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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n 14. 2023

1. 나의 아버지는 보수적이었고, 무서웠고, 쿨했다.

한국 | 당신의 가족은 당신의 장기 여행을 허락하시나요?

나의 세계일주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 가족 이야기를 빠트릴 수 없을 것 같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고, 유학 중에 어머니와 결혼하고 일본에서 나를 낳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참 자상한 분이었다.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공원에서 나와 캐치볼을 하며 틈틈이 놀아주시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유학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한국어를 모르던 나는 학교에서 매일 눈물로 옷소매가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온 학생이라는 것은 당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는 참 흥미로운 소재였던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일본인은 그렇게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심지어 화장실 소변기를 사용하는 것까지.

그럼에도 곧잘 적응했는지, 2학년이 되던 해에는 친구들과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어있었고, 친한 친구들도 생기기 시작했었다.

받아쓰기를 못해 매번 빡빡이 숙제를 해왔던 나는 누구보다 맞춤법을 잘 아는 아이가 되어있었고, 성적도 좋았다.

아마 이때부터 나의 강한 생존력과 적응력이 길러진 것이 아닌가 이 글을 쓰다 문뜩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가 보수적이고, 무서워진 건 내가 중학생이 되고나서부터였다.

중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간 나는 그때부터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시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나의 아버지도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안정된 직장을 가지길 원하셨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뭐든지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나는 죽어라 공부만 안 했다.


딱히 사춘기라 반항할 생각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냥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몰랐고, 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열심히 놀았느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노는 방법도 몰랐기에, 그냥 살아있었다.


그렇게 내 성적은 고등학교까지 계속 우하향 그래프를 그렸고,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아버지에게 초주검이 되는 날이었다.

성적표를 보고 너무 화가 나신 나머지 저녁 내내 나를 혼내시다 밤이 늦어 자러 가라 하셨다가 그 이후에도 화가 풀리지 않아 자고 있는 나를 집밖으로 내쫓으셨던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더 이상 자상한 분이 아니셨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나는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했다.

학군사관후보생(ROTC) 시절을 거쳐 2012년 3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신기한 건 이렇게 보수적이고 엄한 집안과 반대되는 자유로운 나의 성격이었다.

나는 맞아 죽어도 할 말은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건 해야 했다.


대학생 때 세계일주가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전역을 앞두고 동기들이 취업을 준비할 때, 나는 세계일주를 준비했다.

카메라를 사서 동네 시장에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와 세계일주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50L짜리 배낭을 사고, 각종 생존용품(?)들을 구비해 갔다.

그리고 편도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출국은 추석 다음날.

장기 여행을 떠날 건데, 친척들 얼굴은 한번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나의 세계일주 준비는 은밀하게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2014년 6월 30일 전역을 명 받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드디어 우려했던 순간이 왔다. 아버지께서 나의 장래에 대해 물어보신 것이다.


  "너 이제 전역했는데 뭐 할 거냐?"


초조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수백 번 시뮬레이션했지만 역시 상상과 현실은 달랐다.


사실, 세계일주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가족들의 허락이었다.

성인인데 굳이 가족의 허락이 필요한가 싶지만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물며 보수적이고 무서운 우리 아버지에게 어찌 말하랴.

몇 개월 동안 여행을 준비했지만, 쉽사리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순간까지 미뤄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선수는 저쪽에서 먼저 쳤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르는 것뿐이다.

누가 그랬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잠깐 여행 좀 하고 오겠습니다."

 

긴장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당당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괜히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


  "어디 갈 건데?"


  "지구 한 바퀴만 돌고 오겠습니다."


조금 아차 싶었다. 너무 추상적으로 이야기했나? 조금 더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는 톤으로 했어야 했나?


  "얼마나?"


  "한 일 년 반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년을 넘게 곁에서 지켜본 가족들이기에 예상된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너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외국 나가서 놀생각만 하냐!'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공부해서 안정된 직장에 취직할 생각이나 해라!'


위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맞아 죽어도 할 말은 해야 했고, 하고 싶은 건 해야 했다.

나는 반드시 세계일주를 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잃어버릴 각오로 말했고, 오늘이 가족들을 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었다.


  "그래 알겠다. 잘 다녀오너라. 혹시 우리가 도와줄 건 없느냐?"


  "아버지께서 아무리 안된다 하셔도... 네? 어..? 저.. 갔다 와도 돼요?"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생각한 백사십다섯가지 시나리오에 이런 전개는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조금 더 격렬하고 조금 더 극적이고 조금 더 구차했어야 했다.


  "그래 다녀와라. 뭐 필요한 거 없나?"


  "아.. 네... 준비는 다 했고요... 이제 출발만 하면 됩니다..."


나는 누구보다 우리 아버지를 잘 안다고 자부했었지만,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 순간 내가 본 아버지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아버지와는 다른 분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보수적이었고, 무서웠고, 쿨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ue. 그렇게 나는 무소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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