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패러디
남편과는 그동안 만나고 같이 살았던 시간을 모두 합쳐 16년 되었다.
#남편 1
피부는 하얗고 웃을 때 반달이 되는 갈색의 눈동자는 착해 보이고 머리는 살짝 긴 웨이브에 (과장 조금 보태서) 순정만화에서 나올 법한 이미지이다. 정장이면 정장, 캐주얼이면 캐주얼. 뭘 입혀도 어울리는 훈남스타일. 키가 쬐끔 작아서 아쉽다.
#남편 2
영화를 심하게 좋아한다. 처음 같이 본 영화는 '거북이 달린다'였는데, 제목처럼 가볍게 웃으며 볼 법한 영화를 보고 나오자마자 '개연성이 떨어지네, 어쩌네' 투덜투덜. 그리고는 '영화 보고 뭘 느꼈어?'라는 끔찍한 질문을 한다. 난 그냥 가볍게 봤는데 뭘 느꼈냐니... 할 말이 없어 멍하니 있었더니, 나를 생각 없는 사람 취급한다. 갑자기 같이 영화 보는 게 부담되기 시작한다. 난 당신이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가 아니라고!
#남편 3
시댁에서 맞이한 주말아침, 늦잠자기도 애매해서 넋 놓고 식탁에 앉아 남편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는데, 눈치 없는 그는 거실에 나오자마자 TV를 켜더니 '출발, 비디오 여행'에 빠져든다. 머리는 새둥지에 입을 헤 벌리고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에 정신을 놓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짜증 나던지, 분가하면 집에 TV를 절대로 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싸움날 것 같아서 아이교육을 위해 TV를 놓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적당히 뻥을 쳤다. 그 덕에 지금까지 TV 없는 우리 집.
#남편 4
첫 아이가 태어나다. 형님 얘기로는 남편은 조카들이 집에 오면 방문 잠그고 안 나오거나 외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는데, 웬일. 온 정성을 다해서 씻기고 놀아준다. 잠 안 잘 때 안고 나가서 재우기. 밤새 열나던 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대신 밤새면서 시간마다 물수건으로 닦이기. 세계 최강 섬세한 아빠대회에 나가도 손색없겠다.
#남편 5
그는 입맛이 까다롭고, 아무거나 잘 먹지 않는다. 어머님이 각종 찌개나 탕을 끓이면(어머님 요리 잘 하심) 힐끗 보고는 바로 옆에서 냄비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인다. 내가 '어쩌면 저럴 수가. ' 하면서 놀란 토끼눈을 하니 어머니께서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쟤 원래 아무거나 잘 안 먹어. 맘에 안 들면 라면 끓이고."
잘 먹는 음식은 고기, 고기로 만든 햄, 고기맛 나는 무엇 무엇, 본인은 육식공룡이라나....
#남편 6
처음 해보는 것을 겁낸다. 결혼하고 매년 서울 대공원에 간다. 지겹다. 동물구경도, 김밥도. 똑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만이 우리가 나이 듦을 증명해 준다. 망상해수욕장으로 휴가를 갔다. 처음 가보는 거라 그냥 느낌대로 가장 싼 카라반을 예약했는데 땡잡았다. 4만 원이라니... 그 후, 국립자연휴양림이라는 신세계(?)를 알게 되었다. 다행히 남편이 휴양림을 겁내지 않아서 당분간 우리의 휴가는 휴양림으로 결정이다.
#남편 7
복싱을 시작했다. 두 달 만에 관뒀다.
#남편 8
회사가 어려워졌다며 돌연 그만두고 나왔다. 마음을 다잡겠다며 근처 산에 오르고 있다. 곧이어 자격증을 따겠다고 공부를 시작했다. 덕분에 실업급여로 생활하며 예정에 없던 남편 도시락을 쌌다. 다행히 자격증을 하나 따고는 1년 만에 회사로 복귀했다.
#남편 9
갑자기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원래 인간은 일부다처제라는 둥 우리나라 최초로 야한 소설을 써서 지탄을 받은 소설가의 소설에 심취하지 않나 내 속을 뒤집기로 작정한 듯하다. 급기야 어울리지도 않는 노란색으로 염색을 했다. 매일같이 술 마시고 들어온다. 남편 9는 지금까지 중 최악이다.
#남편 10
대리운전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본인에게 돈을 쓰기 시작했다. 골프를 1년 치 결제했단다. 본인 물건이 계속 택배로 도착한다. 아이들이 어려서 아르바이트도 못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남편 10은 남편 9만큼 별로이다.
#남편 11
코로나가 무섭긴 한가보다. 남편은 아주 매운맛에서 중간맛으로 돌아왔다. 그 전의 순한 맛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이 정도라도 돌아온 걸 감사하기로 한다. 남편 9와 10에게 심하게 데어서 아직은 가까이하기 싫을 때가 더 많다.
#남편 12
돈독이 올랐다. 자꾸 영끌해서 집을 사잔다. 경기 외곽에서 서울로 이사 가잔다. 미친 것 같다. 귀를 막고 버텼다. 남편 9 이후부터 아주 이상해졌다.
#남편 13
클라이밍을 한다며 6개월을 끊었다. 결국 다 못 다니고 끝냈다.
#남편 14
대화하는 걸 좋아한다. 순한 맛과 매운맛 사이 어딘가를 넘나 든다. 앞의 남편들에게 많이 단련됐는지 이젠 괜찮다. 회사가 이사하면서 주말부부가 되었다. 아주 잘된 것 같다.
#남편 15
본인 생일선물로 몇 날며칠을 고민한 노트북을 사달랬다. 사줬더니(카드 할부의 힘을 빌려) 몇 시간을 앉아서 a4 반페이지정도 이야기를 써와서 읽어보란다. 재밌다니까 과도한 용기가 생겨서는 소설가로 전향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둔단다. (정말 감사하게 사장님께서 처자식을 생각해서 조금 더 일해보자고 강하게 붙잡아주셨다).
#남편 16
요리를 한다. 시그니처 메뉴는 새우초밥과 봉골레 파스타. 김치도 담근다. 아주 사랑스럽다.
#남편 17
조깅을 시작했다. 구운 계란을 먹는다. 고단백질 두유를 마신다. 샐러드도 먹는다. 간혹 술 마시고 전화해서 회사일이 힘들다며 꺼이꺼이 운다. 자기 전 30분가량 폰대신 책을 읽는다. 내 셔터맨 겸 운전기사가 되겠다고 자주 충성을 맹세한다. 나랑 노는 게 가장 재미있다는 입에 발린 아부를 한다.
욕심이겠지만, 남편 17로 머물러주면 참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