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령망동 정중여산
최근에 삼국지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3권짜리 얇은 시리즈로 처음 접한 이래로, 책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게임, 드라마, 영화) 등으로 접해왔었지만 긴 호흡의 소설책이 읽고 싶었습니다. 그중 유명한 이문열 작가님의 삼국지를 읽어나가고 있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들에서도 새로움이 느껴지고,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보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습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는 총 세 가지입니다. 관도대전, 적벽대전, 그리고 이릉대전이죠. 특히 당시 중국의 본토라고 할 수 있는 하북지방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조조가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펼치는 관도대전은 전략과 전투가 난무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병력, 물자 어느 것 하나 이점을 가지지 못한 조조였지만 결국 원소를 물리치고 중원을 재패하게 되죠.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만, 원소의 변덕스러운 마움도 큰 패인으로 작용합니다. 전풍, 저수, 심배, 봉기, 허유 등 조조진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책사들을 보유했음에도 이 말에 흔들리고, 저 말에 혹하면서 중요한 결정들을 못 내리는 모습이 조조의 판단력, 결단력과 비교되었죠.
결국 수장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야 말로 전쟁의 승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인인 것입니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합니다. 부산을 거쳐 거침없이 육로로 진군하는 왜병들한테 조선은 속절없이 패배하고 조정은 백성들을 버리며 피난길에 오르죠.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선을 구한 분이 바로 우리의 이순신장군입니다. 장군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전선을 정비하고 병기를 점검하며 병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에도 이순신은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고, 유리한 지형과 조건을 철저히 계산한 뒤에만 전투를 벌였습니다. 일본수군과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이 을 앞두고 장군은 불안해하는 부하와 병사들에게 명합니다.
물령망동(勿令妄動) 정중여산(靜重如山)
함부로 움직이게 하지 말고, 침착하고 무겁기를 산처럼 하라.
— 이순신 장군
육지에서 들려오는 왜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불안하고 혼란한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자 하신 말씀이죠.
위험한 상황일수록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지 말고, 중심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이순신의 철학이 응축된 문장입니다. 꾸준한 준비로 내실을 다졌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적의 동태와 전력을 살핌으로써 만반의 준비를 갖춘 조선 수군이기에 심적인 동요만 없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장군은 생각했습니다. 1592년 5월 7일 조선 수군의 첫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보, 나아가 이순신장군이 써 내려간 무패의 신화가 시작된 옥포해전의 대승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급박한 상황일수록 사람은 조급해지고, 조급함은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산처럼 무겁게 판단하여 '빨리'보다 '바르게'행동하라는 장군의 말씀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싶네요.
송나라 성리학의 대가인 주자(朱子, 주희 1130~1200)는 학문과 수양의 출발점으로 정좌(靜坐)를 강조했습니다. 단순히 가부좌를 틀고 바르게 앉아 명상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본래의 기준을 회복하는 수양법입니다. 주자는 사람이 사사로운 감정과 외부의 자극에 흔들릴수록 판단은 흐려지고,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정(靜)’의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죠.
정좌의 핵심은 생각을 억누르거나 비워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두려움, 조급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힘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질수록 사물의 이치가 분명해지고, 그 위에서 내려진 판단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자가 말한 정좌는 행동을 멈추기 위한 수련이 아니라, 올바르게 움직이기 위한 준비인 것이죠.
마음이 고요하면 이치가 드러나고,
이치가 드러나면 행동이 어그러지지 않는다.
— 주자(朱子)
정좌를 자칫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움직이기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내면의 정비 과정입니다. 마음이 소란할 때 내린 결정은 감정에 끌려가기 쉽고, 조급함 속에서 나온 행동은 대체로 후회를 남깁니다. 반면 충분히 가라앉은 마음에서 나온 선택은 빠르지 않아도 정확합니다. 산처럼 무겁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 뒤에야, 움직임은 비로소 힘을 갖게 됩니다.
정좌는 결과적으로 혼란을 이길 수 있는 중심을 세우는 수련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토아학파의 위대한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제국이 흔들리는 불안정한 상황을 겪게 됩니다. 카르눈툼 전투(AD 170년)에서 수만 명의 로마 병사들이 목숨을 잃으며 패했고, 이제는 직접 전장에 나서야 할 상황이 되어버렸죠. 50을 넘긴 나이의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고자 나서다 보니,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나이 든 철학자가 군을 이끈다며 비아냥과 조롱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물러서지 않았고 이후 7년에 걸친 전쟁을 치르며 결과적으로 게르만족을 막아내게 됩니다. 마르코만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인 『명상록』을 집필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철학적 성찰을 담아낸 이 책을 통해 그는 적을 무너뜨리기 전에 자기의 마음을 먼저 다스렸습니다. 그는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에 하나의 요새를 세웠습니다. 바로 ‘내면의 성채’입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말자. 목표를 향해 나아가되, 자신을 귀하게 여기자.
헛된 망념을 버리고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 자기 자신을 구하자.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중에서
황제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명상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전쟁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힘 앞에서 손을 놓고 주저앉는 순간, 마음은 불안과 공포에 잠식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두려움에 휘둘릴지, 의연하게 상황을 맞설지는 전적으로 내 선택입니다. 눈앞의 고난을 피해야 할 불운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단련하는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운동선수가 고된 훈련을 통해 근력을 키우듯, 시련은 정신을 단단하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고 보았죠.
이러한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강인한 정신은 우연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황제는 매일 철학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마음의 성채를 조금씩 쌓아 올렸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막사로 돌아가 조용히 명상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충고를 글로 남겼습니다. 충동에 따라 행동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이 가장 가까운 최전선에서도 그의 마음 수양은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철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꾼 중요한 재료입니다. 석기나 청동기와 더불어 철기시대라는 역사적 구분을 할 정도로 철의 등장은 인류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죠. 현재는 건축물의 골조가 되고, 교량과 선박을 이루며, 기계와 공장의 뼈대가 됩니다. 단단하고 무거운 성질을 가진 철이지만 또 다른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변형이죠. 그 특성은 재료과학에서 말하는 응력–변형률 선도에 가장 잘 드러납니다. 변형률이라는 X축과 응력이라는 Y축으로 구성된 이 그래프상에서 철은 힘이 가해지면, 처음에는 모양이 조금 변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 일정 범위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하중이 제거되는 즉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오죠. 이를 탄성영역이라 부릅니다. 이 구간에서 철은 외부의 압력에 반응하지만, 임시적인 변화만 일어납니다. 바람에 흔들리되 뿌리째 뽑히지 않는 나무처럼, 철은 내부 구조를 지키며 버텨내죠. 외부의 자극이 사라지면, 스스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성질인 복원력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힘을 더 강하게 가하여 어느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상황은 급격히 달라집니다. 응력이 항복점을 넘어서면 철은 더 이상 이전의 형태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내부 결정 구조가 영구적으로 변형되며, 재료는 소성영역으로 진입합니다. 이때부터 철은 작은 힘에도 빠르게 늘어나고, 형태는 비가역적으로 바뀝니다. 한 번 변한 구조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응력–변형률 곡선에서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완만하게 이어지던 선은 갑자기 기울기를 바꾸고, 질서 있던 반응은 급격한 변화로 전환됩니다.
탄성영역의 철은 외부의 압박과 위기 속에서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외부적인 불안과 불안정이 있더라도, 감정적인 반응으로 대응하지 않음으로써 복원력을 유지합니다. 철이 탄성영역 안에서 힘을 흡수하듯, 상황을 견디며 중심을 지키는 자세를 견지하죠.
그러나 움직여야 할 순간이라면 소성영역의 철처럼 주저 없이 행동하고 과감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철의 성질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진정한 강함이란, 항상 버티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지를 아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되, 움직여야 할 순간에는 신속하게 행동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매번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에게 메달을 안겨주는 효자종목 중에 대표적인 경기가 바로 양궁입니다.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양궁은 전 종목(혼성 단체, 남자 단체, 여자 단체, 남자 개인, 여자 개인)에서 금메달을 석권하며 다시 한번 세계 최강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여자 단체의 연속 우승 기록(10연속 금)은 위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성과이죠. 양궁은 1~2초의 순간에 승부가 갈리는 종목입니다. 바람이 스치고, 손끝이 떨리며, 관중의 응원과 부담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 찰나에 화살은 떠나갑니다. 기술이 물론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 기술을 매번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결국 멘털입니다.
한발 한발 화살을 날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이 먼저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흔들리는 감정이 손끝을 흔들고, 조급함이 호흡을 무너뜨리고, 한 발의 실수가 다음 화살까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양궁은 기술 훈련만큼이나 긴장 조절, 호흡, 집중 유지를 반복합니다. 실제로 엘리트 양궁 선수들의 심리 전략을 다룬 연구에서도, 다음 샷을 위해 침착함을 유지하고 깊은 호흡으로 긴장을 관리한다는 선수들의 인터뷰가 핵심으로 제시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실전에서 흔들릴 요소를 미리 경험시키는” 방식입니다. 경기장은 늘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방향, 관중 소리, 빛, 온도, 압박감—변수는 매번 새롭게 선수의 심리를 시험합니다. 한국 양궁은 이런 변수를 ‘운’으로 두지 않기 위해, 실제 경기장과 유사한 환경을 구현하거나(올림픽 경기장 복제, 시끄러운 장소 등), 바람 등 자연조건에 대한 적응 훈련을 병행해 왔습니다. 이 훈련의 목표는 단순 적응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갖게끔 하는 것이죠.
긴장과 압박이 몰려와도 그 감정을 그 자리에 두고, 몸과 기술을 태산처럼 움직이지 않게 두는 훈련들 속에서 대한민국 양궁의 위대함이 나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갈대는 흔들리지만 뿌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를 이보다 잘 표현한 문장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단지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로만 보이는 갈대에게도 반전이 있습니다. 갈대의 뿌리는 땅속 깊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1m 정도로 깊이 파고들어 줄기가 뻗어나가고, 이러한 줄기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물가나 습지처럼 불안정한 환경에서도 갈대를 지탱해주고 있죠. 가볍고 약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항로에서 잔잔한 파도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때로는 무지막지한 태풍이나 엄청난 크기의 파도가 닥쳐오기도 하죠.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외부가 아니라 내면입니다. 바뀌지 않는 외부의 상황들에 기대어서는 결국 무너지는 건 자신입니다. 다만 그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관조하면서 내면마저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속에서부터가 위기를 헤쳐나가는 시작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사람을 흔드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한 자신의 판단입니다.』
하나의 명언이 하나로 흐르다.
– 일언일맥(一言一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