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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Aug 28. 2021

KTX 동대구역

“이번 정거장은 동대구역, 동대구역입니다.” 

십분 뒤 동대구역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멘트가 기차에 울려 퍼졌다. 진짜 대구에 왔구나 여기 대구 맞지. 몸이 구겨진 채로 의자에서 곯아떨어진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오늘은 우리 이삿날이었다. 세종에서 대구로 이사를 하는데 이삿짐 차량은 현재 세종에서 대구로 저속 운행을 하며 오고 있고 나와 남편은 기차를 타고 대구에 먼저 왔다. 아이들은 친정 엄마에게 이틀 정도 봐달라며 부탁을 드렸다.

 

남편의 직장 본사가 대구로 이전을 했는데 남편은 대구 본사 생활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 본사 발령 때는 아이가 너무 어려 잠시 주말부부를 했었다. 이제는 둘째가 네 살 첫째는 여섯 살이 되었는데 아빠를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함께 대구로 와서 살아보자고 결심을 한 터였다. 나는 고향인 청주와 서울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에서 살아본 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잘 지낼 수 있을까 막막했지만 이번에도 또 떨어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구광역시, 신문에서 종종 TK라고 불리는 이곳. 이삿날 마무리는 밤 10시가 되어서 끝났고 그다음 날 나와 남편은 필요한 물건을 사러 근처 대형 마트에 갔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부모를 잃어버렸다는 미아 안내 방송이 나왔다. 사투리로 말이다. 방송조차 사투리로 듣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되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남편과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이틀 정도 지났을까. 이제 친정으로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대구로 와야 하는데 내가 이사 때문에 무리를 한 탓인지 심한 몸살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엄마에게 하루만 더 봐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그냥 대형 마트 안에 있는 내과를 찾아갔다.


 “환자 분 들어오세요”

 “선생님 제가 이사를 왔는데 몸에 무리가 왔나 봐요. 온몸이 다 아프고 오한도 심하고 갑자기 기침 가래도 너무 심하고요”

 “흠 그래예? 비타민이 들어간 주사를 좀 놔드릴께예~혹시 아래 색깔은 어때예?”

 “네? 선생님.. 아래 색깔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래 색깔이라니 내 소중한 곳의 색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양반’

 “아래라고요?”

 나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재차 물어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가래예~가래 색깔이 어떻냐고요~서울에서 이사 오셔서 사투리가 하나도 안 들리지요? 비타민 주사 맞고도 안 나으면 우리 병원 그냥 안 오시면 됩니더.”


 난감했다. 가래를 아래로 잘못 듣고 몇 번이나 물어보다니. 거기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본인 얘기도 잘 못 알아듣고 짜증이 나도 그렇지 안 나으면 오지 말라니. 그 이후로도 나는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동네 가게에 가서 과일이나 고기, 뭐를 좀 사려 하면 모든 사람들이 짠 것처럼 ‘서울에서 이사 왔나 봐요’ 이러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데 그 눈길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대구 사람들 사투리를 TV에서만 접하다가 직접 내가 생활을 하며 접하니 이건 다른 문제였다. 억양이 높고 발음이 무척 셌다. 거기다가 말이 좀 빠른 사람을 만나면 정말 알아듣는 게 힘이 들었다. 개중에는 내 귀에도 잘 들리는 사투리를 구사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마치 외계어를 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분들도 많았다.     


출처: 픽사베이

 

그러다 2020년 겨울 코로나 1차 대유행이 대구에서 터지고 말았다. 신천지 교도들이 집단 감염되면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대구를 유령 도시로 만들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출근을 해야 했기에 남편 빼고 나와 아이들은 부랴부랴 짐을 싸서 KTX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그날은 정말 잊을 수 없다. 아파트 정원은 물론 놀이터와 인도, 왕복 십 차선 도로까지 텅 비어 있었다.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대구 신천지 발 코로나 대유행을 무서워하며 집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나 또한 영화 같은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웠고 고사리 같은 아이들 손을 꼭 잡고 경직된 채로 기차에 올랐다. 


무사히 친정으로 온 후 이틀 뒤쯤 첫째 아이가 이가 아프다고 해서 근처 치과에 미리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아이 이름을 말하니 ‘이**님 맞으시죠, 잠시만요 거주지가 대구로 나오는데, 죄송합니다. 치과 치료가 불가능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와 내 아이가 신천지 코로나 바이러스 취급을 받는다는 게, 그것 때문에 아이가 치과 치료도 못 받는다는 것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일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서글펐다. 그렇게 친정에서 두어 달을 지내고 청주에서 다시 KTX 동대구역행 기차를 타고 아이들과 다시 대구로 돌아왔다. 


대구로 돌아오고 나서 몇 주쯤 흘렀을까. 몸에 이상이 생긴 걸 알았다. 집에서 아이들 돌보다 몸살이 난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 블루에 걸린 것인지, 갑자기 귀에서 ‘삐’ 소리가 들리는 이명 현상이 생겼고 그 소리는 나를 밤낮으로 괴롭혔다.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계속 울리니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이후 정확히 세 달에 한번 꼴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구토를 하였다. 한번 시작되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고통이었다. 응급실에 3번 넘게 실려갔고 뇌 CT며, 뇌혈류 초음파며 많은 검사를 해보았지만 병명은 결국 급성 편두통이라 하였다. 몸이 마치 오래된 참외처럼 곯은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힘든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차 사고를 당했다. 멀쩡히 정상적으로 운행하던 내 차 옆으로 트럭이 갑자기 들어오면서 차 옆부분을 박아버린 것이다. 코로나에다 이렇게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겪으며 결국에는 대구가 정말 지지리 싫어지는 상황까지 갔고 그 화살은 남편에게 갔다. 


“처음부터 여기 오는 게 아니었어. 여기 와서 좋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어.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이방인 취급하고 나도 그들 말도 잘 못 알아듣겠고 진짜 모든 게 짜증 나!”

결국 남편과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짜증이 풍년이었다.


그렇게 서로 토닥여줄 여유도 없이 우린 다시 남편의 대전 발령으로 부랴부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나니 이제야 알겠다. 어떤 고통도 지금이 행복하다면 그냥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고 어떤 기쁨도 지금의 불행 앞에서는 고통의 소재일 뿐인 것처럼, 이제야 내 마음을 두드려보고 뒤돌아본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었고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닌데, 내가 그들에게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다. 대구 사람들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난 그들과 다르다며,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떠날 거라며 스스로 벽을 쳤다. 이따금씩 대구에서만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소고기 ‘꾸리살’을 생각하면서 역시 음식은 대구라며 칭찬하는 나를 마주할 때면 픽하고 웃음이 나온다. 대구가 그리운 것인가.


남편 직장 때문에 언젠가 또다시 대구로 가서 살게 될 확률이 크다. 다가올 어느 해, 어떤 계절에 KTX 동대구역에 내리는 나를 상상해 본다. 그때 또 무슨 일에 부딪히고 어떻게 헤쳐나갈지, 이제는 조금 궁금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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