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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May 12. 2022

아빠는 바보 같다고 자주 생각했었다

1952년도에 태어나 왕십리에 있는 H대 공대를 나와 공기업에서 한평생 몸 바쳐 일하시고 퇴직 후 지금은 한 중소기업의 고문으로 있는 한 남성. 우리 아빠다. 내가 아빠를 이렇게 소개하는 까닭은 아빠는 본인이 쭉 걸어왔던 길에 자부심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도 종종 농담 반 진담 반 '아빠 인생 이 정도면 나름 평탄하지 않았냐'며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시곤 하신다.


유년시절 아빠는 여름 겨울방학 때에나 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얼굴을 보기 힘든 분이셨다. 그때는 토요일까지 근무를 했기에 아빠는 일요일이 되면 하루 종일 잠만 주무셨다. 주로 신도시를 계획하는 일을 하셨기에 여기저기서 대접받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공사다망한 아빠랑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7월 말에서 8월 초 여름방학 때가 전부였다.


아빠는 늘 본인 위주였다. 지금이야 손주들 보시고 많이 유해지셨지만 젊었을 적에는 고집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딸인 나와 TV 채널 가지고 싸우다가 말을 안 듣는 내게 화가 난 나머지 리모컨을 내 어깨에 던진 일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수능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 내게 하위 **대학이나 가라며 화를 내신 적도 있었다. 똥고집에 가끔씩 욱하는 아빠에게 내가 맞섰던 방법은 더욱 불같이 화를 내거나 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아빠가 내게 악담을 했다고 울면서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그런 말 하면 못 쓴다고 아빠를 혼내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꼬시다'를 외치곤 했다.


자기중심적이었던 우리 아빠가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 있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결혼하기 직전까지 퇴근하고 집에 와 나만 보면 '우리 딸 누구 딸~~~?'이라고 물어봤다. 나는 녹음 인형 배를 누르면 자동으로 나오는 소리처럼 '아빠 딸'이라고 귀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아빠는 입이 귀에 걸려서 나를 꼭 안아줬다. 커서까지도 그러는 게 조금은 민망해서 이젠 좀 그만하라고 말하면 아빠는 서운하다는 듯 재차 묻고는 했다.  


그런 우리 아빠가 회사에서 회의 도중 갑자기 쓰러지셨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위급한 나머지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셨고 병명은 뇌경색이었다. 내가 스물다섯 살, 아빠 나이 쉰여섯이었다. 너무나 젊은 나이었다. 아빠는 머리를 여는 큰 수술을 받으셔야 했고 엄마는 '네 아빠 어떡하냐며 잘못되면 어떡하냐며' 어린 계집아이처럼 목놓아 엉엉 우셨다. 모래성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바르르 떠는 엄마를 붙잡고 같이 울고 싶었지만 나와 오빠마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가야 하는 아빠가 엄마도 오빠도 아닌 나를 애타게 찾아 부르셨다. 간절하게 딸을 부르는 목소리에 쫓아 들어간 수술실은 커다란 형광등에서 뿜어 나오는 하얀색 불빛으로 가뜩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공간을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옆머리를 밀어버리고 베드에 누워있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 아빠! 나 왔어!"

"현주야.. 아빠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저기 뱃속 구석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눈동자까지 솟구쳤다. 그 뜨거운 것이 터져 버리면 가뜩이나 수술을 앞두고 겁에 질린 아빠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허공의 한 점만 바라보고 있던 아빠의 눈이 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손을 꼭 잡고 이마에 뽀뽀를 했다.  


"아빠 괜찮아.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하나도 안 무서워. 내가 있잖아. 이제 푹 자는 거야."   


그 말에 아빠의 큰 눈동자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지만 볼을 타고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빠의 눈물을 난생처음 본 날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리고 또 아려서 정말 아빠에게 잘하겠노라고, 수술만 성공적으로 잘 끝나게 해 달라고, 힘들 때에만 찾던 하느님을 또 뻔뻔하게 붙잡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아빠는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다.


내가 하느님에게 했던 다짐은 변함이 없냐고? 변함이 없긴. 점점 나이가 드실수록 거인이 위에서 누르고 있는 것처럼 어깨는 안으로 굽고,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했던 질문을 또 내게 묻고 할 때마다 겉으로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아빠는 정말 바보 같아'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하고 아빠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시지만 인터넷 활용이며 자식들에게 똑똑하게 본인 의사를 전달하는 시아버지를 볼 때마다 우리 아빠는 더 젊은데 왜 이리 바보같이 행동하실까 생각했다. 시아버지는 청년 같았고 우리 아빠는 노인 같았다. 스물다섯 살 수술 대기실에서 아빠를 건강하게만 돌려달라고 애달프게 기도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아빠가 내게 전화를 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아빠 그거 내가 전에도 말해줬잖아'라고 말하는 내 모습을 본다.


'아빠는 바보야'라고 말하는 듯한 내 표정을 봐서일까. 아빠는 인터넷 활용이 막힐 때마다 나와 오빠에게 전화를 하다가 사위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사위는 사근사근하게 잘 받아줬고 아빠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이서방이었다. 아빠를 모시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본인처럼 술과 홍어를 좋아하는 사위를 참으로 이뻐하신다.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모처럼 우리 집에 놀러 오시면 독박 육아를 하는 딸이 안쓰러운 것보다 사위가 고생하는 게 눈에 훤하셨는지 나를 앉혀놓고 '이서방에게 잘해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서방 고생 많지. 그런데 아빠는 내가 고생하는 건 안 보여? 매일 이서방이 힘든 것만 생각하지?'라고 맞받아치곤 했다. 딸이 육아로 힘든 것도 모르고 전화로 본인 할 말만 하고 끊는 아빠를 접할 때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아'라고 속으로 되뇌곤 했다.      


최근에 자다가 이불 킥을  만한 경험을 했다. 요즘 그림책북큐레이션 수업을 듣고 있는데 지난주 수업에서 본인이 가장 기억에 남는 그림책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나와 남편이 아이들에게 읽어주다가 눈물을 왈칵 쏟았던 그림책 '기억의 풍선' 소개하는데  순간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소개 중이라 받지는 못했지만 핸드폰에 'dad'라고 쓰인 글씨를 보자마자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터져버렸다. 결국 눈물 콧물 쏟으며 그림책을 소개해버렸다. 전혀 친하지도 않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말이다. 그렇게 책을 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가 대체  그랬을까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런 비슷한 일이 처음이 아니었다.   


운전 중에 자동차 스피커에서 내가 좋아하는 위켄드와 비버의 경쾌한 음악이 나오는데도 눈물이 차올랐다. 아빠를 생각하면 꼬리의 꼬리를 물고 기억이 늘어졌다. 애써 다른 기분 좋은 생각을 하는데도 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렸을 적에는 본인만 생각하는 아빠가 미웠다. 했던 말을 또 하고 굼뜨게 행동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바보 같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아빠의 모습을 내가 가장 많이 닮아 있었다. 나 또한 아빠처럼 자기애가 강하며 식탐이 많아 맛있는 음식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것, 한말을 잊어버리고 또 하기도 하며 아이들에게 갑자기 버럭 화를 내고 나서 이쁘다며 우쭈쭈 볼에 뽀뽀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 아빠 젊었을 적 모습이었다. 이렇게 닮은 우리가 이 찬란한 봄을 몇 번이나 함께 보게 될까 생각했다. 그럴 때면 한없이 우울해져 몸이 소파 밑으로 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아빠는 바보 같다며 속으로 무시하는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사실 난 아빠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관심받고 싶은 철없는 딸이었다. 종종 이해 안 가는 행동을 하는 아빠여도 내 아빠여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들이 먼 미래에 내 곁을 떠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미래를 생각하면 두려워져서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 자체가 제일 바보 같은 짓이니까. 오늘이 가장 젊고 행복한 날이니까.    


(우리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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