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어느 날의 일입니다. 엄마가 베란다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습니다. ‘눈이 오려나? 올겨울에는 눈이 별로 안 왔네.’ 엄마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1시가 넘었습니다. 엄마는 핸드폰의 구글 캘린더를 확인합니다. 느린 아이 아홉 살 호야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버스 타기, 기차 타기, 지상철 타기입니다. 3학년이 되면서 일주일 중 하루는 학교가 끝난 후, 혼자서 버스를 타고 발달센터로 갑니다.
이날은 오후 1시 50분에 시지각 수업이 있습니다.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1시 20분에는 학교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엄마는 시간개념이 없는 호야가 센터에 늦을까 걱정입니다. GPS 위치가 종종 이상하게 찍히기도 하지만 아이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는 아주 유용합니다. 엄마는 구글이라는 기업에게 감사한 마음마저 듭니다. 구글패밀리 링크가 없다면 엄마가 학교 정문에서 호야를 매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죠. 엄마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은 센터 수업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함입니다. 1학년 때에는 아이 위치만 파악할 수 있는 위치추적기를 사용했습니다. 2학년이 되니 엄마가 학교 앞에 조금만 늦게 가면 아이가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호야 찾아 삼만리를 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핸드폰을 생각보다 일찍 사게 되었습니다.
이날은 1시 20분이 지났는데도 핸드폰에 나오는 호야의 위치가 계속 학교 근처 놀이터입니다. 엄마가 호야에게 전화합니다. 호야는 안 받습니다. 조금 있다가 엄마가 호야에게 다시 전화합니다. 호야는 여전히 안 받습니다. 호야가 놀이터에서 놀 때 종종 가방에 핸드폰을 두고 놀기도 해서 엄마는 아이가 전화 소리를 못 듣나 보다 생각합니다. 엄마는 얼른 차를 타고 학교 앞 놀이터로 갑니다. 이러다가 센터에 늦게 생겼습니다. 마음이 급해집니다. 센터 수업은 비용이 많이 듭니다. 시지각 수업은 호야가 듣는 수업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수업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엄마는 학교보다 센터 수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초능력을 배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학교에서 그런 것을 호야 수준에 맞추어 가르쳐 주지는 않습니다. 얼른 차를 몰고 5분 만에 학교 근처로 갑니다. 학교 근처에는 주차단속구간이 많아 주차하기가 어렵습니다. 도로변에 비상 깜빡이를 켜놓고 차를 세웁니다. 엄마는 황급히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놀이터에 가서 보니 호야는 미끄럼틀에 앉아 핸드폰으로 뽀로로 영상을 보고 있습니다. 뽀로로, 크롱의 명랑한 목소리가 놀이터에 낭랑하게 울립니다. 다른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학원에 가 있을 시간입니다. 하늘에는 눈이 오려는 모양인지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습니다. 호야는 핸드폰을 보고 히죽히죽 웃고 있습니다. 재미난 장면이 나오는 모양입니다. 엄마는 열 살이나 된 호야가 뽀로로는 인제 그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의사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이 생활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하루에 서너 시간씩 뽀로로 영상을 본다고 했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아이의 부모가 얘는 할아버지가 되어도 뽀로로를 볼 텐데 그것이 슬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엄마가 호야를 부릅니다. 엄마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호야는 미끄럼틀 뒤로 쏙 숨어 버립니다.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건가, 엄마는 어이가 없습니다. 놀이터에 다른 아이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들 학원에 간 모양입니다. 엄마는 친구 없이 놀이터에서 혼자 핸드폰 보는 호야가 안쓰럽기도 합니다. 엄마는 화가 치밉니다. 뇌의 편도체가 활성화되어 엄마 몸 구석구석 아드레날린이 맹렬하고 빠르게 파고듭니다. 뇌에서 천천히 이성적인 생각을 하는 전전두피질은 억제됩니다.
‘내 이 녀석을…! 뭐 이런 게 있노?’
자, 이제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산에서 멧돼지 떼를 만났을 때처럼 엄마 뇌의 편도체가 작동합니다. 멧돼지 떼를 피해 도망가든지 용감히 맞서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엄마는 나는 어떤 상태인가, 호야의 입장은 어떤가, 호야의 의도는 무엇인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호야가 엄마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전화를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 뽀로로가 너무 재미있어서 방해받기 싫었습니다. 엄마 전화가 왔을 때 뽀로로가 상어에 잡아먹힐까 봐 도망가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오고 있었거든요. 호야는 지금 버스정류장으로 가지 않으면 센터에 늦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엄마의 전전두피질도 이런 내용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힘쓸 도리가 없습니다. 엄마는 멧돼지 떼에 용감히 맞서기로 결심합니다.
선택은 하나입니다. 엄마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숨어있는 호야를 찾아 센터로 지금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뭐 했냐고 물으니 친구와 떡볶이를 사 먹었다고 합니다. 어제 받은 용돈을 다 써버린 것 같습니다.
엄마 전화를 일부러 안 받으면 안 돼, 그럼 용돈 안 줄 거야,라고 말합니다. 이건 일종의 협박인데, 말해놓고도 엄마는 살짝 뜨끔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엄마는 호야에게 미안해져서 묻습니다.
“센터 다니는 것 힘들어? 그만 다니고 싶어?”
호야가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그만 다니고 싶어”.
아차, 괜히 물었네, 엄마는 생각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그냥 하고 싶은 말 해버립니다.
“네가 할 일 제대로 안 하면 좋아하는 수영, 짬뽕 먹기 못해”. 그러면서 엄마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내가 화를 내지 않았어. 그건 잘한 거야. 호야는 엄마의 얼음장 같은 차가운 말투에 그만 마음이 팍 상해버렸습니다. 호야는 엄마의 이런 사무적인 말투가 너무 싫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짬뽕을 못 먹는다니, 너무 하잖아!’ 삐딱해진 마음을 숨기지 못합니다.
센터에 도착하자 호야는 엄마가 건네는 수업자료를 홱 낚아채더니 시지각 수업에 들어갑니다. 사십 분의 수업 시간이 끝나고 다시 만난 호야는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뛰어나가 버립니다. 엄마는 섭섭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혼자 버스 타고 집에 가는 연습을 미리 해 둔 것은 다행입니다.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5초 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합니다. 감정코칭 수업에서 배운 심장 호흡법입니다. 십여 분 정도 있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해 봐야지’.
‘북클럽에서 들었는데 아이와 핸드폰 사용에 대한 계약서를 쓰라고 하던데, 그걸 찾아봐야겠다.’
하지만 엄마의 계획과는 달리 핸드폰 사용 계약서는 쓰지 못했습니다. 센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호야는 뒹굴뒹굴 쉬고 싶어 합니다.
며칠 뒤 소파에 앉아있는 엄마에게 다가와 호야가 먼저 말을 겁니다.
“엄마, 나도 바쁘면 핸드폰 못 받을 수도 있어!”
엄마는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꾹 참고 말합니다.
그래 그렇구나, 엄마는 생각합니다.
호야가 이렇게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은 처음 듣습니다. 이 정도로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니, 우리 호야가 세상 사는 기술을 익히고 있구나.
힘차게 천천히 갑니다. 느린 아이 호야와 엄마는 또 하루 새로운 계단 하나를 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