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술을 거의 못 마신다. 실은 안 마신다. 대학교 2학년까지 술과 함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3학년 올라가는 시점에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휴학과 동시에 술을 끊었다.
나에게 술이란 '세 보이고' 싶은 자리에서 마시는 용도여서 아직 세 보이고 싶은 시기였던 이십 대 중후반까지는 나름 유혹이 많았다. 그래도 꿋꿋이 버텼다. 뭔가를 끊는다는 게 어쭙잖게 끊으면 자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어물쩍 선을 넘어가버리는데, 아예 칼같이 끊어버리면 진짜로 끊어진달까. 어쨌든 칼같이 끊은 덕에 유혹을 잘 넘기고 이십 대 후반이 되었다.
그즈음 직장에서 알게 된 원어민 샘들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크리스마스나 핼러윈데이에 샘들이 손수 와인과 간식을 준비해 와 작은 파티를 열곤 했다. 그런 자리에서 와인은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의 의미로 느껴졌고, 샘의 정성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았다는 핑계로 그때부터 특별한 순간에 와인만은 마시기로 했다.
어쩌다 한 번씩 와인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모임에서 꽤 편안해졌다. 그마저도 결혼하고 몇 년간 임신과 출산, 육아의 시간을 지나면서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남편과 와인을 앞에 두고 잔을 기울이게 된 건 아이들이 조금 컸을 무렵이었다. 언제나 아이들을 동반해 다섯, 넷, 셋이서 몰려(?) 다니던 양상은 아이들이 조금씩 엄마 아빠랑 떨어져 할머니집에 놀러 가는 주말이면 남편과 나 이렇게 둘로 바뀌었다. 둘만 있으니 왠지 어색해서 우리는 계획을 세워 밖에 나가 외식도 해보고 산책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마트도 가면서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신혼 때 못 해 봤던 것들을 이제야 해보는 기분이랄까.
장을 보며 여기저기 돌다가 남편이 와인코너에서 멈췄다.
가격이 너무 착하다며 한번 마셔보자고 했다. 만원이 안 되는 가격은 다른 음료수와 비교하면 싼 건 아니지만 와인을 마시며 갖는 특별한 시간을 위해서 투자할 만한 금액 아닌가. 다행히 예전에 어디서 선물 받은 얇고 긴 와인잔이 있었다. 각자 좋아하는 과자와 냉장고 안 체다 치즈를 안주삼아 매우 즐겁게 마셨다.
다음날 설거지해서 올려놓은 그릇들 근처에서 "쨍그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심코 컵을 꺼내던 큰따님께서 얇고 긴 잔 하나를 넘어뜨린 것이다. 순간 살짝 아쉬웠지만 "괜찮아. 안 다쳤으면 됐어." 하면서 깨진 잔을 치우고, 하나는 물기를 닦아 케이스에 넣어 찬장으로 보냈다.
"오늘 뭐 하나 도착할 거야. 잘 받아둬."
"뭔데?"
"와인잔 주문했어."
"와인잔을?"
"응, 와인을 큰 잔에 마시면 더 맛있대."
지난번 트레이더스에서 산 와인을 마시려면 새 와인잔이 필요하다며 열심히 검색해서 삼만 원을 주고 샀다는 남편. 아무 잔에나 마시면 된다는 나와는 역시 다른 차원의 감성. 덕분에 나도 비싼 잔에다 마셔보겠다고 하면서도 왜 피식 웃음이 나는지...
불금, 11시에 집으로 귀가해 새우를 듬뿍 넣고 알리오올레오를 만드는 요란한 소리에 중학생인 1,2호가 합류하면서 와인타임은 '야식타임'으로 바뀌었다. 와인잔을 두 손가락에 끼우고 바닥에서 돌려줘야 와인이 잘 섞인다는 남편의 말처럼 돌려진 와인은 발효가 잘 된 건지 내겐 매우 셌다. 먹성 좋은 따님들 덕에 알레오올리오를 다시 만드는 남편과 달리 졸린 눈을 비비며 취기까지 올라온 나는 견과류를 손으로 집다가 와인잔을 엎는 사고를 냈다. 다행히 잔이 깨지지 않아서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잔이 무슨 코렐같이 가볍고 단단해~"
사실 남편은 와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마시는 게 와인이라 거기에 맞춰주고 와인잔까지 준비해 준 건데 그런 역사적인 날 나는 오랜만에 취했다. 둘이서 한 병을 다 마시고 바로 침대로 가서 기절. 다음날 오후까지 속이 안 좋다며 골골 댔다. 새 와인잔 덕에 숙취까지 경험한 듯했다.
"자기 어제 코 엄청 골던데?"
"그랬어? 미안. 엊그제 와인 마시고 잘 못 자서 어젯밤에 좀 푹 잤거든."
"너무 코를 골아서 깨우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코를 골았으면 남편이 많이 힘들긴 했나 보다.
조금 있다가 새벽에 무섭다며 내 옆에 왔던 막둥이가 이야기했다.
"엄마, 제가 새벽에 엄마한테 갔잖아요. 근데 엄마가 주무시면서 ㅋㅋㅋㅋ하면서 살짝 코를 고시는 거예요. 꼭 좀비처럼요. "
"ㅎㅎㅎ 그랬어?"
"그런데 그 옆에서 아빠가 엄청 크게 코를 고셨어요. 꼭 괴물처럼요."
난 자면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막둥이 덕에 남편도 코를 골았단 사실이 밝혀졌다.
"나 이제 외박도 못하겠고, 술도 당신이랑만 마셔야겠네. 코 골지. 술 마시면 취하지. 너무 제약이 많아졌어."
"그러게. 술은 우리끼리만 마시는 걸로."
그날 이후 깨끗이 닦여서 보관되어 있는 삼만 원짜리 와인잔에 조만간 화이트와인이 담길 예정이다.
그날도 와인잔을 바닥에서 돌리며 마셔보고 전처럼 취한다면 나의 취기는 순전히 남편이 선물한 와인잔 때문인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