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잘 삐져요
남편이 돌아오는 때는 보통 한밤중이다. 도로가 밀릴 때 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동안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하면서 기다렸다가 집으로 출발한단다.
돌아오면 우리 집도 한밤중이다. 나는 보통 독서하면서 남편을 기다리는데, 도착할 때면 거의 눈이 감겨서 반 수면상태로 인사만 하고 잠든다. 다행히 그 시간에 중2인 첫째 아이가 깨어있다. 아빠를 닮아서 밤에 쌩쌩하다. 그 시간에 만난 부녀는 몇 시간을 이야기한다. 주로 아이가 이야기하고 남편이 들어준다. 아이의 관심사를 콕 집어서 질문하고 그것에 대한 대답을 계속해서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난 몇 번 들어주다가 중간에 딴생각이 나서 포기했다) 그걸 참고 다 들어준다.
12시가 넘은 시간에 주방도 시끄럽다. 김치비빔국수, 라면으로 만든 투움바파스타, 알리오올리오스파게티 등 아주 화려하기 그지없는 메뉴를 만들어 먹으라고 성화다. 졸려 죽겠는 걸 참고 먹었다가 다음날 내내 화장실을 들락거려서 그다음부터 나는 먹는데 열외가 되었지만, 야행성인 두 부녀는 먹고 새벽까지 놀다가 잠이 든다.
남편은 자기를 닮은 큰 아이가 어떤 걸 좋아할지 잘 알고 있다. 아이폰을 사주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거에 맞는 무선 이어폰, 연동되는 손목시계를 선물했다. 아이는 매우 만족하면서 잘 사용 중이다.
어느 날은 아이방의 컴퓨터 책상이 부실해 보인다며 본인이 사용하던 책상을 들고 왔다. 조만간 아이침대 매트리스가 꺼진 것 같다며 본인 매트리스를 들고 올 기세다.
그러면서 잘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좋겠다. 나 같은 아빠가 있어서!"
남편은 주말에만 아이들을 만나니 더 애틋할 것이다. 장 보러 가면 아이들 먹여야 한다고 이것저것 잔뜩 집어넣는다. 그래서 내가 자꾸 평일에 아이들에게 "대충 먹어."라고 이야기해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가 보다.
코로나 시절, 자가키트로 검사를 해야 하는데 내 코에도 아이들 코에도 길쭉한 검사키트를 넣을 자신이 없어서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땐 주말부부가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 다쳐서 피가 나서나, 약을 발라야 하거나, 붕대를 감거나 하는 종류의 일도 척척 잘한다. 가족들의 귀를 파주고(다행히 아이들 손톱은 내가 깎일 수 있다) 심지어 여행 전에 아이들 때도 밀어줬다. 아이들의 긴 머리를 잘라준다며 전문가용 가위를 구입했다. 온갖 더러운 것은 본인이 다 한다면서도 사실 너무 개운하다며 좋아한다.
이렇게 섬세하다 보니 다른 쪽으로도 섬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예를 들면 쇼핑 가서 같이 골라준다거나 스타일링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거나 하는 등.
결론은 이쪽으로는 전혀 코드가 맞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특화되어 있다고 해서 딸들이 원하는 모든 코드를 다 맞추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쇼핑하는 게 힘들고, 그 시간에 조용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다. 여행 가서 아이들이 매일같이 쇼핑하자고 했을 때 "다시는 딸들이랑 해외여행 오지 않겠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딸 셋 중 가장 여성스러운 막내는 나랑 코드가 더 잘 맞는다. 올리브영과 다이소를 좋아하고, 철마다 입고 싶은 옷이 있으며 스타킹을 신지 않고는 외출하지 않는 이 녀석이 난 매우 편하다.
아이들 모두와 남편이 하나 될 때는 게임시간이다.(이 시간은 내 자유시간이기도 하다. 난 게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유형이라 일찌감치 가족들이 놔주었다) 요즘은 '젤다'라는 게임에 빠져있다. 아빠가 게임하는 게 재밌다며 셋이서 모여서 들여다보고 있다. '원신'이라는 게임도 하는데 이건 아이들이 더 잘해서 아빠의 캐릭터를 한 번씩 키워준단다. 게임에 빠져 한동안 크리스마스 선물이 게임칩과 닌텐도였다.
작년부터 "엄마, 아빠가 돈 없어서 선물을 못 해줄 것 같아." 했더니 큰 아이는 커피숍 가라며 봉투를 내밀었고, 둘째와 막내는 몰래 다이소에 가서 엄마 아빠가 좋아할 법한 소소한 것들을 사 왔다. 남편이 몇 년간 아이들에게 선물한 결과인 듯싶어 그를 칭찬했다.
남편의 생일이었다. 일요일이었지만 출근한 날이었다. 아이들 보고 "아빠생신이니 연락 좀 드려라." 했다. 둘째가 연락했더니 남편은 내가 시킨 줄도 모르고 "네가 젤 먼저 연락했다"며 좋아했다. 큰 아이는 "저까지 한 번에 연락하면 엄마가 시킨 게 티 나니까 나중에 연락할게요." 했다. 그러고는 하루종일 잊어버리고 연락을 안 했는데 밤에 통화하다가 남편이 "큰애는 연락도 없다"라며 서운해했다.
2월 들어 "매일 같이 바쁜 아빠에게 연락 좀 자주 해드려."라는 말에 둘째가 매일같이 연락을 했단다. 남편은 역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요즘 매일 문자를 보낸다"며 기특하단다.
이럴 때 보면 눈치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다. 그래도 끝까지 비밀은 잘 유지해야 한다. 사실을 알게 되면 딸들에게 엄청 삐질지 모른다.
요즘 너무 바빠서 2 주내내 얼굴을 못 봤더니 그의 섬세함이 생각난다. 나한테도 발휘되는 섬세함. 큰아이 무선 이어폰을 사주면서 나한테 어울릴 법한 이어폰을 열심히 골랐다며 내밀었다. 이런 류의 제품은 아무거나 사용하는 내겐 매우 럭셔리한 선물이었다. 오늘따라 자랑하고 싶어졌다.
이번 주말에는 그동안의 수고를 치하하며 나에게 부족한 섬세함을 발휘해 오랜만에 집에 오는 그를 챙겨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