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성 Mar 28. 2024

삐빅- 열폭버튼이 눌렸습니다 [1]

능력자에 대한 소회

회사에 능력자가 하나 있다.

부서는 다르지만 워낙 유명한 사람이다.


사람이 매우 합리적이다.

똑똑하고, 업무를 굉장히 효율적으로 처리하며, 빠른 업무처리 방법을 공유함으로써 부서 내 동료들의 업무처리를 돕는다.

그로 인해 부서 전체의 성과도 높아지니 당연히 부서장의 신임도 독차지 할 수밖에.


직급에 비해 젊고, 기발하고 참신하고,

업계 트렌드도 잘 따라가고,

나이불문 직급불문 누구에게나 일 잘 한다고 인정받는 사람.


스스로도 본인이 똑똑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심지어 외모도 괜찮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잘생긴 쥐상이다.

깔끔한 뿔테 안경에 피부도 관리를 받는지 도드라지는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하다.

옷도 언제나 깔끔하게 입고 다니고,

와이프도 굉장한 미인이라 들었다.

적당한 나이에 결혼했고 애들도 영재원에 다닌다나?


어느 조직에나 하나쯤 보이는,

재수 없게 완벽한 스타일.


아니, 완벽해보이는 스타일이랄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그래,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렇다.



첫번째 문제는

그가 그렇게도 영특한 머리로

자기네 부서의 업무들을 슬금슬금,

하나씩 둘씩 타 부서로 넘긴다는 거다.


교묘하게, 교활하게, 영특하게.


사실 어느 조직이나 그렇듯

칼로 자르듯이 업무의 경계를 정하기란 어렵다.

말은 가져다 붙이기 나름이고

나름의 논리와 화려한 말솜씨만 된다면

누군들 이 업무 내 업무 아니오,

그쪽 부서 성격에 더 맞는 업무요! 못할까?


그 사람은 그레이존을 참지 못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매한 업무는 옆 부서 혹은 옆옆부서로 기필코 넘기고야 만다.

물론 그와 같은 부서 직원들은 그를 칭송하다 못해 찬양한다. 싸우거나 설득거나 모함하거나 구걸하거나 어떻게든 일을 튕겨내고 자신의 부서로 돌아갈 때, 그는 마치 찻잔이 식기 전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왔던 관우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 마치 조직의 부조리를 바로 잡은 정의의 사도가 따로 없다.


하지만 그에게 당한, 새 업무를 떠맡게 된 부서에서 그는 악인일 뿐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는 일단 완벽하지 않다.


두번째로 그는 역지사지가 잘 되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


지난 주, 누군가 전 직원을 상대로 파일 하나를 공유했는데 페이지가 제대로 나눠져있지 않았다.

시스템이 바뀌는 부분에 대한 연수자료였는데

당장 다음 날 오전부터 적용해야 했으므로 시간이 부족했을 거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당자를 이해했다. 여백이나 표가 잘리는 부분이 가독성이 떨어지긴 했지만 대세에 지장은 없었다. 조금 불편해도 앞뒤로 몇번 왔다갔다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화면으로 보려다가 눈이 피로해 출력해서 보려던 참이었다. 여백이 너무 긴 부분만 대충 편집할까 싶다가 귀찮아서 그냥 뽑아보자 하고, 출력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었다.


능력자에게 메시지가 왔다.

전 직원 대상 메시지였다.


- 보시기 편하게 편집한 파일을 공유합니다.


그래, 내 너 그럴 줄 알았다.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없었겠지. 업무효율이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빨리?


시간을 확인하니 담당자가 연수자료를 보낸지 정확히 4분이 지나 있었다.

괜히 심통이 나서 원래 자료로 그냥 출력할까 하다가

이성을 되찾고,

능력자의 파일을 열어봤다.


역시.


줄 정리, 열 정리, 페이지 나누기, 표 나누기 그리고 표 제목행 반복까지

훨씬 보기 편하고 깔끔한 자료가 완성되어 있다.


오냐, 참 잘났다.


하지만 잠깐.


이 상황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잘난 건 확실하지만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세히 봐야 하지만 분명히 그렇다.


왜냐하면

해당 연수 담당자에 대한 배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초 스피드로 편집한 그 파일을 담당자에게 보냈을 것이다.

담당자가 직접 다시 전 직원에게 공지할 수 있도록.

민망하지 않도록.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저 얼른 자잘한 편집기술을 자랑하고 싶었겠지.

누구보다 빠르게,

그래야 과시가 되니까.


그거다.

그게 바로 증거다.


똑똑할지는 몰라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란 증거.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증거 한 가지가 더 있다.


지난 가을,

회사 건물 1층 흡연 구역 앞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본 장면이다.

잎이 반쯤 남고 반쯤 흩날리는 단풍나무 아래에서

그는 아주 열심히 동료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뒤로 네 걸음만 가보라든가,

서로 더 붙으라든가,

낙엽을 하늘 높이 흩뿌려 보라든가,

나뭇가지를 흔들어 눈 내리듯 해보라든가,


이런 저런 지시를 하며 최고의 샷을 건지기 위해

아주 유난을 떨고 있는 그였다.


동료들의 반응도 가관이었다.


구도가 좋다,

감각이 있다,

사진 배운 적 있냐,


꺄악 꺅 거리며 하도 난리를 떨어

근처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무리가 들어가고

나는 들었다.


어디선가 빗자루를 들고 나타난

미화원의 나지막한 한 마디.


- 염병천병을 떨고 자빠졌네.


불과 몇 시간 전,

열심히 낙엽을 쓸어 모았던 미화원의 빗질은

능력자의 사진에 대한 열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역시 자세히 보아야 한다.

오래 보아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이 글을 읽을 리 없지만 언젠가는 꼭 알면 좋겠다.

스스로가 완벽하지는 않단 사실을.

완벽하다는 착각에 심취해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늘 자신이 옳고 합리적이고, 누구에게나 또렷한 눈빛을 발사하던 그 순간들이

한번이라도 수치심이 되어

그를 공격하면 좋겠다.


그렇게 잘난 사람들보다

못났어도 여러 방향에서 세상을 따뜻하게 보는 사람들이 더 잘나가면 좋겠다.


내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쓰고 보니 내가 무슨 스토커마냥 하루종일 저 사람만 쫓아다니고 관찰하는 느낌인데 절대 그렇지 않다.

워낙 회사에서 능력 좋다고 인정 받는 사람이다보니

나같은 방구석 여포의 타겟이 되었을 뿐,

특별한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다.


또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남자라고 했지만

사실 능력자의 성별은 여자다.


...... 여자라고 하니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상대로 시기질투에 눈이 먼,

못 생기고 멍청한 아줌마가 된 느낌이네.


다시 번복해야겠다.

그는 사실 남자가 맞다.


그런데 이러면 내가 그 남자를 이성적으로 좋아해서 자꾸 눈이 가는 느낌이고......



후.


어쨌거나 저쨌거나 확실한 건

나는 쥐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두부상이 좋다.


이전 06화 개새끼 & 호구 밸런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