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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위한 선물

섬세한 남자 만족시키기

by 엄살

그는 선물할 때 포장을 중요시한다. 포장을 하지 않고 선물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나...


신혼 때부터 우리 집엔 항상 포장지가 있었다. 동네 문구점에는 예상외로 포장지가 없어서 다이소에서 천 원에 세장짜리 포장지를 구해다 놓곤 했다.






남편이 포장을 중시하길래 생일선물로 만 원짜리 핸드폰 케이스를 탠디지갑 상자에 넣어서 준비했다. 그 당시 남편은 본인에게 돈을 쓰는 것을 극절제하고 있었고, 뭐를 사준다 해도 괜찮다고 하길래 나도 아무거나 골라서 그냥 주기 뭣해서 그렇게 준거였다. 문제는 그걸 받자마자 남편은 "언제 이런 걸 준비했어?" 하면서 기대의 눈빛으로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 든 선물을 보고 너무 실망했다.


그의 이론은 선물은 가치에 맞게 포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탠디 상자에 들어있는 건 탠디여야지 그런 식으로 사기(?)를 치면 안 된다는... 그리고 핸드폰케이스 역시 본인의 스타일이 아니니 싫다고 해서 결국 반품처리 했다.


한동안 탠디상자에 만 원짜리 폰케이스를 넣어준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계속 붙여대서 그걸 만회하기 위한 시간이 꽤 걸렸다.






섬세한 남편에게 맘에 쏙 드는 선물을 하는 방법은 의외로 쉬웠다. 원하는 걸 콕 집어서 해주기.

그는 어려서부터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는 장난감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간담로봇과 배트맨 시리즈.

간담은 본인이 한참 시간을 들여 최저가를 찾아냈는데, 막상 사주고 나니 한동안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관심에서 사라졌다. 배트맨은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라 해서 간담보다 좀 더 많은 투자가 필요했다. 레고 시리즈 중 배트카를 구입해서 몇 시간을 들여 조립했는데 그의 관심을 벗어난 어느 날 아이들의 손에서 하나씩 분해가 됐고, 커다란 배트맨 시계를 몇 년 간 책상 위에 올려두더니 큰 애가 자꾸 늦잠을 자니까 모닝콜로 사용하라며 양보했다.


가장 좋아했던 선물은 내 옆에서 몇 년간 노래를 불렀던 '플레이 스테이션 5'였다. 게임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게임하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던 과거의 나였기에 그 선물은 그의 관심사와 취향을 존중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게임은 남자의 여러 가지 취미 중 가장 경제적이라고 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서 돈을 쓰지 않고 집안에서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다. 한번 게임기나 칩을 구입하면 그것으로 일 년 정도는 따로 더 들어가는 자금도 없단다. 본인이 집에서 게임을 하다가 나에게 급한 일이 생기거나 도울 일이 있을 때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니 나도 '허허' 웃으며 두 손 두 발 들 수밖에.



그도 나이를 먹었다. 30대 중반까지는 아무거나 입고, 신고, 들고 다니더니 이젠 그런 게 조금씩 창피하단다. 그의 취향을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쇼핑을 해 보았지만 사이즈며 디자인이 생각과는 달라서 숱하게 반품을 했다. 그러고는 가까운 아울렛에 가보자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서 발품을 팔아보니 머릿속으로 그리던 비슷한 것들을 좋은 가격에 득템 할 수 있었고, 그렇게 찾기 어렵던 신발류도 나이키 매장에서 찾았다. 이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울렛 나들이를 하는 게 그를 위한 선물이 되었다.






최근 그를 위한 더 좋은 선물을 발견했다. 책을 구입할 때 꼭 알라딘 중고서적을 이용하는 그에게 '문화상품권'으로 새 책을 살 수 있는 특권을 주는 것이다. 그는 정유정 작가의 열성팬인데 신간이 나왔다는 얘기를 작년 말부터 했다. 자주 가는 동네 서점에서 구해 주겠다고 해놓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 생일에 둘째가 아빠에게 문화상품권을 3장이나 선물했다. 그것으로 정유정 작가의 책을 사겠다며 아주 신났다.


선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좋은 게 또 떠오른다. 비염과 알레르기를 달고 사는 그에게 공기청정기가 있으면 좋을 듯하다. 우리 집 주방과 가전은 대부분 그가 알아보고 구입한 것이다. 물만 나오는 최저가 정수기, 10년 넘게 사용 중인 린나이 오븐레인지, 몇 년 간 열일했던 네스프레소, 직구로 구입하는 바람에 고장 났을 때 수리하는 데 실패했지만 한동안 잘 사용했던 샤오미 가습기, 여름을 책임졌던 위닉스 제습기, 다른 집은 다 있는데 우리 집만 없다며 할부로 구매한 엘지 에어컨... 어차피 집에 다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으나, 할 수만 있으면 집안 살림을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 나라면 들여놓지 않을 물건들이다.


아마도 최고의 선물은 만기가 다가오는 우리 집을 분양받는 것일 듯. 현재의 대출금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좋은 조건으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대출만 다 갚고 나면 은퇴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걱정 마, 당신 노후는 내가 책임질게." 큰소리부터 쳐 놓은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지만, 그러기에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될지도...


'남편! 해줄 수 있는 선물이 많아져서 좋네. 오늘도 일하느라 고생 많아. 섬세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감정 다 느끼면서 견디는 거 참 대단하다. 조금만 더 버텨줘. 내가 열심히 해서 내 운전기사 시켜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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