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관하여
작년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거장 드니 빌뇌브의 영화 '듄(dune)' 예고편을 보게 되었다. 3분 남짓한 메인 예고편을 보고 머리가 쭈뼛 서는 전율을 느끼며 개봉 날짜만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하는 날, 아이가 일찍 하교하기에 최대한 빠른 오전 시간으로 예매를 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참으로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매일매일 빠른 템포로 비슷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영화, 책, 음악 같은 예술은 우리에게 도끼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소중한 시간을 내서 보는 보석 같은 영화는, 관성과도 같은 일상 속에서 생각을 전환시켜 주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과거의 어떠한 일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듄을 보기 전 요즘 꼬리뼈가 아픈 나머지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조금은 부담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통증을 느끼기는커녕 내 눈은 몇 분에 한 번씩 애꿎은 시계만 쳐다보고 있었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끝나가는 게 너무 아쉬워 마음은 초조해지고 입술은 바짝 말라갔다.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 각인될 정도로 인상적이었지만 특히나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제시카의 아들 폴(티모시 샬라메)이 베네 게세리트에게 예지 된 자(퀘사츠 헤드락)가 맞는지 확인받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폴은 어떠한 상자에 손을 넣게 되고 그 안에서 뼈가 부러질 거 같은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을 참을 수 있는지 베네 게세리트가 테스트하는 장면인데, 폴의 어머니 제시카가 문 밖에서 아들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그 엄청난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는 장면에서 나 또한 과거의 어떠한 일이 스르륵 떠올랐다.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지나가면 나는 마음의 눈으로 그것이 지나간 길을 살펴보리라.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제시카가 문 밖에서 눈물을 떨구며 이렇게 주문을 외우고 결국 폴은 두려움에 맞서 뼈가 부러질 거 같은 통증을 이겨내고 베네 게세리트 마녀의 눈을 초연하게 응시한다.
(폴과 베네 게세리트)
준서가 4살 때, 남편과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 이마 한가운데가 찢어진 적이 있다. 남편은 현관문을 열고 혼이 나간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그 둘의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음장처럼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준서를 안고 들어왔는데 남편 어깨는 이미 준서 이마에서 떨어진 피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준서의 얼굴 또한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니까. 그때 아이의 살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았다. 부드럽고 약한 어린 살에서 피가 그렇게 많이 쏟아질 수 있다는 것도.
이미 혼이 반쯤 나간 남편과 아이를 보며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었다. 돌도 안된 둘째는 아기띠에 업고 우는 준서를 한 손에 잡고 병원을 찾았을 때 '살이 더 벌어지기 전에 빨리 봉합해야 한다'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엄마 아빠와 떨어지기 무서워하는 아이를 혼자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문 밖에서 아이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그때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의 비명과도 같은 우는 소리를 들으며 느낀 좌절감과 괴로움. 내가 아이 대신 수술대에 누울 수 있다면 좋겠다 주문처럼 속으로 외웠던 말들. 그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영화 속 제시카와 폴을 보며 되살아났다.
'준서야 엄마가 여기 있어. 조금만 참아. 두려워하지 마. 금방 끝날 거야'
이마를 봉합하는 동안 울며 심하게 몸을 움직이는 준서를 잡느라 4명의 간호사가 투입됐던 그 수술은 다행히 잘 마무리됐고 아이 이마 흉터도 점점 옅어지면서 준서도 그날의 아픔과 두려움을 이제는 잊은 듯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여운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퀘사츠 헤드락 퀘사츠 헤드락을 조용히 외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을. 지나간 두려웠던 순간들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아직 경험하지 못한 두려울 순간들도.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보다 더 큰 두려움이 온다면 그때의 나는 어떨지. 그래도 담담하게 맞서 볼 거야 생각하며 날 보자마자 엄마 부르며 환하게 뛰어오는 아이를 두 팔 벌려 꽉 안아주었다.
영화 '듄' 티모시 샬라메(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