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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나의 행복일기 May 26. 2024

슬로우 러브

‘우리 아이는 조금 다를 뿐입니다.’ 

 그동안 읽은 느린 아이 양육에 관한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찾은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책의 저자인 데보라 레버를 직접 만나고 싶다. 

데보라 레버의 아이는 ADHD,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은 뒤부터 여러 번 전학을 다녀야 했다. 아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네덜란드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2006년에는 비전형적인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위해 ‘틸트 페어런팅’ 커뮤니티를 설립했다. ‘틸트’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을 의미한다. ‘틸트 페어런팅’은 내 아이를 위한 맞춤 교육을 추구하며 비전형적인 아이들을 지지하는 부모들의 학습공동체이다. 

 느린 학습자에 대한 정보를 뒤지다가 한국에는 틸트 같은 커뮤니티가 없는지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음발달지원센터를 만났다. 느린 학습자 당사자 교육뿐만 아니라 교재 연구, 제작, 강의까지 폭넓게 활동하는 단체였다. 어느 날 블로그를 보니 이음발달지원센터에서 느린 학습자에 대한 오프라인 교육을 한다는 공고가 있어 바로 신청했다. 토요일 오전, 아이들을 시어머님께 맡기고 교육에 참석했다. 십여 명 정도의 부모들이 강의를 들었다. 부모들의 초조함, 불안감이 뒤섞여 강의장은 입술이 파래질 정도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강사는 긴 생머리를 한 차분한 인상의 여성이었는데 웩슬러 지능검사 해석방법부터 느린 학습자에 대한 특징까지 유익한 내용을 강의했다. 언어치료사로 일을 하면서 부모들을 따라오는 발달장애 아동들의 형제들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눈맞춤을 잘 못하거나 묻는 말에 대답 못 하는 등 사회성이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하다 보니 느린 학습자로 불리는 경계선 지능인에 대해 알게 되어 경계선 지능인 전문 발달지원센터를 설립했다고 했다. 

 강사는 대구에서도 부모 자조 모임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음발달지원센터로 부모 자조 모임에 대한 문의가 많이 온다고 했다. 강사가 참석자들의 연락처로 카톡방을 만들어도 되겠냐고 묻자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강의에 참석한 마을도서관 관장이 연락을 담당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교육을 다녀와서 몇 주가 지나도 카톡방은커녕 깜깜무소식이었다. 대구에서는 이런 모임을 만들기가 어렵나보다 짐작했을 뿐이다.

 호야를 데리고 발달센터를 다니고 북클럽에서 느린 아이 관련 책도 꾸준히 읽고 있었지만, 고구마 먹다 체한 듯 뭔가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이 마음에 계속 머물렀다. 느린 학습자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인스타를 보다가 ‘느린 학습자 성장지원 전문가’ 과정의 홍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강의 기간은 5개월 정도였고 느린 학습자에 대한 이해부터 사회성, 진로까지 강의 내용이 충실해 보였다. 다행히도 교육 장소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시간대도 적당했다. 느린 학습자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터라 바로 신청했다. 이전에도 느린 학습자 관련 교육이 있나 열심히 검색하곤 했는데 대부분의 교육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진행되었다. 대구여성인력개발센터에 아동맞춤학습지도사라는 교육 과정이 있어 전화로 문의하고 센터에서 상담도 해 보았는데 교육 수료 후 지역아동센터 같은 기관에서 전일제 근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포기했었다. 드디어 느린 학습자 관련 제대로 된 강의를 듣게 된다니 기쁘고 설레었다. 

강의를 듣다 보니 호야가 발달지원센터에서 받는 수업이 괜찮은지 의문스러웠다. 이음발달지원센터 김 대표에게 연락해서 아이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컨설팅을 받았다. 김 대표와 대화하던 도중 내가 대구에는 왜 부모회가 없냐고 하자 김 대표가 어머님이 만드시면 되죠, 라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만들라니. 손사래를 치며 저는 그런 거 하는 사람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사교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내가 부모회를 만든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 모임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조직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여왕벌 같은 사람이 하는 거 아닌가. 

 김 대표는 대구에서 조례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가을쯤에 느린 학습자 관련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하는데 부모 대표로 토론자로 참석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대구는 느린 학습자 조례 제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늦은 편인데 정치적인 문제로 계류 중이었다. 조례가 있어야 호야를 비롯한 느린 학습자 아이들이 사회에서 지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아 토론회는 참석하기로 했다. 

 ‘느린 학습자 성장지원 전문가’ 과정이 중반을 넘어갈 무렵 경계선지능인지원법 제정추진 연대(경지추) 상임대표의 차례였다. 경지추는 기본법 국회 통과를 목표로 한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였다(유감스럽게도 올해 국회에서는 기본법 통과에 실패했다). 상임대표는 조례는 강제성이 없으므로 기본법이 필요하고 부모들이 목소리를 내는 지역 자조 모임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지역에 본인이 직접 가서 부모 자조 모임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춘천에서 대구까지 달려온 상임대표의 뜨거운 절실함은 눈치만 보고 있는 엄마들의 차가움과 민망스러울 정도로 대비되었다. 대구는 아직 조례도 없는데, 기본법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기본법은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처럼 경계선 지능인 기본권리에 관한 법이다. 기본법이 있어야 매년 느린 학습자를 위한 국가 예산이 책정되고 체계적인 지원이 가능해진다. 뭔가 바꿀 수 있겠구나, 싶은 기대감과 왜 아무도 움직이지 않지, 하는 답답함이 뒤죽박죽되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느린 학습자 성장지원 전문가’ 과정의 마지막 수업 날이 다가왔다. 강의를 기획한 마을도서관 관장님이 나에게 수업 끝나고 남아 달라고 부탁했다. 수업 후에 보니 사람들이 대여섯 명 정도 모였다. 그 자리에 있던 김 대표는 코로나에 걸려 집에 있는 내내 대구에서 부모 자조 모임을 어떻게 하면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했다. 엄마들은 여전히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김 대표의 주도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린 학습자를 위한 부모 자조 모임을 만들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참석한 사람 중 자녀가 경계선 지능으로 확진된 부모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뿐이었다. 김 대표가 누가 대표를 하겠냐고 물어서 나는 일단 공동대표를 제안했다. 김 대표가 자조 모임을 진행하려면 일종의 틀이 필요한데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집에서 한 권씩 가져와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본인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어떻겠냐고 물었고, 여기에 딱히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일단은 그림책 모임으로 방향을 잡았다. 

 인스타와 오픈카톡방에 공지글을 올렸다. 첫 모임을 시작하는 날, 마음이 콩닥콩닥 두근거렸다. 사람이 얼마나 올지 궁금했다. 모임 장소는 ‘초록리본도서관 조이앤북’이었다. 이음발달지원센터에서 떡을 해주셨고 마을도서관 아띠에서 음료를 제공했다. 엄마들이 대여섯 명 정도 그림책을 들고 모였다.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닉네임을 정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하던 분위기가 본인 닉네임 소개를 하고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살아온 배경과는 관계없이 아이들을 위해 모인 엄마들 사이에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동질감이 있었다. 같은 음역대로 말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편안함이랄까. 부모회 이름을 정하자는 말이 나와 여러 이름을 놓고 투표하였는데 최종적으로 느린 사랑, 슬로우 러브라는 뜻의 ‘슬로브’가 선정되었다. 

 ‘우리 아이는 조금 다를 뿐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 소제목은 ‘없으면 만들자’ 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가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한데 어떡하지, 아이를 어떻게 보통 아이처럼 끌어올리지, 라는 관점에서 아이 특성을 인정하고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학교와 사회환경을 바꾸자, 라는 관점으로 바뀌었다. 산적해 있는 문제들을 한꺼번에 다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천천히 혼자 가던 길에 손 잡고 떠날 친구들이 생겼다. 가파른 오르막 넘어 끝이 보이지 않는 정상까지 외롭지 않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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