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치나남 Jan 05. 2022

낯선 땅, 시즈오카 그리고 후지산

 나는 일본 시즈오카에 이십 대 후반에 갔다. 직장생활 오 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항상 마음속에 일본 유학을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현실적으로 직장과 결혼생활로 매여있어서 불가능했지만, 그 소망은 항상 내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본 외무성 초청 국제교류원 선발 공문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일본의 지자체와 외무성이 동아시아 공무원을 초청하여 국제교류원으로 활동하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나는 우리나라 교육공무원 대표로 갔다. 10개월간의 프로그램이었다. 

  교육청에서 선발을 위한 시험이 있었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문제가 나왔다. 한국어로 번역은 웬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어로 작문하는 것은 평소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힘들다. 

 나는 일본어 교사가 된 후,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했다. 일본 영사관에서 개설한 NHK뉴스반, 드라마반 등 국제교류기금에서 파견 온 원어민이 진행하는 수업을 수강했다. 의사소통이나 통·번역 과정까지 자유자재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받았던 수업이 결국 시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의 각 지방에서 온 공무원들과 도쿄에서 같이 연수를 받았다. 그 후, 혼슈, 시코쿠, 큐슈, 홋카이도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나는 혼슈에 있는 시즈오카현 종합교육센터에 배치되었다. 시즈오카현은 동경에서 신칸센을 타고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후지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즈오카현 카케가와시에 살게 되었다.

 카케가와시에 도착한 첫날이다. 마을 사람들이 낯선 땅에 빨리 적응하라고 홈스테이를 준비해 주었다. 마을 커뮤니티가 참 잘 되어있었다. 나 이외에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에서 온 교사 4명이 나와 같은 프로그램의 일행이었다. 

 외국인 신분으로 일본에 가니, 외국인을 만날 기회가 참 많았다. 어쩌면 일본인과의 교류보다도 외국인과 교류가 더 활발했던 것도 같다. 

 첫날 홈스테이를 하게 된 집은 미즈구치씨 집이었다. 부부가 에스테틱 가게를 운영하는 집이었다. 낯선 땅, 낯선 곳에서 첫날 밤을 보내게 되었다. 2층 방으로 안내받았다. 아침에 푹 자고 눈을 뜨니, 천장에 있는 유리 창문으로 눈이 부시게 햇빛이 쏟아졌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이 천장 유리 창문을 보았다. 낮잠을 잘 때 꿈속에서 본 천장 창문과 똑같았다. 꿈이 너무나 선명했고 같은 꿈을 두세 번 꾸었었다. 신기했다. 내가 모르는 우주의 비밀이 있는지, 무의식의 세계인지… 


 시즈오카현에 있는 유·초·중·고·대학까지 여러 학교를 견학했다. 현지 교사와 교류하면서 학생들에게는 한국의 문화를 가르쳤다. 시즈오카 공립 고등학교에 일반 교사와 함께 한 달 동안 근무도 했다.

 시즈오카에서 생활한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시즈오카종합교육센터에서 연수를 받고 있던 일본 선생님이 우리를 불꽃 축제에 초대했다. ‘마그도나르도’에서 보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당당히 말했다. 일본어로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레스토랑 이름인 줄 알았다. 그때까지 ‘맥도날드’를 일본어로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몰랐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어는 자음과 모임이 항상 붙어 다니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치’라는 발음이 안 된다. ‘기무치’가 되는 이유이다. ‘김[kim]’에서 [m] 이 단독으로 발음이 안 된다. ‘김치’라고 음성으로 알려주면 발음할 수 있지만, 일본어 문자로 배우면 ‘기무치’ 가 된다. 그래서 맥도날드가 ‘마그도나르도’와 같이 길어지게 되는 것이다.


 시즈오카현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 가서 한국문화에 대한 수업을 꽤 많이 했다. 그때 학생들과 교사가 가장 흥미롭게 듣고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한글이었다. 아이들이 한글 글자가 참 이쁘다고 관심이 많았다. 한글이 과학적이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한국의 한복, 전통놀이와 악기, 태권도, 요리 등 한국문화를 많이 소개했다. 

 그때는 아직 K-POP이나 한국의 드라마가 들어오기 전이다. 1996년이었으니. 정말 많은 차이가 났다.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부터 지금과는 달랐다. 국가가 경제적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개인이 아무리 백만장자라고 해도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의 한 사람만으로 본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속한 나라가 빈곤 국가면 그 사람도 빈곤한 사람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 이전에는 동북아시아에 있는 남북으로 분단된 아주 작은 나라로 세계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을 일본과 공동 개최하고 한국이라는 국가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다. 국내총생산 GDP가 10위가 되면서 외국에 나가면 한국 사람이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일본과 중국은 알고 있지만, 한국과 북한을 구분 못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속한 나라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선진국이 되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십 대 후반에 깨달았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원리가 그런 것 같다. 


 시즈오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후지산 3,773m에 도전한 일이다. 동남아 선생님이 가고 싶다고 하니까, 우리를 담당한 일본인 교사가 후지산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교사의 집이 후지시에 있었다.

 등반하기 전날 그 교사의 집에 일박하고 새벽 6시에 주먹밥 두 개를 싸 들고 출발했다. 꼬박 12시간 걸렸다. 내려오니 저녁 6시였다. 모두 기진맥진했다. 올라갈 때의 기상은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후지산은 만년설이다. 눈에 덮인 후지산은 특히나 멋지다. 후지산 주변으로 호수가 있어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정상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나무 한 그루 풀 한뿌리 없다. 흙과 돌로 덮여 있다. 

 우리 담당 교사는 자신이 후지시에 살아도 후지산에 처음 오른다고 했다. 왜 가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우리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래도 ‘남이 안 가본 곳에 가본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 같다. 아직 그 느낌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시즈오카현은 일본 녹차의 70%를 재배하는 곳이다. 후지산 만년설이 녹은 물의 영향 탓인지 물이 참 깨끗하다. 수돗물 그대로 마신다. 녹차 밭이 발달한 것도 그 영향이라고 한다. 

 우리가 어릴 때 보리차를 오차라고 불렀는데, 일본어로 녹차가 ‘오차’이다. 일본 사람은 그만큼 녹차를 우리가 보리차 먹듯이 많이 마신다. 특히, 시즈오카에서는 일상에서 마시는 물이 그냥 녹차다.

 시즈오카에서 보낸 십 개월은 어린 나이에 시작한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에서 쌓였던 피로와 힘겨움을 벗어나게 해 주었다. 성인으로서 독립한 느낌이었다. 모든 일을 나 혼자 판단해야 했다. 그리고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책도 많이 읽고 일본어 실력도 쑥쑥 늘었다. 나만의 평화의 시간이 다다미방에서 이루어졌다. 가족을 두고 온 마음의 짐이 하루하루를 더욱더 철저히 보낼 수 있도록 나를 압박하였다.      

 낯선 땅, 시즈오카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다시 없는 귀중한 시간이다. ‘시간 개념’이 확실한 것, ‘기본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은 정말 닮고 싶은 점이었다. 그리고 유·초등 기초기본 질서 교육이 참 단단하게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젊은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외국에 나가 살아보라고’ 여행과 직접 생활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으로 해외에 나가면 세계인과 만날 기회가 많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이 보이고 나의 나라가 보인다. 자신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외국어는 자신의 세계를 넓혀주고 개인의 성장을 촉진해준다.      나는 해외에 나가서 한글과 한국의 문화에 대해 강연하고 싶다. 내가 일본에 갔을 당시는 J-POP, 일본드라마, 일본애니메이션 등이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지금은 K-POP과 한국영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를 평정하고 있다. 변화한 세상에서 한글과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고 싶다. 너무나 당당하고 뿌듯할 것 같다. 

 나는 미래에 해외 교육기관이나 코이카 국제봉사단에서 일하고 싶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과 지금의 경험이 합해진다면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을까? 미래의 내가 인생에서 해야 할, 남아 있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책이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