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카드는 오직 ooo의 품위유지를 위해서만 사용할 것을 전제하여 사용을 승인합니다.
계약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매달 1일에 품위유지를 위한 금액 일십만 원씩을 지급한다.
2. 전월에 사용한 금액은 지속 이월 가능하다.
3. 본 계좌 내의 금액은 오직 ooo의 미모유지만을 위해 사용을 허가하며, 생활비 및 취미활동이나 타인에 대한 양도 및 기부 또는 식사비 등에 사용할 수 없다.
4. 사용 가능 예시(미용, 화장품 구입, 의류 구입 등)
5. 사용한 금액에 대한 근거 자료인 영수증을 반드시 7일 이내에 남편 ooo에게 제출하여야 하며, 불분명한 지출에 대해서는 다음 달 지급액에서 감한다.
6. 매달 일십만 원씩 정상적으로 입금되었을 시 감사하는 마음을 ooo에게 표현한다.
7. 천재지변 및 특수한 변화가 없는 이상 본 카드 사용과 매월 지급되는 금액은 영구적으로 지속한다.
8. 위반 사항 3회 적발 시 본 카드는 얄짤 없이 회수 처리하며 계약은 즉시 파기된다.
대표 가장 이사 : ooo
2019년 02월 18일
서명: (인)
6년 전 생일날 남편에게 받은 계약서이다. 처음엔 빨간 체크카드에 십만 원을 입금해서 줬는데, 2년 후쯤 십오만 원으로 인상되었고 그로부터 이년 후에는 이십만 원으로 인상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남편이 품위유지비라는 명목의 용돈을 주기 시작했을 때, 첫째가 초3, 둘째가 초1, 막내가 5살이었다. 생활비를 매달 받았지만 언제나 빠듯하고, 남들에게 베풀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건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걸 못하는 아내에게 주는 남편의 애정 넘치는 배려였다.
이십만 원..... 온전히 나를 위해서 쓰기에는 큰돈이다.
"자기, 밖에 나가서 누구 만날 때 마땅히 입을 옷 없고, 이것저것 필요하잖아. 이건 자기를 꾸미는 데만 사용해. 필요한 거 사고, 머리도 하고."
그렇다고 이 돈을 안 쓰고 모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계약서의 조항대로 영수증을 제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생활비 부족할 때 사용하고, 필라테스 결제할 때 보태고, 월초에 이것저것 급한 거 메꾸다 보면 야금야금 다 빠져나간다. 명백한 계약 위반임에도 계약은 파기되지 않았다. 6년 동안 품위유지비는 변함없이 내 통장으로 꼬박꼬박 입금되었다.
뭔가를 찾느라 서랍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남편이 준 계약서를 발견하고서, 매달 따로 입금되는 특별한 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있다.
그동안 남편에 대한 글을 연재하며 다각도로 그를 파악했다고 자부했지만, 이제 보니 그의 마음속 깊은 사랑의 경지는 얕고 팔랑거리는 내가 도달하기엔 멀었다. 난 워낙에 기분파라 불에 금방 달구어졌다 식는 냄비 같다면, 그는 서서히 뜨거워지고 한번 뜨거워지면 그 온도가 계속 유지되는 물이다.
그동안 남편이 순발력이 없다고 답답해했는데, 순발력을 가진 나는 꼼꼼하지 못하게 달그락거리고 많은 것을 놓치며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일이 힘들다고 불평할 때마다 여장부인 양 "참고 견디다 보면 분명히 좋은 날 올 거야." 큰소리쳤는데, 힘든 직장생활을 15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참을성의 정수를 보여주는 건 그였다.
남편은 중3이 된 첫째에게도 용돈을 주기 시작했다. 월 3만 원. 고1이 되면 4만 원으로 올릴 거란다. 올해 중1이 된 둘째에게도 월 1만 원씩 용돈을 지급한다. (막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이 모든 사실은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말이 몇만 원이지 이게 매달 나간다고 생각하면 적은 금액이 아니다.
섬세하고 말이 많다고 여리기만 하지 않고, 대범하고 말이 적다고 강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남편의 계약서는 6년 전 그날로 나를 데려다주었고, 난 오늘부터 계약서의 조항대로 지키면서 살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를 상상해 본다.
일단 생활비 안에서 가계를 잘 관리해야 품위유지비를 어느 것에도 빼앗기지 않고 명목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필요한 것을 할부로 구입하지 않고, 이 금액으로 사용한다면 소중함은 훨씬 커지겠지.
마침 읽고 있는 <돈의 속성>이라는 책의 이야기와 맞물려 남편의 계약서는 나의 자발적인 실천과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그의 섬세함은 6년 전의 종이 한 장으로 아내를 움직이고 있다.
자주 잊어버리는 내가 오늘의 깨달음을 계속해서 기억하기 위해 지금부터 남편을 '깊은 물'씨라고 불러볼까 한다. 그는 또 어디서 희안한 작명을 했다며 비웃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