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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Mar 28. 2024

개새끼 & 호구 밸런스

회색 사람들

평일 아침은 늘 바쁘다.

특히 목요일 아침은 컨디션도 최악이다.

차라리 금요일은 하루만 버티면 된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목요일은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쌓인 피로에 하루를 더 쥐어 짜내어 버텨야 한다는 부담감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깨를 짓누른다.


평소 간단한 화장만 하고 다니는 편인데 오늘은 그조차 찍어 바를 기력이 없고

무기력감에 밍기적대다보니 시간도 없어

썬크림과 팩트만 챙겨 맨 얼굴로 차에 탔다.


신호에 걸리지 않아야 정시 출근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신호에 걸렸기에 일단 썬크림부터 이마, 코, 양쪽 뺨, 턱에 연지곤지 찍듯 찍어놓고

남는 건 대충 목에 문질러 놓고

차마 펴 바르지는 못한 채 신호가 바뀌어 우회전을 하는데 골목 양쪽으로 쭉 갓길주차가 되어 있었다.


휴,

빡세네.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니다.

늦어서 나름 가로질러 가는 길을 선택한 거였는데,

이럴 수가.

마음은 급하고 길은 좁고 내 차는 대형 SUV이고, 이미 들어선 이상 뒤로 나갈 수도 없었다.

도전! 을 속으로 외치며 서서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얼마나 갔을까?

쿵, 왼쪽에 주차되어 있던 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쿵, 까지는 아니고 콩, 정도 였던 거 같다.

확실히 부딪히긴 했다. 차가 흔들했으니까.

그리고 그 차는 헤드라이트가 켜진 상태였다.


......

일단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상대 측의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

어머, 세상에.


훈남이잖아.


아니,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는 미남이었다. 두부상이지만 훈남보다는 확실히 미남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부상의 개새끼일수도 있지?


난 긴장된 마음으로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최대한 예쁘게 또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 어머, 부딪혔죠. 죄송해요. 일단 연락처를......


말하며 폰을 내밀려는데 갑자기 두부가 싱긋 웃으며 내 말을 끊고 말했다. 입매가 이병헌을 닮았다.


- 괜찮습니다.


뭐야, 잘생겼는데 착하잖아? 아침부터 비도 오는데 상큼하게 왜 저래?

출근이 늦은 것도 잊고 조증이 돋아버렸다.

죄송합니다, 감사해요! 를 연거푸 말하며 창문을 올리고 다시 출발하는데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 웃을 때 저렇게 싱긋 올라가는 입매가 복을 담는다더라, 스스로 복을 쌓네, 뉘집 아들인지 번듯하이, 어떤 여자가 데려가려나, 직업이 뭐지? 이 시간에 차 안에서 뭘 하고 있었지? 등등 흐뭇하기 웃으며 별별 호기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그러다가 아뿔사?

젠장!


백미러를 보니 아까 얼굴에 찍어놓은 썬크림이 고드름 모양을 만들며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최근에 당한 개망신을 액땜으로 한동안 망신 뻗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세상은 만만치 않다. 예상되로 되는 게 잘 없다.


두부는 어쩌면 내 몰골이 무서웠던 걸까?



개새끼도 많고 호구도 많은 세상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개새끼들이 검정색, 호구들이 흰색이라면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못된 회색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서 색이 너무 짙어지거나 너무 옅어지지 않도록

색깔의 중심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개새끼도 호구도 될 수 있는 한 마주치고 싶지 않다.

개새끼는 날 갉아먹고, 호구는 갉아먹고 싶은 욕구를 이를 꽉 깨물고 참아야 하니까, 양쪽 다 고되다.


한때 직속상사가 개새끼, 내 밑으로 들어온 신입이 호구였던 적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그 때만큼 힘들었던 적이 없다. 하루가 멀다하고 개새끼 때문에 열받고 호구 때문에 속이 터졌다.

개새끼는 책임소재가 있거나 남들 앞에 나서야 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모두 내게 맡겼고,

호구는 타 부서의 일들을 한 보따리씩 짊어지고 와서 결국 다 감당하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나는 개새끼에게 뜯어 먹히는 호구가 되고 싶지 않았고,

호구를 뽑아 먹는 개새끼도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려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회사에서 온갖 에너지를 다 쏟아내다 보니 워라밸도 최악이었다.

눈 뜨면 출근하고 어두워지면 퇴근하고 자면서도 처리하지 못한 업무들이 자꾸 떠올라 불면에 시달렸고 주말도 공휴일도 없이 개새끼의 연락에 출근해야 했으며, 호구를 대신해 타 부서 직원들과 업무 핑퐁을 하느라 정신 차리고 보니 사방팔방이 적인 싸움닭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6개월 정도 그 지옥같은 시간을 버텼는데 그 때도 나를 지탱해준 건 다수의 회색사람들이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못된 사람들이

가끔은 나를 대신해 개새끼에게 펀치를 날리고, 호구에게 정신이 번쩍 들 냉수마찰 시키며

내 고통의 밸런스를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도 까맣게 타지 않고 희게 새지 않고 무채색 B로 남을 수 있었다.



가끔 우주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거대한 존재의 탱탱볼이 아닐까 상상하는데

작은 탱탱볼 같은 우주 속에 코딱지만한 지구,

그 안에서도 꽤 작은 나라, 작은 도시, 작은 회사, 작은 아파트 단지, 작은 학교, 작은 동호회에

참 별의별 개새끼와 호구들을 보네 싶을 때가 있다.

마주치고 싶지만 그들은 어디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등장한다.

회색사람들과 적당히 지지고 볶는 건 평화롭다.

하지만 불쑥불쑥 시꺼먼 개새끼나 순백의 호구를 마주치면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다.

뜯어 먹히고 뜯어 먹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마주칠까봐 두려운 존재,

세상 무수한 회색 사람들 속에 틀린 그림처럼 숨어 있는 개새끼와 호구들.


그러나 사실 그들과 마주치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는 거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못된 회색사람이고 싶다. 누구에게도 개새끼나 호구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사회에서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개새끼나 호구가 되는 건 싫다.



문득 아침에 마주친 두부상 훈남, 아니 미남이 떠오른다.

웃으며 그냥 가라던 그 회색 사람, 왠지 그의 미소가 어색했던 것 같다.

썬크림 칠갑한 나를 보며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그의 눈에 나는 차 박아놓고 차에서 내려보지도 않는 개새끼는 아니었을까?

가란다고 그냥 홀연히 가버린 개새끼.


아니 어쩌면 호구였을지도?

내 차가 더 긁혔는데,

두부남은 거기 불법 주정차 중이었는데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가버린 호구.


어렵다.

다수의 회색사람들 속에서 나도 적당한 회색사람으로 섞여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밸런스를 잘 잡는 회색사람이고 싶다.

회색사람들과

잘 섞여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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