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Review.
뻔한 사랑과 우정에 퀴어 소재만 가미되었을 뿐인데,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때론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타인’과의 거리가 우릴 아프게 하지만, 다들 그저 그렇게, 크게 특별할 것 없이 각자의 치열함 속에서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어느 긴 새벽, 나 혼자만 깨어있다는 사실에 불안함을 느끼는 와중에, 불 꺼진 수많은 건물들 속, 자그마한 불을 내고 있는 어느 집, 어느 가게가 그 새벽에겐 엄청난 안도감과 위로를 주는 것처럼, ‘대도시의 사랑법’도 나에겐 그러했다. 아침이 오지 않을 것처럼 길고 긴 새벽, ‘나도 여기에 살아있어요.’ 하는 듯한 작고 여린 하나의 불빛, 초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빛을 내고 있다는 신호, 암묵적인 믿음.
그뿐이면 충분했다. 상처 받는 우리 세대를 위로하기에도, 영화에 내 진심을 내던지기에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
소수의 집단이 차가운 도시를 살아가는 방법과, 결국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음을 담백하게 담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2024년 10월에 개봉한 김고은, 노상현 주연의 영화이다.
해당 영화는 2022년 부커상 인터네셔널 후보작으로 오르며, 큰 관심을 받았던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되었으며, ‘탐정 리턴즈’를 연출한 이언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는 박상영 작가의 원작 동명 소설 중 한 챕터인 <재희>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줄거리 : (약간의 스포 포함)
남 눈치 볼 시간에 연애나 더 하는 게 낫겠다고 단언하는, 쿨내 풀풀나는 여자, ‘재희’와 세상이 정해놓은 잣대에 맞춰 자신을 숨기고 사는 성 소수자 ‘흥수’가 만났다. 영화에서는 이들의 첫 만남이었던 스무 살을 시작으로, 30대가 되어, 결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약 13년간의 스토리를 함축적으로 담는다.
스무 살, 재희와 흥수는 대학 신입생 시절, 과 동기로 처음 만난다. 입학 후 얼마되지 않아, 재희는 모종의 사건으로 학교의 공식 ‘미친 여자’로 낙인 찍히고, 이태원에서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던 흥수는 하필 그 모습을 미친 여자, 재희에게 들키고 만다. 흥수는 재희에게 자신의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했지만, 재희는 학교에서 도는 소문으로부터 흥수를 지켜주었고,그런게 뭐 약점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그렇게 자연스레 둘은 ‘친구’가 되었다. 둘의 취향은 이상하리만큼 잘 맞았고, 서로를 별 나다고 생각할 겨를없이 미친 듯이 청춘의 낮과 밤을 즐겼다. 그들이 짧은 시간 내에 절친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 별다른 편견없이 서로를 ‘구재희’, ‘장흥수’. 본연의 모습, 그 자체로 바라봐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친구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교내에선 둘이 교제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둥, 결혼을 했냐는 둥의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주변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이 둘은 발칙한 동거를 시작한다.(동거의 이유도 특별할 건 없었다. 혼자 살기엔 서울의 집값이 너무 비싸니까..)
모든 할 수 있었던 스무 살을 지나, 스물하나, 스물둘, 둘은 진정한 사랑을 만났고, 그 사랑에 배신도 당해보았고, 누군가가 사무치게 보고 싶은 사랑의 감정을 배우고, 또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도시는 낭만에 죽고 사는 그들에겐 한없이 차가웠고, 자유롭다는 이유로, 평범의 기준에 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들으며, 상처받았고, 그만큼 아팠다. 물론, 그러한 삶 속에서도 서로가 늘 곁에 있었기에, 또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어느 날, 흥수와의 동거 사실을 재희의 남자친구에게 들키게 되면서 영화에선 조금의 반전이 일어난다. 흥분한 남자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재희는 흥수가 게이라는 사실을 밝혀버리고, 흥수에겐 쉽지 않았던 커밍아웃이자, 최대의 비밀이 재희로 인해 이때, 처음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다. 흥수에겐 그토록 어려웠던, 인생의 숙제가,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겐 쉽게 내뱉는 말 한 마디 뿐이라고 느낀 흥수는 괴로워한다. 이 과정에서 둘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결국, 서로를 지키고 지지할 수 있는 것은 서로뿐임을 깨닫게 되고, 흥수에겐 세상에 한 발자국 나아갈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된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줄거리지만, 재희와 흥수, 이 둘이 여차저차 어영부영, 안 굴러갈 듯, 어찌 저찌 굴러가는 인생을 지키는 모습 자체가 얼마나 아름답고, 아픈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반짝임이 보여질 것이다.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난 이들의 사랑과 우정’ :
단순히 퀴어의 삶을 보여주기보다는 청춘들의 희로애락과 함께 담아 더 아름다운 영화였다. 영화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난 이들의 사랑과 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조금은 달라 보일지라도, 어쨌거나 세상은 돌아가기 마련이고,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으며, 어쩌면 세상이 꽂는 비수보다 내가 스스로 만드는 벽이 나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적당한 무관심과 안일함은 세상을 조금 더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삶을 쥐어 잡고 있다는 것.
영화를 보고 난 후 크게 느낀 것은 이게 전부였지만, 이때문에 ‘대도시의 사랑법’ 이라는 영화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
‘네가 너인 게 어떻게 네 약점이 될 수 있어.’
흥수의 비밀을 알고난 후, 술 한잔을 기울이며 재희가 흥수에게 전했던 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가진 것들 중, 유독 마음에 안 드는 모습들을 스스로 약점화 하려한다. 어쩌면, 어떤 비수들이 다가올지 알기에, 그리고 그 비수가 얼마나 아플지는 감히 예상하지 못하기에, 스스로를 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상처에 대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그래서 더욱이 삶에 정답은 없다. 그게, 이 제한된 지구라는 공간에, 인구가 60억 명이나 되는 이유니까. 하지만 공동체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능력보다 집단에 의한 동기부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우리에게 ‘소수자’가 되는 일은 스스로를 야생으로 몰아 넣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다. 생존할 자신이 없다면, 함부로 ‘비정상’이 되는 일은 피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깊게 박히는 사회적 낙인은 불가피하다.
영화 속에서 재희는 이렇게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며, 그 틀에 자신을 가두며 살았던 흥수에게 세상엔 어두운 새벽뿐만 아니라, 따뜻한 낮도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재희의 말에서 난 퀴어의 ‘숨겨진 새벽’에 대해 고찰하게 되었다.
‘퀴어’를 바라보는 시선 :
관련 논문을 보면, ‘퀴어’라는 것은 사실 사회에서 성적으로 억압당하는 동성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립하는 ‘정체성의 정치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묘한, 괴이한’이라는 뜻으로, 동성애 혐오를 드러내던 ‘퀴어’를, 동성애자들이 스스로를 호명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의미가 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 동성애에 국한되지 않고, 후기 구조주의적 이해를 바탕으로 인문 사회과학의 이슈들과 이론적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담론의 장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고 한다. 영미권만큼은 아니지만 현재 한국에서도 퀴어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반면, 관련 작품들의 등장으로 퀴어에 대한 비평이 끊이지않는 것도 사실인데, 최근 들어서는 콘텐츠에서 보여지는 퀴어 담론의 양상 조차도 많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대개 문학과 영화에서 퀴어 담론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첫 번째는 ‘퀴어’ 자체를 소재주의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퀴어 문화가 단순히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소재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2005년 개봉 <왕의 남자>가 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대체적으로 성 정체성에 대한 맥락을 배제하며, 이러한 사고는 이성애 중심주의에 일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호모포비아적 사고)
하지만, ‘정체성의 정치학’을 기반으로 퀴어를 재현한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경우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다룬다. 또한 게이라는 분류를 따로하지 않기 때문에 기존 멜로 드라마라면 그 장르가 가지고 있었던 로맨스 주체를 게이로 전환하는 것. 그 뿐이다. 대도시의 사랑법도 이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하지만 퀴어 연애 편견 조장 위험 있다는 비판이 따르기도 한다는 것이 우려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Best Scene & 우려되는 점 :
비록 짧게 스친 장면이지만, 재희가 회사 회식 자리에서 무례한 말을 하는 상사에게, “왜 작은 거에 목숨 거냐고 하시지 말고, 제발 좀! 쟤한테는 그게 목숨만큼 소중한가 보다 하시면 안 돼요?”라고 일침을 가하는 장면과, 밤길이 위험하다고 걱정하는 남자 선배에게 ‘선배나 일찍 들어가세요. 남자들이 일찍 들어가면 여자들이밤길에 위험하겠어요?’ 라고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비교적 이 장면들과 대사가 꽤나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해당 부분은 예상치도 못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재희의 말은 누구나, 누군가에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이 말은 즉,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완전히 괜찮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처럼 보였다. 재희의 말 대로라면, 이 세상 그 누구나 비정상도 아니고, 그 누구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며, 그래서 더욱이 퀴어 관련 문제는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의도를 전달하고자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는 자칫 남자만을 위험한 존재라고 치부하며, 성차별적인 배경을 의도적으로 과하게 설정했다고 비춰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동성을 좋아하는 흥수를 제외하고는 해당 영화에서 재희의 전 남친은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폭행을 행사했고. 다수의 직장 남자 상사들은 흔히 말하는 ’꼰대‘ 의 모습으로 드러났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이 적용된 거라고 굳이 비판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만큼 연출하고 싶었던 바가 어떤 것인지 그 느낌이 확실히 와닿은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연출 :
감독의 연출 또한 주의 깊게 볼만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한 단락만을 그려내기보단, 인간이 성장하는, 그리고 성장할 수 있었던 과정을 짧은 러닝타임 내에 알차게 담았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시절 처음,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느낀 흥수가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기까지는 영화 내 전개상 10년 정도의 세월이 걸린다. 그만큼 본인에 대한 충분한 확신이 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랫동안 비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와 세상에게 설명하고 해명할 방법을 마련해야 하는, 충분히 긴 시간 동안의 고민들의 무게가 스크린 밖으로도 묵직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특히나 재희의 결혼식 씬에서 흥수가 재희에게 불러주는 마지막 노래의 가삿말이 전반적인 두 사람의 서사 마무리를 깔끔하게 담아낸 것 같아서 감탄스러웠다. 감히 상상도 못했던 곡의 삽입이 제법 큰 여운과 울림을 주었고, 삽입곡 선정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부분이다.
개인적인 평가 :
‘퀴어’라는 것 자체가 세상과 타협 해야하는 본인들에게 어렵고도 무거운 문제인 만큼, 콘텐츠를 통해 가볍게 풀어낼 수 있다면, 그들의 부담도 조금은 덜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자체가 영화를 굉장히 사랑스럽게 풀어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퀴어에 대한 고착화된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적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커밍아웃의 차원에서도 조금은 더 용기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했던 것 같다. 이 문화 자체를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도록 힘썼다는 느낌이 영화 곳곳에 깃들어었다.
그냥 이 도시의 평범한 청춘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로 과도하게 미화되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미화된 건 퀴어에 대한 인식이라기보단, 재희와 흥수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것 자체 아닐까? 진심으로 서로를 바라봐주는 친구를 만난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꽤나 극적인 일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감할법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재희 같은 친구가 있지 않고서야, 그런 배경이 있지 않고서야,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용기를 내기 힘든 퀴어의 상황을 관객들에게 생각할거리로 남겨둔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에게도 이 영화는, 딱히 옳고 그름을 따질 순 없겠지만서도 어떻게 하면 성 소수자들이 이 사회에서 덜 아파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사랑도 온전한 사랑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를 개인적으로 고민하고 고뇌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이나 개선할 점은 무엇인가? :
사실, 재희의 삶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영화에서는 재희가 남의 평가에 굴하지 않는 ‘쿨녀’로 보일 수 있지만, 현실에선 재희와 같은 친구들에게 정당한 발언권과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때론 적당하게 굽힐 줄도 아는 것이 이 도시에 적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다소 간과했거나, 혹은 해피엔딩을 위해 일부러 배제한 것일 수도 있겠다. 좋게 말해 쿨한 것이지, 유흥에 빠져 인생을 막 사는 것이라고도 극단적으로 보여질 수 있어서 아쉬운 부분이었다. (누군가가 재희의 삶을 보고 동경하게 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재희라는 캐릭터에게는 흥수에 비해 너무 관대한 삶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본인의 행동에 대한 과오가 아닌, 자신의 올바른 삶 속에서, 타인과 조금 다른 생각으로 주어지는 아픔을 다뤘다면 더 깊게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방탕한 삶 속에서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일에 대해 반항하는 것은 흥수의 입장에선 사실상 지극히 이상적인 삶이니까 말이다.
TO. next :
회피하고 방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현재의 삶에 확신이 없어 내일의 뜬 눈이 걱정되는 이들에겐 더욱 간절히.
매듭 :
청춘들이 세상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는 늘 희망적이었다. 내일을 살아가게 했고, 오늘을 위로했다. 젊음을 오롯이 본인의 것들로 만들었던. 그래서 그만큼만 아파할 수 있었던. 재희와 흥수, 그 청춘들의 13년과, 그 13년을 배경 삼아, 이젠 본인의 삶과 주변의 것들까지 어느 정도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된 30대의 흥수가, 재희를 보내며 했던 마지막 말은 이 영화를 명작으로 꾸며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나인 채로 충분하다는 걸 알려준 내 20대의 외장 하드. 잘가라. 재희야.”
사진 출처: <대도시의 사랑법> 공식 포스터 및 스틸컷 사용
출처: Kiss 논문. ‘퀴어와 연애하기 – 문화 정치학으로 본 영화 <줄탁동시> 와 소설 <뼈도둑>. 최다정. 2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