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의 법칙
"너 솔직히 약속 잡고 나서 만날 날짜는 다가오는데 갑자기 취소되면 좋지?
"어? 맞아. 보고 싶어서 약속을 잡긴 했는데 막상 나가려면 귀찮거든."
"근데, 네가 먼저 취소하긴 미안하고 상대방이 갑자기 사정 생겼다고 연락 오면 '아싸~'지?"
"너... 내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왔어?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알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우리의 인연은 대학 때부터였으니 몇 년만 더 있으면 30년 지기가 될 것이다. 우린 친하지만 성격은 좀 달랐다. 사실 어떻게 다른지 잘 몰랐는데 오늘 조금 실마리를 잡았다. 남편 덕분에!
친구가 이야기했다.
"나 ISFP야."
"그래? 난 ESTP인데..."
"네가 T라고???"
"응, T와 F가 거의 반반이야. 그런데.. 네가 I란 말이지?"
"ㅎㅎ 난 할 수만 있다면 하루종일, 아니 한 달 동안도 집에 있을 수 있어."
"정말? 난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 힘든데... 하다못해 산책이라도 다녀와야 해."
"하루종일 집에 못 붙어있고 마트라도 다녀와야 하는 사람이 바로 너였구나."
"응, 우리 남편이 하루종일 집에 잘 있지. 그래서 쉬는 날 나 혼자 도서관에 다녀오거나 잠시 산책 갔다 오는 편이야."
"혼자서?? 같이 가자고 안 하고?"
"너도 알잖아. 하루종일 집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 괜히 평화를 깰 필요가 없지."
"너 알아도 너무 잘 안다!"
결혼하고 첫 휴가 때 남편은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일주일 휴가 중에 삼일은 집에서 쉬어야 하니 휴가를 가더라도 2박 3일에서 길어야 3박 4일만 가자고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모르면서 "알겠다"라고 했던 그 해 휴가는 거의 망했다.
남편이 얘기하는 집에서 쉰다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안에만 있겠다였고, 내가 이해한 집에서 쉰다는 건 몇 박 며칠 스케줄을 잡아서 놀러 가지 않을 뿐 집에 머물면서 잠깐씩 밖에 나가 외식하거나 산책 정도는 하는 거였다.
여행 후 집에서 쉬는 첫날, 오전에 집에서 쉬다가 오후에 친구네 부부가 남편 휴가인데 같이 저녁 먹자고 했다. 게임을 하고 있던 남편은 그 말을 듣고 약속 장소로 같이 나가긴 했는데 평소답지 않은 굳은 표정이었다. 물론 친구부부를 만나서는 식사도 잘하고 얘기도 잘했기에 난 오전에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했다. 그다음 날도, 휴가 마지막날도 중간에 뭔가 약속이 생겨서 잠깐씩 함께 나갔다 왔다.
휴가가 끝난 출근 전날, 남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혀 쉰 것 같지 않다며.
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여기저기 바람 쐬고 했는데 그게 왜 쉰 것 같지 않다는 건지... 남편의 한숨은 한동안 내 분노발작 버튼이 되었다. 내 딴엔 맞춰주려 노력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한숨을 쉬는 이 남자가 한없는 부정의 아이콘인 듯했다.
남편의 집돌이 기질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하나는 미리 얘기되지 않은 스케줄이다. 그는 갑자기, 불현듯, 즉흥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등의 상황을 굉장히 힘들어한다. 계획하고, 준비해서, 세세하게 실행하는 것이 그가 편안해하는 방식이다. 나는 결혼 전까지 극 P 기질이었던 지라 이 부분에서 신혼 때부터 많이 부딪혔다. 내가 장 보러 가서 예정에 없던 걸 충동구매 하거나, 약속을 갑자기 만들었을 때의 반응은 약한 불쾌감 표시 정도였다. 일 년에 한 번인 생일날 서프라이즈 생일파티와 생일선물에도 감동하기는커녕 당황스러워하고 생일 선물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콕 집어서 받길 바랐다. 놀라는 것도 싫고, 기왕 선물을 받을 거면 원하는 것을 받고 싶다는 그 방식이 실용적이기는 하나 낭만 한 스푼에 울고 웃는 내게는 너무 어이없었다.
그 방식에 적응하고 보니 미리미리 준비함으로 얻어지는 시간적 물질적인 효율의 맛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러기까지 순간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해 버리는 내 기질을 지그시 누르고 그와 합의하면서 한없는 서러움을 이겨내야 했음도 밝혀 둔다.
결혼하고 십 년 넘게 우리는 같은 주제로 싸우고, 이야기하고, 조율하고, 다시 언성을 높였다가, 화해하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극 J는 P의 성향을 조금 닮고, 극 P는 J의 장점을 받아들였다. 쉬는 날 I성향인 그를 가만 놔두기 위해, 난 나대로 집안에서 즐길 일을 만들었다.(그중 하나가 독서와 글쓰기이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난 죽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일 하다가 죽는 게 꿈이야."
"정말? 대단하다. 난 안 할 수 있으면 되도록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고 싶은데..."
가만, 이 소리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린데...
30년 지기 친구에게서 남편의 향기가 나는 게 익숙하고 웃음이 난다.
"네 성향을 오늘에야 이해하게 된 건 그 사람 덕이 크다. 덕분에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