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막 : 김 사장의 우울증 약 >
일상의 바쁨에 서로 시간을 못 내다가 오래 간만에 후배 명오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김사장이 오늘 한 잔 하자는데요. 나도 시간 될 거 같고 호텔에 4시 반 쯤 갈 거에요"
시계를 보니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야~ 4시 반이면 해가 쨍쨍인데, 해는 져야 마시지, 해가 중천인데 술이 들어가냐?, 잠깐만 오늘 일몰 시간이...5시 반이니깐 그 시간에 맞춰서 와라, 그리고 나 내일 아침 일찍 미팅인데...흠...."
그러자 명오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일찍 마셔야지"
난 여태까지 해가 떠 있는 시간에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다. 아마 두 어번은 있을 것인데, 해가 쨍한 시간에 술을 마시고 있으면, 나에 대해, 가족에 대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일에 너무 열중하던 습관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원칙들을 오랜 세월 붙들고 있는 나도 좀 우습게 느껴졌다. 그까짓 원칙들이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다고...이제 젊은 시절의 그런 알량한 의지쯤은 좀 덜어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니네 마음대로 해라. 4시 반에 보자"
손님이 없는 이른 시간, 골목의 작은 횟집에 나, 후배 명오, 김사장 이렇게 우리 셋은 둥근 테이블에 앉았다.
가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강한 햇살에 여전히 그 오래된 죄책감을 다시 불러들였지만, 그런 중년의 윤리적 감수성 조차 이미 소맥을 몇 잔 마신 후엔 그런 생각들은 저 저물어가는 석양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횟집 사장님이 오래간만에 오셨다면서 메인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서비스로 내어 놓은 싱싱해 보이는 멍게 몇 점과 소맥 몇 잔으로 해가 지면서 우리는 서서히 취해가고 있었다.
명오는 혼자 잔을 들며 말했다.
“아… 나는 이렇게 해가 질 때 쯤 이미 이렇게 취해 있는 게 참 좋아.”
그 말투엔 묘하게 묵은 슬픔이 스며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딱히 불러주는 이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나이.
어쩌면 명오가 사랑한 것은 술이 아니라, 잠시 책임에서 벗어난 '술'이라는 그 어떤 ‘틈’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지쳐보이던 김사장은 벨이 울리는 전화를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사이, 명오와 둘이 몇 잔의 술을 마시고 있는데, 김사장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들어 오더니 혼자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반반씩 가득 채우더니 그걸 한번에 들이키고 잔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나 오늘 술 마시고 차라리 죽어야 할 거 같다. 와..씨..분명 어제까지 마누라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거든, 근데 오늘 기억이 안 난거야...와~ 씨...하...내가 우울증 약을 먹고 나서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거 같아...하...어떻게 하지"
나는 김사장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아니, 지금이라도 얼릉 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해야지... 죽고 싶어?..얼릉 가.."
명오도 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래, 죽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가야지"
김 사장은 체념하 듯 말했다.
"아니야...이미 상황은 X 됐어...난 오늘 끝났어... 지금 딸 내미 한테 전화가 온거야. 엄마가 너무 서운해 해서 자기라도 학원을 빠지고 집에 가야 할 거 같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너 괜히 학원 가기 싫어서 명분 만들지 말고 학원 가라, 너 까지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리고 마누라 한테 전화를 했더니 화가 잔뜩 났는지 전화를 안 받아, 오늘 차라리 술을 죽을 때까지 마시는 게 차라리..아 모르겠다..씨바...그 놈의 우울증 약이 문제라니깐" 그러면서 내가 채워 준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잔을 내려 놓은 김 사장은 말을 다시 이어갔다.
"아...내가 말 안 한게 있어, 내 정수리 봐봐...이 우울증 약의 부작용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이 약을 먹고 나서 정수리에 머리가 난다니깐..봐...수북하지?"
김 사장이 내미는 정수리 부분을 확인한 명오와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머리 숱이 휑하던 김 사장의 정수리가 까맣게 머리 숱이 수북 해진 것이었다.
나는 고개 숙인 김 사장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와...그 우울증 약 이름이 뭐야?, 와..신기하네... 야...명오야 이건 니가 진짜 먹어야 할 약인 거 같은데, 이거 짱이다. 진짜 수북하네"
명오도 김 사장의 정수리를 확인하며 "오..진짜네...수북해졌네... 김 사장, 이 약 이름이 뭐야?" 라고 말했다.
김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그게...그걸 알 수가 없는게 병원에서 준 약 봉지안에 전립선 약도 있고, 우울증 약도 섞여 있다는데 그걸 의사가 안 알려줘, 내가 알려달라고 했더니 그냥 우울증 약의 부작용이라고 하는데, 절대 안 알려줘...그것만 더 먹을 까봐 안 알려준데나, 암튼 그 약 때문에 단기 기억 상실증도 오고 머리숱도 돌아오고...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것다. 에효..."
기억은 사라져도 머리카락은 돌아오는 기묘한 균형.
나이 든다는 건, 이런 우스꽝스러움과 슬픔이 한 몸처럼 엉켜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그 약들을 다 흩트려 놓고 사진을 찍어서 '챗 지피티' 한테 물어봐, 이 중에 우울증 약이 어떤 거냐고, 알려줄 수도 있어.하하하"
그 말을 들은 김 사장은 기발한 생각이라며 내일 그렇게 해보고 명오에게도 알려주겠다고 하며 씩~웃는데. 방금 전 아내의 생일을 잊은 괴로움에 일그러졌던 김 사장의 얼굴에 활짝 핀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며 우리는 흥겹게 다시 잔을 들었다. 뭐 남자들이 다 그렇지...에효...
< 2막 : 명오의 간식 >
일몰의 노을빛이 가게 창가를 통해 내 소주 잔에 스며들었다.
우린 셋 다 말없이 잔을 채웠다.
해는 이미 졌고, 누군가의 하루도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명오가 대뜸 말했다.
“내 말좀 들어봐… 엊그제 밤 10시쯤 집에 갔더니 말야, 집 안이 어떤… 고소~한 냄새에 꽉 차 있는 거야.
근데 식탁엔 아무것도 없어. 주방도 멀쩡해.
이상하다 싶어서 세탁실 분리수거함에 갔더니 피자 박스랑 기타 등등 박스들이 꽉 차 있더라고.
이것들이… 나 없을 때 지들끼리 다 먹고 흔적을 없앤 거야.”
나는 바로 말했다.
“야, 그건 니가 늦게 올 거 아니까 그냥 시켜 먹은 거지. 그거 가지고 삐지고 자빠졌냐? 하루 이틀도 아닌데.”
얼굴이 벌게진 명오는 더 붉어지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뭐 시킬 거면 ‘아빠도 먹을래?’ 전화 한 통은 할 수 있잖아…내가 그런 군것질 잘 안 먹는것도 알텐데..”
그때 김사장이 잔을 들며 빅엿의 한 마디를 날렸다.
“전화하면… 진짜 먹는다고 할까 봐, 안 한 거야.”
나는 순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하하하~야… 그건 너무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짜 먹을까봐?”
그런데 김사장은 진지했다.
“진짜라니까. 아빠가 먹는다고 하면 추가로 더 시켜야 하잖아. 돈도 더 들고 또 많이 먹기도 할거고
그러니까 진짜 먹는다고 할까 봐 안 한 거라고.”
김사장의 빅엿을 온 몸으로 맞은 명오는 순간 말이 없어지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세로로 찢어서… 먹기 시작했다.
쫀드기였다.
그것도 비닐도 없이 맨쫀드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형도 먹을래?”
명오는 다시 세로로 찢은 쫀드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손에 든 소주잔으로 찢어진 쫀드기를 툭 치며 말했다.
“저리 치워~ 야~ 아무리 그래도 비닐에 좀 싸가지고 다녀라.
그걸 그냥 생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냐… 하…”
“그거 나 줄 생각은 하지도 말어.”
김사장도 한 마디를 보탰다.
명오는 소주를 한잔 마시고 쫀드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말했다.
“이게 이 안 좋은 사람 입에… 살짝 녹여 먹기 좋아, 금방 말랑말랑해지거든”
나는 안주로 나온 도다리회를 초장에 찍으며 말했다.
“명오야, 비싼 도다리회 앞에 두고… 굳이 그걸 먹어야겠냐, 하… 넌 진짜 노답이다, 노답.”
그렇게 우리는 이미 어두워진 세상을 마주하며 취해갔다.
세상일에 대한 죄책감도,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일몰 뒤 첫 잔처럼 잠시 따뜻하게 녹아들었다.
< 3막 :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슬픔 사이 >
중년이 되면, 삶의 리듬이 바뀐다.
다이내믹하고 불규칙했던 감정의 물결이 차츰 잦아들고 대신 잔잔함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잔잔함 위에서 슬프다고 말할 정도는 아닌데,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큰 사건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세상이 조용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젊을 때는 이런 고요함을 동경했다.
일이 쌓여 있고, 사람에 치이고, 다음 주, 다음 달이 어떻게 굴러갈지 몰라 하루하루가 파도처럼 들이치던 시절엔
고요가 곧 평화라고 믿었다.
그래서 어쩌면 중년의 조용함이 낯설고, 때로는 외롭고, 가끔 가라앉는 느낌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내가 뭘 잃은 걸까?”
하지만 잃은 건 없었다.
그냥 주변의 소음이 멈추니까, 내 마음의 빈자리가 드러났을 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담배를 한 대 피우는 사이, 창을 통해 가게 안를 보니 명오와 김사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어대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난 혼잣말로 되네였다.
"뭐든 적당한게 좋은 건데, 저 XXX은 적당히라는 게 없어.."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어느새 둘 사이 대화의 화제는 '여행'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 김 사장을 놔두고 와이프와 딸아이가 대만 여행을 다녀왔는데, 또 그 둘만의 일본 여행 계획을 짜고 있다는 짜증 섞인 하소연을 늘어 놓고 있었다.
"아니, 도대체가 돈 귀한 줄을 몰라요.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맨날 돈을 쓸 생각만 하고 사냐고..참 나..지금 환율 때문에 나는 벌어도 버는 게 아니라구, 거래처에서 가격 인상 안 받아주면 난 완전 마이너스인데 이것들은 맨날 돈만 쓰러 다니고 나는 돈 버는 기계야, 기계..."
그런 푸념을 늘어 놓으면서 김 사장은 연거푸 소주를 마셔댔다.
나는 그런 김 사장에게 말해주었다.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여 이번 생은 노예 인생으로 끝났다. 그런 마인드 말이야, 버는 사람이 있으면 쓰는 사람도 있어야지, 그래야 경제도 잘 돌아가고 말이지, 그 돈 쓰는 재미 말이야, 그 재미가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니거든, 근데 명오 니네 가족도 어디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냐?"
내 말을 들은 명오는 여전히 쫀드기를 오물오물 거리며 말했다.
"지들 끼리 일본 간지 며칠 됐어요. 이것들이 전화도 한 통 없네, 언제 온다는 얘기도 없고... 근데 형네 아들이랑 따로 어디 간다고 한 거 같은데...아니 갔다 왔다고 했나?"
난 기억을 살려 말했다.
"아~~ 애들 엄마랑 셋이서 유럽 갔다가 와서 좀 쉬더니 다시 대만 갔다오고 다음 달인가...또 일본 간다고 하던데 모르것다. 어딘가를 하도 자주 왔다갔다 해서 이젠 기억도 안난다."
내 말을 듣던 명오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근데..형 한테는 같이 가자는 얘기는 안 해요? 엄마랑 한 4~5번 다녀오면 아빠 한테 한 번쯤은 같이 가자고 전화 올 만도 한데.."
난 고민 할 필요도 없이 말했다.
"야~ 난 출장 외에는 여행을 안 가잖아, 출장이야 먹고 사는 문제니 어쩔수 없이 가지만 말이야. 애들도 알아, 내가 여행은 안 가고 출장만 다닌다는 걸"
이 때 김 사장이 이번엔 나에게 빅 엿을 날렸다.
"진짜로 갈까봐, 같이 가자는 전화를 안 하는 거야, 진짜로 갈까봐, 그걸 모르네..."
이 말을 들은 명오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으려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난 웃으며 말했다.
"야~ 진짜라니깐, 애들은 안다고 내가 안 갈거라는 것을, 그러니깐 여행 가자는 얘기를 안 하는 거라고"
김 사장은 단호하게 얘기했다.
"아니라니깐, 진짜로 같이 간다고 할 까봐, 얘기를 안 하는 거라고, 내가 저번에 와이프랑 딸내미 대만 갈때 공항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와이프에게 물어봤어, '당신은 내가 엄청 바쁘니깐 같이 가자는 얘기 자체를 못하는 거지?' 그러니깐 뒤에 있던 딸 내미가 뭐라는 줄 알아? "아니에요, 아빠가 진짜로 같이 간다고 할까봐 얘기를 안하는 거래요. 아빠랑 가면 재미 없다고.." 이러더라니깐 나....참..."
김 사장의 그 말이 끝나자,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긴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조금씩 쓰라렸다.
불쑥 명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근데 형… 우리 진짜 이렇게 늙어가는 거지?”
나는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늙어가긴 하지. 니가 주머니에 쫀드기를 갖고 다니며 꺼내 먹는 걸 보니 이번 생은 다 끝난 거 같다.”
김 사장이 바로 맞장구쳤다.
“그러게. 쫀드기 먹는 중년이라니… 이 정도면 우리 인생 끝난 거야.”
우리는 또 한 번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 끝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아 술 마시고 투덜대고 욕하고 웃는 시간이 어쩌면 중년에게 남은 마지막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밖은 이미 완전히 어두웠다.
누군가는 오늘 잊힌 생일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일본에서 돌아올 가족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내일 아침 미팅의 안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각자의 마음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것들이 잠시 옆으로 밀려났다.
“형, 한 잔 더 할까요?”
명오가 잔을 들며 물었다.
우리는 잔을 천천히 부딪쳤다.
가게 안에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짧고 맑게 울렸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그게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