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만...
또 올 것이 왔다....
이젠 새로울 것도 없고, 걱정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게 오는 순간에는 걱정이 된다.
내가 대담하게 넘기면 좋은데, 지레 예민해져서는
"괜찮냐, 표정이 안 좋다." 등등의 속을 긁는 질문을 해가며 남편의 표정을 체크한다.
남편은 지금 몇 개월째 주말에도 근무 중이다. 주말부부라 주말에만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작년 가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가 상반기까지 이어지고 있어서 주 1회 혹은 0회를 쉬고 있다. 그나마 주말수당이 있어 마음의 위안을 삼는단다.
보통, 남자들은 일하면서 자아실현 혹은 목표달성 등의 만족감을 얻는다는데 남편은 일이 본인과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얘기를 15년째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고, 중간에 다른 회사로 잠깐 옮겨보기도 했지만 현재의 회사만큼의 연봉을 주지 않아서 결국 돌아갔다고 했다.
그는 섬세하지만 순발력은 없으며,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는 신경을 못 쓴다. 현재도 하나의 프로젝트에만 집중하고 싶지만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다 보니 주중에는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를 막아내고 주말에 조용히 수습을 해야 한 주를 버틸 수 있단다. 한 사람에게 일이 이렇게나 몰리는 회사의 시스템도 이해가 안 가거니와 그렇게 해서 일의 진도가 나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지난 연말과 명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고 하루씩 먼저 출근하면서도 잘 버텼는데, 이달 들어서면서 많이 지쳐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말에 만나면 그의 얘기를 추임새를 넣어가며 열심히 들어주고, 맛있는 거 해서 같이 먹고, 숙소로 돌아갈 때 필요한 거 챙겨서 보내는 것이다. 주중에 아이들과 기도하고 응원 메시지를 보내며 끝나지 않는 일의 터널을 그가 잘 통과하기를 바라고 있다.
한동안 주말에 집에 오면 나랑 카페에 가는 것으로 충분히 위안을 삼았던 그였는데, 요즘은 마음이 많이 허한 듯하다. 방학 막바지라 막둥이를 데리고 남대문 다녀온 얘기, 아이들과 극장에 다녀온 얘기를 듣더니 아이들 크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함께 할 수 있는 내가 부럽단다.
'아니, 작년에 일본 갔을 때 아이들이 쇼핑만 하고 맛있는 것만 먹으려 한다며 삐져서 다시는 아이들과 해외여행은 안 갈 거라며 씩씩대던 사람이 급 변해서 이런 소리를 하네.' 싶었다. 난 그때 아이들과의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나중에 아이들이 다 크고 남편 하고만 여행을 다니게 됐을 때를 떠올리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었기에 말이다.
엊그제 아이들과 스텔라떡볶이를 주문하러 갔다. 별을 찍어먹는 떡볶이라며 하도 노래를 해서 개학하기 전에 한번 먹어보자고 했다. 우리는 이미 메뉴까지 미리 검색해 놓고 신나게 매장에 들어섰다. 주문을 하러 키오스로 걸어가는데 젊은 사장님이 싸늘한 표정으로 "지금 주문하시면 30분 기다리셔야 합니다."라고 했다.
앗, 순간 주춤했지만 다행히 시간 여유도 있고 어차피 먹기로 한 거 미루고 싶지 않아서 기다려도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과 구석에 자리 잡고 핸드폰을 보기도 하고 물도 떠와서 마셔가며 사장님 일하는 모습을 살짝살짝 훔쳐보았다. 사장님은 그 바쁜 상황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쿠팡이츠 주문'이라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배달하는 분들이 몇 분 간격으로 들어와 음식을 가져갔다. 그 와중에 엄마와 아들 둘로 이뤄진 다른 팀이 들어왔는데 역시나 사장님께 30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도 괜찮다며 주문을 했다. 이렇게 주문이 많이 들어온 들 프랜차이즈라 고생은 엄청하고 본사에 내는 게 많을 듯한데.... 나와 상관없는 생각까지 하다가 갑자기 젊은 사장님의 모습에 남편이 오버랩되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일들을 버텨내고 있는 싸늘한 표정의 김 차장. 인상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는 불쌍한 김 차장. 얼굴에 주름이 확 늘었다며 고민하는 김 차장. 한동안 조깅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추워서 조깅도 못하는 딱한 김 차장. 지난주에 외간여자한테 별생각 없이 예쁘다고 했다가 나에게 엄청 욕먹고 더 쭈그러진 김 차장. 아이들 옆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나를 너무나 부러워하는 안쓰러운 김 차장...
우리는 보통 밤 11시 넘어서 통화를 한다. 일과가 끝나고 그나마 잠자기 전의 여유 있는 시간이라서이다. 며칠간 힘이 없던 그의 목소리가 오늘은 조금 낫다.
"자기, 오늘 피곤해 보이면서도 목소리가 조금 나아졌네?"
"어, 나 오늘 6시에 일어나서 운동했어. 밤에는 너무 늦게 퇴근하니 센터가 다 문을 닫아서 생각해 보니 일찍 일어나야겠더라고."
"우와, 대단하다! 안 피곤해?"
"안 그래도 지금 엄청 졸려. "
"그럼 빨리 자."
"응, 책 조금만 읽고 잘게. 지난주에 집에서 가져간 무라카미 하루키 재밌네."
"아, 그 물에 빠진 무라카미? ㅎㅎㅎ"
남편은 지난 주말 하루키 책을 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순간 변기에 빠뜨렸다. 바로 꺼내서 드라이기로 말렸지만 책의 반 이상이 쭈글쭈글해졌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가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내가 평소와 다르게 변기청소를 했다는 거!
피곤에 지쳐 퇴근하고 온 와중에 쭈글쭈글한 무라카미를 읽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책을 읽고 운동을 시작했다는 건 그의 상태가 조금 호전됐다는 신호라 약간 마음이 놓인다.
카톡을 보냈다.
“2월도 고생 많았어.”
“ㅠㅠ“
“주말에 맛있는 거 먹자.”
“응, 그럽시다.”
물에 빠진 하루키 때문에 속상할 그를 위로할 겸 구입한
정유정작가의 <영원한 천국>과 김중혁작가의 <뭐라도 되겠지>는 깜짝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