를 타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많은 것들과 재회하기 시작했다.
'맞아, 난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그래, 그땐 그랬었는데...'
한 시간 이내의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부지런히 오가며 집 근처에 머물렀던 행동반경이 조금씩 넓어졌다.
얼마 전 자전거를 운동센터 뒤에 세워놓고는 잃어버린 줄 (누가 훔쳐간 줄) 착각했다. 내 자전거 사랑을 아는 가족들과 지인들은 나보다 더 안타까워했고, 아이들은 아파트 곳곳을 다니며 엄마의 자전거를 찾았다. 난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걸어 다녔다. 한의원에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전동자전거를 탔는데, 페달을 밟기 시작하고 부웅 질주하는 것이 영 적응되지 않아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겨우 도착했다. 돌아올 때는 차라리 걷는 게 낫겠다 싶어 40분가량을 걸었다. 그렇게 3주를 보내다가 (하필 장마철이어서 내 자전거는 며칠 째 비를 쫄딱 맞았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발견했다. 자전거는 녹이 좀 슬고 바퀴의 바람이 좀 빠졌지만, 다시 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어이없게, 그렇지만 희망적으로 다시 자전거와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시 가을이고, 곧 겨울이 시작되려 한다. 무사히 찾게 된 자전거처럼, 나의 일상도 여전히 무사하다는 안부를 전하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