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을 읽고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중)
광화문 카페 이마에서 A를 만나기로 했다. 꾸안꾸 느낌 똥머리를 했는데 남은 앞머리와 옆머리가 강한 바람에 서로 엉겨 붙었다. 메리 제인 검은색 플랫슈즈에 인디언 핑크 A라인 트렌치코트를 입은 그날의 OOTD가 마음에 들었다. '앞머리쯤 엉겨 붙으면 어때' 하고 헝클어진 머리를 대수롭게 쓱 넘기며 카페 이마로 들어갔다. 두근두근. A는 대체 어디 앉아있을까.
저 멀리 위아래 검정 슈트를 입은 한 남자가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 손짓을 한다. 멀리서 봐도 뽀얀 얼굴에 단정한 남자였다. A는 내 후배의 남자 친구가 런던 어학연수 시절 친했던 형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리에 앉자마자 서로 명함을 수줍게 주고받고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우린 큭 하고 웃었다. 둘 다 예의를 무척 차리고 있었지만 서로의 얼굴에서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흘렀다.
A가 '저 사실 소개팅은 처음입니다' 하며 볼이 발개져 웃는데, 그 선한 웃음을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농담이 아니다. 종종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린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내가 그럴 줄 몰랐다. 그날 나는 '딩딩' 거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고 오직 나만 들을 수 있었던 그 소리를. 좋아하는 카페 이마의 아이스크림 와플을 와구와구 먹으며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토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카페에서 나와 청계천을 걸었던 그날 밤 이후 우리는 커플이 되었다.
회사에서 A의 연락을 기다리느라 눈은 모니터가 아닌 핸드폰을 주시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사랑에 빠진 얼간이' 같은 표정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일까. 회사 사람들은 '현주 씨 남자 친구 생겼어요?' 하며 물었고 나는 그 무렵 그냥 얼빠진 사람이었다. A의 회사는 인천에 있었고 우리 회사는 마포에 있었다. A는 퇴근 후 인천에서부터 마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보러 와줬고 우리는 가까운 여의도 한강공원에 가서 치맥을 하며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2년 후 '손에 물 묻히는 일이 없게 해 줄게, 더 행복하게 해 줄게'라는 프러포즈를 받으며 A와 나는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서약을 했다.
남편과 나는 잠원동에 있는 한 구축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18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우리는 달콤한 신혼을 보냈다.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한 공간에서 우리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아침에는 내가 먼저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비몽사몽 일어나지 못하는 남편에게 침대로 아침상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에게 아침은 꼭 챙겨주고 싶었다. 준비를 다 마치고 나와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렸다. 그 무렵 남편도 인천 지점에서 마포 본사로 출근을 했기에 우리의 동선은 같았다. 매일매일 남편과의 출퇴근 길은 그 시절 우리가 자주 듣던 노래 kae sun의 'ship and the globe'처럼 청량하고 경쾌했다.
서재방 옷걸이에 후줄근하게 걸려있는 남편 와이셔츠의 자꾸 눈길이 간다. 연애시절 남편은 회사에 입고 다니는 정장들을 주기적으로 세탁소에 맡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남편에게 말했었다. '결혼하면 와이셔츠는 내가 직접 다림질 해줄게'라고. 아이 둘을 낳고 다림질할 시간은커녕 켜켜이 쌓인 아이들 옷과 수건들을 빨고 밀린 집안일을 끝내면 하루도 끝나 있었다. 결국 남편 옷을 전문 세탁업체에 맡겼다. 신혼 때 한두 번 다림질해준 게 전부였던가. 헴퍼에 놓여있던 남편의 와이셔츠를 정말 오랜만에 무작정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빨래가 끝난 뒤 탁탁 털어 햇빛에 널었다. 다 마르고 나면 빳빳하게 다림질해줘야지 생각하며.
그런데 아이들 케어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쓰고, 새로 시작한 그림책북큐레이션 수업까지 들으니 시간을 내어 다림질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다 마른 와이셔츠를 남편 서재방 옷걸이에 툭 걸어두었다(다림질을 꼭 할 요령으로).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후줄근한 상태 그대로 걸려있는 와이셔츠를 볼 때마다 심장에 돌덩이가 얹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 와이셔츠 다린 거 아니지? 응. 빨기만 했는데, 하는 대답에 아무 말 없이 구깃한 와이셔츠를 주섬주섬 입고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본다.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두 시간은 족히 있을 수 있던 우리였다. 열정이라는 단어에도 모양이 있다면 처음에는 크고 높은 모양이었다가 지금은 많이 깎여 작고 뭉툭한 모양이 되어 있었다.
결혼 후 십여 년 동안 우리는 대혼돈의 멀티 양육을 했다. 주말부부였다가 다시 합쳤다가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말 그대로 혼란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지만 나와 남편은 마치 가지치기를 안해준 식물처럼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 꺾이기도 하고 누렇게 변색되기도 했다. 부모라는 타이틀이 처음이었기에 우리는 미숙하고 어색했다.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생겼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화를 분출했는데, 한 번은 내가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 화를 버럭 내고 집을 그냥 뛰쳐나갔으며, 한 번은 남편이 화가 난 나머지 소파에 리모컨을 던지며 소리를 지른 날도 있었다.
그렇게 싸우고 혼자 방에 들어가 웅크리고 누우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속에서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가 내게 손을 좀 내밀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이었겠지.
"뚱"
"왜"
"이거 두턱지는것 봐. 어떡할 거야 정말"
"아 몰라 이번 가을에는 피부과 가서 뭣 좀 해야지"
남편은 나를 '자기 혹은 김뚱'이라 부른다. 혹자들은 '뭐야 남편이 그렇게 부르면 기분 안 나빠요?'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니까. 여전히 좋아한다는 말이니까. 연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농담 따먹기를 좋아한다. 평소에는 차분한 남편이 가끔 툭툭 던지는 농담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하하하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첫 문단에 쓴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곱씹어 읽었다. 돌이켜보니 남편을 만난 카페 이마에서부터 첫째를 낳기 전까지 우리 둘은 서로를 탐닉하고 서로에게 집착했었다. 에르노 말을 빗대면 우리는 그 시절 사치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사치는커녕 서로를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있었다. 나만 힘든 것 같다고 투덜댔고 상대방의 희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한 남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주 두포나루터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김광석 노래를 크게 틀어놓은 채 밤하늘을 같이 올려다보는 것.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기다렸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같은 포인트에서 껄껄 웃는 것, 아이들이 하는 말에 애써 웃음을 참으며 서로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남편이 귀찮다는 듯 내 사진을 찍어주면서도 포즈나 위치를 바꾸라며 말해주는 것, 주중에 열심히 일한 남편이 주말에는 나보다 조금 더 잘 수 있게 조용히 문을 닫아주는 것. 우리의 사랑은 이렇다.
그리고 여전히 난 양쪽 입꼬리가 쏙 올라가며 소년스러움을 한 스푼 더 한 A의 선한 웃음을 정말이지 너무나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