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거짓말쟁이들을, 우리는 종종 '전문가'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세련된 거짓말쟁이들을, 우리는 종종 '전문가'라고 부른다
나는 가끔 그들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을 '생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선 공장 노동자처럼 말이다. 마감이라는 기계음이 울리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 부품 하나, 그럴싸한 미사여구 부품 하나를 끼워 맞춰 '평론'이라는 완제품을 납품한다. 그 과정에서 직접 읽고, 직접 보고, 직접 느끼는 '사람의 시간'은 생략된다.
그래서 불량품이 나온다. 아주 그럴싸하게 포장된 불량품이.
얼마 전 라디오에서 유명하다는 독서 평론가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논하는 걸 들었다. 그는 방송 중,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건 틀렸다. 열린책들 번역본 98페이지, 어린 조카의 입을 통해 '오그레'라는 이름이 분명히 딱 한 번 언급된다.
그 부분은 98페이지 하단 즈음에 이렇게 표현되어있다.
「나는 네살 먹은 내 질녀 알카와 장난감 가게를 들여다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섣달 그믐날이었다.
꼬마는 나를 돌아보며 이런 놀라운 말을 했다.
"오그레 삼촌, 나는 쑥쑥 자라나는 뿔이에요. 그래서 참 기뻐요."
나는 놀라고 말았다. 인생이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그 독서 평론가는 그 소설을 심도있게 읽지 않았거나, 남이 요약해 둔 줄거리만 보고 방송에 나온 것이라 추측했다.
브런치의 유명 작가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르바가 악기(산투르) 연주에 방해된다며 손가락을 잘랐다고 썼다. 낭만적인 거짓말이다. 조르바는 생업인 물레(녹로)를 돌릴 때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자른, 생존에 미친 사내다. '예술'을 위해 손을 자른 게 아니라 '일'을 위해 잘랐다는 그 처절한 디테일의 차이를 그들은 모른다.
다.
마지막은 미술에서 비슷한 불편함을 느꼈다. 어느 큐레이터라는 사람이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해설한 글을 읽었는데, 그림 속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어긋나 있었다. 그림에는 네 사람이 등장한다. 맨 앞에서 등을 지고 있는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에 물잔을 들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카페의 종업원도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다기보다는, 무언으로 일을 하고 있으며 그 표정은 말보다 피로에 가깝다. 손이 맞닿아 있다고 해설한 부분도 틀렸다. 두 남녀는 손이 맞닿아 있지 않고, 앉은 각도와 위치상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하다. 남자는 담배를 손에 쥔 채 앞만 응시하고, 여자는 손가락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손에 쥔 달러 지폐에 시선이 가 있다. 이 디테일이야말로 도시의 화려함 뒤편에 있는 고독과 자본의 논리를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큐레이터에게 묻고 싶다. 그 위대한 작품을 해설하기 전에 진정으로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있느냐, 하고 말이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 결국 질문이 남는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왜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않은 채 단정적인 해설을 내놓는가.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다양한 해석은 작품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러나 해설은 다르다. 해설은 최소한 작품 안의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 사실을 건너뛴 해설은 결국 “그럴듯한 말”이 되고, 그 말은 누군가에게는 지식처럼 전달되며 작품 자체를 흐리게 만든다.
그들의 글 공장은 오늘도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정보를 왜곡하고, 엉터리 해석을 찍어내면서도 목소리엔 윤기가 흐른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전문가라는 이름표를 단 사람들이 건네는 색안경을 벗어버리기로. 대신 투박하고 느리더라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 믿기로 했다.
내 인생의 해설자는, 결국 나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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