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실용적이면서 확실한 사랑
“많이 먹어라”

by Oscar Jung

오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문득 들려오는 인사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식판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가는 인사들. 누군가는 "맛있게 드세요"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많이 드세요"라고 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하루에 한두 번쯤은 주고받을 그 흔한 말이 오늘따라 유독 낯설고 무겁게 다가왔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인사는 연령대에 따라 미묘하게 갈렸다. 젊은 직원들은 주로 '맛'의 즐거움을 빌어주는 "맛있게 드세요"를 썼지만, 연배가 있는 분들의 입에서는 어김없이 "많이 드세요"가 나왔다.

나는 부모님과 어른들에게 "많이 먹어라"를 수없이 듣고 자란 세대다. 그 차이가 새삼스레 마음을 건드렸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많이 먹어라"는 투박한 말이 사랑의 표현이라니. 사랑이라면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고, 직접적인 단어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 "많이 먹어라"는 아주 오래된 방식의 사랑이다. 말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말보다 먼저 살아남아야 했던 시대가 남긴 사랑이다.

생각해 보면 참 슬픈 역사의 유산이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실존하던 시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생존의 전부였던 때에나 어울릴 법한 인사니까. 맛을 음미하라는 서구의 "Enjoy your meal"과 달리, 우리는 양껏 배를 채워 살아남으라는 비장한 주문을 서로에게 걸어왔던 것이다.


나는 보릿고개를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다. 그 계절의 배고픔이 매년 돌아오던 시절의 공기를 몸으로 기억하진 못한다. 그런데도 내 귀는 어릴 때부터 그 시절의 잔향을 들으며 자랐다. 밥상머리에서, 주방에서, 누군가의 한숨 뒤에서 "많이 먹어라"는 늘 같은 톤으로 내려왔다. 때론 명령 같았고, 때론 잔소리 같았지만, 그 말의 바닥을 더듬어보면 늘 같은 결론에 닿았다. "지금 먹을 수 있을 때 먹어둬라. 세상은 언제든 다시 너를 굶길 수 있으니."

그 말에는 희한한 시간 감각이 있다. 현재의 밥그릇을 보면서 동시에 미래의 결핍을 함께 보는 눈. 풍족함이 당연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배부름을 잠시 허락된 행운으로 여겼다. 그래서 "많이 먹어라"는 배를 채우라는 말이 아니라, 삶을 채우라는 말이었다. 몸에 연료를 채워두라는 당부였고, 마음에 안전을 조금이라도 비축해두라는 간절함이었다.


마치 동물들이 긴 겨울잠을 자기 전 본능적으로 몸을 불리듯, 우리 민족에게는 '평온할 때 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DNA가 깊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전쟁, 가난을 겪으면서 "눈앞에 있는 이 밥 한 끼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불안이 "많이 드세요"라는 인사로 굳어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친구를 만나면 습관적으로 건네는 "밥 먹었니?",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도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영어권의 "How are you?"가 기분이나 상태를 묻는다면, 한국의 안부 인사는 '끼니를 거르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를 확인하는 생존 신고에서 비롯되었을 테니 말이다. 거기엔 "내 밥그릇을 덜어서라도 당신의 허기를 채워주고 싶다"는 한국인 특유의 정(情)과 공동체 의식이 서려 있다.


보릿고개는 전설이 되었지만, 그 말은 우리 안에서 계속 자란다. 사랑은 항상 아름다운 어휘로만 오는 게 아니라는 걸, 때로는 밥알처럼 소박하고 묵직한 형태로도 온다는 걸 알게 해주니까. 내게 "많이 먹어라"는 결국 이렇게 들린다. "너는 꼭 살아남아라. 너의 오늘이 끊기지 않게, 너의 내일이 마르지 않게."


그리고 그 말은, 이상하게도 지금도 유효하다. 세상이 풍족해진 만큼 불안은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오고, 마음이 허기질 때는 여전히 따뜻한 밥 한 끼가 사람을 붙잡아 준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밥을 권할 때, 그 말이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오래된 사랑은 대개 가장 실용적인 형태로 남는다. 따뜻한 밥을 앞에 두고 하는 사랑은, 늘 조용하지만 가장 확실하다.

"많이 먹어라."

"콩 한조각이라도 나눠 먹어야한다"

그건 단순히 배를 채우고 나누라는 말이 아니라, 너라는 사람을,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지키고 싶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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