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자 세 마리

정상보다 이상이 따뜻한 밤

by Oscar Jung

오래간만에 참치집에 모였습니다. 어제 김 사장에게 전화가 왔는데, 본인 차에 문제(브레이크 계열)가 생겨 수리를 맡겼다고 했습니다. 술은 마시고 싶은데 차가 없으니 나와 후배 명오가 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수리 다 끝나면 본인이 차를 끌고 오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그러기엔 술이 더 급하답니다. 이렇게 인생의 우선순위가 늘 정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오와 같이 일산으로 향했습니다.


따뜻한 노란 조명 아래 참치집. 테이블에 앉은 우리 옆으로 다찌(카운터)는 벌써 꽉 차 있고, 뭔가 표정들이 나사 하나씩 살짝 풀어진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잔이 부딪치는 소리, 누군가의 큰 웃음, 작은 웃음들이 겹겹이 쌓여 가게 안은 이상하게도 포근했습니다. 포근하다는 말이 이렇게 "조용히 취한 공기"에도 어울린다는 걸, 어제 알았습니다.

이 나이쯤 되면 "재밌는 일"은 대개 뒤늦게 따라오거나, 혹여 그런 일이 생겨도 인지를 못한 채 늘 정리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우왕좌왕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김 사장은, 우울증 약을 먹고 나서 심리적 안정감도 생기지만 휑하던 정수리의 머리숱이 많아졌다는 희소식을 제일 먼저 꺼냈습니다. 그리고 자꾸 기억력이 없어져서 "나쁜 일을 해도 죄책감이 생각이 안 나서 좋다"는, 좀 정돈되지 않은, 정상을 한참 벗어난 이상한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람들 많은 곳에서 굳이 조명 아래로 나와 명오에게 어설프게 듬성거리는 정수리를 들이밀며 말입니다.

아... 부끄러움은 나의 몫.


'휑한 정수리'라는 단어에 빠지면 매우 서운해할 명오는 그 약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거의 사정했습니다. 김 사장은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신경계에 이상이 없으면 처방을 안 해주니 본인이 의사에게 약을 더 많이 받아와서 명오에게 주겠다는 약속도 하며 간만의 술자리는 훈훈해져 갔습니다. 신경계에 이상이 있어야 술자리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는,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술자리였습니다. '정상'보다 '이상'이 더 따뜻해 보이는 술자리... 그래서 '정상'은 추운 밖에 놔두고 들어와도 되는 기이한 밤이 되었습니다.


술이 몇 잔 돌고 조금 후, 명오가 잔을 들며 대충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마는 항상 선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현실에서 악마는 이마에 뿔을 달고 오지 않는다." 얼마 전, 조금 알고 지내던 업자에게 호되게 당한 명오가 오랫동안 마음고생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승려의 너그러운 표정으로 내놓은 결론이었습니다. 다행히 금전적 피해는 없었지만, 희망 고문으로 몇 개월을 시달린 명오는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욕과 얼핏 들으면 한국말 같지 않은 처음 들어 보는 욕까지 다 내뱉으며 잔을 연거푸 들이켰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신경계 이상으로 그 문제(?)의 우울증 약을 처방받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다시 이르렀습니다. 끝나지 않는 논란의 우울증 약....

"형도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일단 삶이 형을 좀 흔들어줘야 돼." 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시크하게 말했죠.

"우울증 약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난다면 내 머리는 거의 '밥 아저씨' 정도가 되었을 거다. 니들, 지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올라타 본 적 없지?... 그 자동차에는 브레이크가 없어."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참치 한 점이 혀 위에서 갈 길을 잃고, 다찌 쪽 소음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비켜 지나가더군요. 우리 셋은 브레이크 얘기를 들은 사람들처럼 잠깐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때 김 사장이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처럼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브레이크 없는 차에서 내리는 방법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그 말을 들은 나랑 명오는 동시에 김 사장을 바라봤습니다. 김 사장은 잔을 한 번 털고는, 소매로 입가를 쓱 닦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습니다.

"약을… 먹는 거지. 약... 그거밖에 없어."

명오가 "또 그 약 얘기야?" 하니 김 사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세상엔 두 종류의 브레이크가 있어. 발로 밟는 브레이크랑… 의사가 처방해 주는 브레이크.”

우리는 결국 웃었습니다. 누가 더 나아질지, 누가 더 망가질지 결론도 못 낸 채로, 웃는 쪽으로 잠깐 몸을 기울였지요. 신기하게도 그 웃음이 그날의 브레이크였습니다.

아주 짧고, 아주 서툴지만 말입니다.


술집을 나와 대리 기사 콜을 부르는 앱을 켜는데 김 사장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명오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약봉지 같은 거였는데, 둘이 조근조근 귓속말로 뭐라 뭐라 하는데 그냥 모른 척하며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냥 그렇게라도 살아 있으면 그것 또한 행운 같은 거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건, 때로는 멋진 승리라기보다 그냥… 운 좋게도 아직 경기장에서 퇴장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런 운 좋은 날엔, 우울증 약이든 참치든, 술이든, 뭐라도 핑계 삼아 서로를 한 번 더 붙잡아두는 게 낫겠다고.

그래서 결론은 또 이겁니다.

끝나지 않는 논란의 우울증 약의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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