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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Mar 31. 2024

삐빅- 열폭버튼이 눌렸습니다[2]

명품백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왜?

왜?? 왜???


왜 명품백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해? 도대체 왜?

아니, 나 정말 궁금해서 그래.

하나 정도는 몇 개를 말하는 거야? 하나야, 두개야, 하나 이상이야, 1.5개야?

화내는 게 아니라 진짜! 진심!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왜 그게 있어야만 해?


왜애애애애?!



얼마 전 결혼식에서 만난 엄마 친구들이 엄마에게 그런 말을 했단다.


야, 너 명품백 없니?

너 검소한 거 알고 그런 소박한 가방도 잘 어울리는 거 아는데 그래도 명품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먹고 살기 힘든 상황도 아니고 애들도 다 컸겠다,

하나 정도 장만해. 벌 만큼 벌었고 모을 만큼 모았잖아?

혹시 있는데 장롱에 모셔놓니?

야, 그러지마라. 우리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이런 날 꺼내 들어야지!


......

... 우리 엄마 명품백 없는데요?


네,


없어요.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적이 없어요.

엄마도 없고  저도 없어요, 명품백.

루이비통, 구찌, 셀린느, 에르메스, 샤넬...... 그런 거 없.다.고.요.


정말 궁금하다.

가방은 필요한 짐들이 쏟아지지 않게 잘 담아지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물론 예쁘면 더 좋고 가격 착하면 더 좋고... 꼭 명품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게 하나도 아니고 두개도 아니고 열개도 아니고 하나 ‘정도’는 꼭 있어야 하며 그걸 타인에게 강요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나치게 비싼 가방이 좋다고 사는 것도 이해가 되진 않지만 가치관의 차이라 치고, 피차 서로 이해되지 않는 거 강요는 하지 말아야지. 가치관의 다름을 존중해야지. 그런 가방 들고 다니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사서 들고 다니라고 강요하지도 않아야 맞다.


어쩌면 참지 못하고 터져나온 무시와 과시의 콜라보일까? 사십년 친구끼리?

못 사는 형편인 걸 알고 상대적 행복감을 만끽하며 내뱉는 말일까? 설마 친구한테? 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평소에는 억누르고 살아가는 인간혐오가 마치 밟았던 스펀지가 발을 떼면 다시 스물스물 부풀어오르듯이 고개를 든다.

인간은 왜 남의 결핍에서 희열을 느낄까?


엄마는 또 시작이라며 혀를 찬다.

명품이 뭔지도 모르게 나를 키운 것에 대한 불만은 없지만 저런 아줌마들과 친구랍시고 매달 두어번씩 만나 자식자랑 사위자랑 며느리자랑을 듣고 앉아있는 엄마는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사십대 아줌마지만 명품백이 없다.

단 하나도 없다. 앞서 말했듯 있었던 적도 없다.

대학시절 늘 에트로 가방을 어깨에 끼고 다니던 예쁘장한 과 동기를 보며

'어머, 저 가방 참 예쁘다!' 했다가 비슷한 패턴에 디자인만 다른 걸 옷가게에서 산 적이 있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열심히 메고 다녔다.

그녀의 가방이 에트로인줄도 몰랐고 내가 들고 다닌 게 가짜인 줄도 몰랐던 시절이다.

나중에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그 가방 들고 다니지 말라고 말해줘서 알았다.

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짓을 한 건지.

나쁜 놈. 그냥 모른 척 해주지.


그때부터 다른 사람이 들고 다니는 가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패턴이 에트로구나,

저건 구찌구나, 저 이상한 도형들이 반복되는 게 루이비통이구나.

저런 건 어디서 사는 걸까?

어릴 때부터 누가 드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엄마는 먹거리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지만 가방이나 옷은 재질만 좋으면 브랜드를 따지지 않았다.

그런 엄마 아래에서 자랐으니 나도 마찬가지,

옷이든 가방이든 예쁘고 재질 좋으면 되지 꼭 명품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신 이제 아무리 예뻐도 명품을 흉내낸 가짜들은 절대 사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다보니 행여나 실수로 가짜를 사게 될까봐 명품가방들을 유심히 살피게 되고 원치 않게 가격이라도 볼땐 좌절하고 상처 받는다. 오, 괜찮다 싶어 검색해보면 어김없이 명품라인 중에서도 가장 비싼 제품이다. 백몇싲, 몇백, 몇천.


별 것 없어 보이는,

심플한 디자인에 자물쇠가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덜렁거리며 다니는 것 같은 저 가방이 사천 만원이 넘는다고?

40도 아니고, 400도 아니고, 4000만원?


미쳤네.



물론 미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4천만원의 가치가 마치 나의 4만원과 맞먹는 사람들. 같은 시대를 살지만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그렇다. 연예인이나 재벌 3세들이 그런 가방을 들고 다니는 건 별로 타격이 없다.

그럴 수도 있지,

그들은 내가 에코백 사듯이 저런 걸 살 수도 있지.

놀라운 건 같은 동네에 살며 오다가다 보는 사람들이 그런 가방을 두어개도 아니고 몇 개씩이나 당연한 듯 가지고 있다는 거다.

얼마 전, 학부모총회 겸 공개수업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평소 후줄근하게 다니던 동네 아줌마들이 갖가지 명품들로 한껏 치장을 하고 나타났다. 프라다 가방에, 배꼽까지 내려오는 아마도 샤넬 진주 목걸이에, 신발에도 구찌, 머리에도 셀린느 핀.

우리 동네가 이렇게 부자 동네였던가?

아니면 부자가 아니라도

정말 엄마 친구들의 말처럼 '그런' 자리에 갈 때 걸칠만한 '그런' 명품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걸까?


총회날, 학교가 바로 집 앞이라 나는 가방을 들지 않고 갔다.

폰만 주머니에 넣으면 되었고, 학교 생활을 잘 하는지 교실은 어떤 모습일지 내가 보는 앞에서 친구들이랑 갈등이 있지는 않을런지 또 선생님 질문에 어떤 뚱딴지 같은 대답을 해서 나를 당황시킬런지 그런 고민들로 머리가 가득 차 어떤 옷을 입고 어떤 가방을 들지 그런 생각조차 크게 하지 못했다.

그래도 슬리퍼를 신지 않고, 평소 잘 입지 않는 불편하지만 TPO에 맞는 단정한 스타일의 보세 자켓을 입었다.

현란한 명품들의 향연 속에서도 나는 당당했다. 담담하려고 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불편한 자켓을 벗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퍼질러 앉아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 먹는데 갑자기 희안한 기분이 들었다.

묘한 소외감이랄까?


세상 사람들이 그런 자리에는 명품을 들고 걸치고 오기로 약속했는데 나만 그걸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겐 여덟개의 가방이 있는데 그 중 가장 자주 드는 건 좋아하는 언니가 떠준 뜨개가방이다.

코랄 색깔의 실로 만든 그 가방은

폰과 카드, 차키, 립스틱 정도를 넣어 다니기 딱 좋다.

또 검정 패딩 소재의 커다란 가방도 자주 든다.

이건 허기질 때 꺼내 마실 두유, 단백질바, 바나나 그리고 책 서너권까지 거뜬하다.

주로 그렇게 두 개를 번갈아 들고,

해변처럼 젖을 위험이 있는 장소에 갈 때는 알록달록 빨대를 엮어서 만든 숄더백을,

결혼식처럼 격식이 중요한 자리에 참석할 때는 십만원대 가격을 주고 산 검정 가죽 토트백을 든다.

어딜 많이 돌아 다니거나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성격이 아니라 이 정도면 부족하지 않다.


딱 좋다.


사실 밑이 뚫려 짐이 쏟아지는 것만 아니면 된다.

게다가 요즘은 질 좋은 가죽에 가격까지 착하고 예쁜 가방들도 꽤 많다.


후줄근하게 입고 머리도 부스스 대충 묶어도요,
이거 하나 딱 들면 남들이 함부로 못 봐요.


......

... 글쎄?


오백짜리 옷에 오백짜리 가방을 드는 건 논외로 두고,

천원짜리 옷에 오백짜리 가방을 드는 것과 이백오십짜리 옷에 이백오십짜리 가방을 드는 것.

둘을 놓고 본다면 당연히 후자가 정답 아닐까?


차라리 건강한 피부나 윤기나는 머릿결, 생기 넘치는 표정이라든가 꼿꼿한 자세 등이 척도가 되면 좋겠다. 그렇게 약속한다면 새끼손가락 마주 걸고 지킬 의향이 있다.

명품이 들어있던 쇼핑백까지 고가로 중고거래 되는 게 아무래도 나만 빼고 다들 암묵적으로 약속한 게 있는 모양인데,


그런 약속은 앞으로도 지킬 생각이 없다.


로또에 당첨되거나

길에서 천만원 정도 줍지 않는 이상.


...... 그렇다.

길게 썼지만 결국 돈이 많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여유만 있다면 나도 당신들의 그 암묵적 약속에 기꺼이 동참할텐데, 돈이 없어서 그런 약속 따위 지킬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다.



날이 좋다.

봄볕이 좋으니까 오늘은 에코백이다.

빨강 노랑 리본이 반복되는 내 사랑 에코백을 끈을 잔뜩 길게 늘여 크로스로 메고 나갈 거다. 읽을 책도 두어권 챙겨 넣고 나가는 길에 김밥도 사서 넣고 캔사이다도 사서 넣어야지.

그리고 공원에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야지. 크로스백은 등으로 휙 넘기면 자전거 탈 때도 지장이 없다.


그게 프라다 크로스백이 아니어도,

자전거는 앞으로 쭉쭉 잘만 나간다. 그럼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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