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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Oct 31. 2021

단편 소설

마지막으로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백팔 십 미터 전방에 내 목적지인 주황색 쿠션탱크가 보인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다. 계기판 속도가 백오십 킬로를 넘어가고 있었다. 쿠션탱크의 사선으로 처리된 노란색 검은색 줄들이 나를 어지럽힌다. 그래도 소용없어 난 오늘 죽을 거니까. 그래 거의 다 왔어. 더 밟아!

"쾅!!!"

사람들이 죽기 직전 무언가가 보인다거나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게 있다고 하던데 모두 헛소리였다. 




우리 아버지는 서울 목동 S교회의 목사님이다. 사람들은 그를 목사님 혹은 바이블이라 부른다. 난 그의 하나뿐인 외동딸이다. 내입으로 말하자니 뭣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나를 '목동 김하늘'이라 불렀다. 분위기며 외모며 비슷하다나 뭐라나.


부모님은 몰딩이 갈라지다 못해 떠버린 오래된 집에서 33년째 살고 계신다. 엄마 아빠는 나를 무척 착하고 예의 바른 딸로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남의 시선을 극도로 혐오하며 누가 날 알아볼까 두려워 지름길을 놔두고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등교하는 학생이었다. (목사의 딸이라는 이유로 길에서 날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다) 


취업을 준비하며 나는 필리핀으로 1년 동안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거기서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고 나는 그 남자와 5년여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연수 기간 중 첫 한 달은 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남학생들에게 '밥 사줄게'라는 말만 지겹도록 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다.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한 남자가 내게 같이 트래킹을 하러 가자고 했다. 내심 귀찮았지만 따라나섰다. 그는 학원에서 검은색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점심도 걸러가며 영어 공부 삼매경이었던 학생이었다. 그의 성실한 모습에 내심 몇 번 감탄한 적이 있겠다 또한 밥 사줄게라는 말보다 트래킹을 하러 가자는 제안이 신선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뭉게뭉게 구름 사이로 보이던 연보라색 석양 때문이었을까.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석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와 나는 필리핀에서 돌아오고 5년 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과 믿음을 맹세하며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허니문 베이비로 낳은 첫째 아들은 현재 열 살이다. 둘째 아들은 여덟 살인데 마음으로 낳은 아이, 로이다. 십 년 전 첫째 아들 요한을 낳고 나서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자연분만으로 또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었다. 분만 후유증이랄까. 오줌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새는 현상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말로 표현이 안 되는 어마 무시한 통증이 극도로 무서웠다. 결국 남편과 오랜 고민 끝에 둘째 아이는 입양을 하기로 결심했다.


첫째는 아들이니 당연히 둘째는 딸이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처음 남편과 떨리는 마음으로 입양기관을 방문했을 때 돌아오는 대답은 '딸은 무척 귀하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자 아이를 원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를 입양하려면 몇 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담당자의 대답이었다. 그냥 발걸음을 돌리려 하는데 복도에서 선생님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오는 남자아이를 마주쳤다. 우연히 마주친 로이는 커다란 눈에 긴 속눈썹 풍성한 검은색 머리카락, 앙증맞은 빨간 입술, 나를 향한 귀여운 손동작까지-순간 그 아이에게 빨려 드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로이를 보자마자 내가 키우겠다며 그 아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로이는 내게 아들이 아닌 기다리고 기다리던 딸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 집에 왔을 때 로이는 내가 자기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하루 종일 빽빽 울어댔다. 어찌나 울어대는지 집으로 데려온 첫날부터 남편과 나는 로이를 등에 업고 서로 교대하며 쪽잠을 잤다. 입양 계획이 있는 가정에서는 아마 관련 카페를 통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입양이 되기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픈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이유인즉슨, 이미 뱃속에서부터 행복한 임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영양상태며 불안한 모체의 심리 탓에 건강한 아이로 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지만 키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맡겨지는 아이들. 아니 기관으로 보내지는 아이들. 그 아이들은 태아 때부터 부모의 불안하고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자라난 탓에 극도로 예민하고, 미숙아로 태어나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극도로 예민했던 로이도 밤낮으로 울어대는 탓에 나중에는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우리 집에 온 이후 두 달 동안을 울어재꼈던 아이. 가끔은 내 진짜 엄마 아빠는 어디 있냐며 울부짖는 것처럼 들리던 그 울음소리.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거 같다. 우리 집에 로이를 데려왔던 그날부터 나는 자주 '죽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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