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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n 21. 2023

4. 이게 나를 살릴거라는걸 이 때는 아직 알지못했다.

한국 | 세계일주를 잘못 준비하는 건에 대하여 2

출발점이 정해지면 그 뒤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냥 가면 되니까.

가서 알아보고, 가서 정해도 충분하다.

멕시코로 갔으니 남은 건 브라질까지 내려갈 뿐이다.

그리고 그 뒤는 브라질까지 간 다음에 고민하면 된다.


사실, 즉흥적인 나에게 계획적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길을 가다 예쁜 곳이 보이면 멈추기도 하고, 다른 길이 궁금하면 그 길로 가보기도 한다.

그게 내 스타일이었다.


스케줄이 정해져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프레셔였부담이었다.

계획과 어긋나는 순간 그 상황을 즐기지 못하고 초조해하곤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의해 일정을 바꿔야 할 경우도, 경로를 틀어야 할 경우도 생기고,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귀게 되어, 한동안 함께 여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혹은, 나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싫어 그 순간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첫 나라, 첫 도시만 정했다.

어디를 갈지가 정해지니 그 뒤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돈은 모으기가 힘들지 사용하는 건 쉬웠다.


  '먼저, 짐을 싸자.'


여행 짐을 싸기 위해 종이를 꺼내고 필요한 물건들을 적어보았다.


여권, 지갑, 신용카드, 배낭, 카메라, 옷가지, 신발, 속옷, 세면도구, 노트북, 외장하드... 등등

그 외에도 도난방지를 위해 가방 전체를 덮는 온갖 종류의 자물쇠와 배낭을 감싸는 와이어

물에 적셔 사용하는 물티슈에 종이처럼 뽑아 쓰는 비누, 혹시 모를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을 때 줄 한국적인 선물,

혹시 마실물을 못 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수약(그럴 일 없다. 물 구하는 게 제일 쉬웠다.)과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것까지 챙겼나 싶은 쌍안경(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도둑맞았다.)에 맥가이버칼까지.

(심지어 맥가이버칼은 20만 원이 넘는 물건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이 우리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비록 한국에서는 맨날 욕하고 못살겠다 하지만 해외만 가면 애국자가 된다는 것을.

해외에 나가있는 기간과 애국심은 비례하며, 스스로가 한국인임을 표현하고 싶은 굿즈(?)를 하나씩 챙길 것이다.

그랬다. 그 애국자가 나였다.

나는 그렇게 국뽕(?)에 차올라 태극기 모양의 여권커버를 구매했다.


제발. 혹시라도, 세계일주 혹은 장기여행. 아니, 그냥 여름휴가로 해외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내가 한국인임을 알 수 있는 물건은 최대한 피하길 바란다.

특히, 나처럼 여권커버를 태극기로 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런 모든 물건들이 해외에서는 '부디 나를 털어주세요.'라는 어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대한민국 여권 파워는 전 세계에서도 1, 2위를 차지할 만큼 외국인들에게는 군침 도는(?) 물건이다.

여권커버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가능하면 여권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을 추천한다.


3년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 당시, 내가 산 물건들의 대부분은 쓰레기였다.

평소에 쓰지 않는 건 외국에서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젠가 쓰겠지 하고 계속 들고 다니다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버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부족한 건 현지에서 구매하면 된다.

선진국이던, 개발도상국이던, 대도시던, 깡촌시골마을이던,

어느 곳이든 사람 사는 곳이고, 그런 곳에는 우리가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조달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나는 '만약에'와 '혹시라도'를 오백 번쯤 외치며 짐덩이들로 배낭을 채워나갔다.

('짐을 싸자'와 '짐덩이를 싸자'는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그렇게 출발 전 내 배낭은 25킬로가 훌쩍 넘었다.

심지어 메인 배낭의 무게가 이렇고, 귀중품이 들어있는 작은 배낭까지 포함하면 30킬로 가까이 됐다.

(지금이라면 어떤 것이 유용하고, 어떤 것이 필요 없는 물건인지 알기에 다시 여행한다면 15킬로 전후로 배낭을 쌀 수 있을 것 같다.)


잡다한 용품과 옷가지, 신발, 세면도구 등으로 큰 배낭을 얼추 채우고 작은 배낭을 쌌다.

큰 배낭보다 작은 배낭 쪽이 짐은 더 적지만 더 많이 신경을 썼다.

미러리스 카메라와 렌즈, 액션캠, 노트북에 외장하드, 지갑, 여권, 핸드폰 등등

카메라를 쉽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고, 전자장비를 잘 보호할 필요가 있기에 배낭 선택을 신중히 했다.

(여담으로 귀중품을 넣는 가방은 앞에 매고 다녔는데, 이후 3~4번 정도 바뀌었다.)


그러다 문뜩 핸드폰에 눈이 갔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은 액정이 깨지면 더 이상 터치가 되지 않는 모델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소지품 중 하나인 핸드폰이 먹통이 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랍 깊은 곳에 넣어둔 전에 쓰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완전 초기 모델이었지만 다행히 작동은 되었다. 비록 많이 느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비의 개념으로 챙기는 것이었기에, 가급적 자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옷을 넣어둔 오거나이저 파우치 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어디까지나 핸드폰 액정이 깨졌을 때, 새로 핸드폰을 구매하기 전까지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예비로 챙겨둔 구식 스마트폰.



이게 나를 살릴거라는걸 이 때는 아직 알지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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