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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01. 2024

About LOVELY

필요조건, 충분조건.

사랑스럽다[형용사]
생김새나 행동이 사랑을 느낄 만큼 귀여운 데가 있다.


어제 공원에서 정말 사랑스러운 사람을 봤다.

농구대 근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컵라면을 먹던 중이었는데, 농구하는 중학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제인지 친구인지 모를,

키가 비슷한 남자아이들이 패스나 드리블 연습을 하며 슛도 쏘고 있었다.

운동보다 공부를 잘하게 생긴 아이들이었는데

검지로 안경을 밀어 올려가며 열심히 농구하는 모습이 귀여워 자꾸만 눈이 갔다.

그러던 중, 한 명이 공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자빠지고 말았다. 손에 상처가 났는지 가만히 앉아서 자기 손을 들여다보며 살이 까졌다 피난다 어쩌고 중얼거리는 듯했다.

그 때 우리 돗자리 옆, 캠핑의자에 앉아있던 여자가 무심한 눈빛으로 일어나며 외쳤다.


- 야, 엄마 하는 거 봐라.


여자는 검정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었고 나이는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걸음걸이만 봐도 운동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농구하던 아이들 중에 한 명의 엄마인지, 그들 형제의 엄마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코 끝에 걸쳤던 안경을 야심차케 치켜 올리며 왠지 신이 난 몸짓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농구공을 뺏어 드리블을 시작했다.

스스로 마이클조던이라 생각하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현란한 손 동작에 스텝도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걸음에서 알아봤듯 역시나 생각만큼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흡사 아가들이 처음 듣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듯한 그녀의 동작들에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까 공을 뺏으려던 아이는 넘어진 아이 손을 잡아 일으켜 캠핑의자로 오더니 물을 마시며 그녀의 농구실력을 감상했다. 당연히 폭소가 터져나왔다.


- 웃지말고 집중해서 보라고! 슛 쏜다?


슛!


...... 놀랍게도 슛이 들어갔다.

여자는 마치 축구 경기에서 골이 터졌을 때 선수들이 세레모니를 하듯 환호했고,

비실비실 웃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낄낄대며 웃는 아이들에게 더가가며 여자는 박수에 화답하듯 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상큼한 눈웃음과 함께.


아이들은 다시 농구를 하러 가고, 그녀는 캠핑의자에 털썩 앉더니 다시 안경을 코 끝으로 내려 걸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음악으로 빠져들었다.

뭘 듣는 걸까?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나 싶었는데 이내 주변을 의식하며 동작을 줄였다.

둠칫둠칫, 소극적인 움직임과 함께 그녀의 얼굴로 미소가 번졌다.


봄 햇살, 살랑이는 바람.

필랑말랑 하는 목련 꽃봉오리 아래 콧노래를 흥얼대는 여자.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언제 또 봤더라?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윰블리, 공블리, 뽀블리.

대중들에게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인기 있는 연예인들을 떠올리면 외향에서 분명 공통점이 있다 .


하얀 피부, 포동한 볼살, 긴 속눈썹, 맑은 목소리, 애교 정도.

대부분 히피펌이나 플레어스커트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이기도 하다.

한때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 그들을 흉내내며 살았다. 옷장 가득 자잘하고 알록달록한 꽃들이 수놓아진 니트와 파스텔 톤 플레어스커트들을 채우고, 주기적으로 보글보글 머리를 볶고, 사진을 찍을 땐 볼에 바람을 넣기도, 사소하지만 어려운 부탁을 할 땐 없는 애교를 쥐어 짜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나를 걷어차고 싶은,

'나 좀 엉뚱하지? 그래서 더 귀엽지?' 싶은 뚱딴지같은 말들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예쁘게 생기지 않으면 그런 컨셉은 4차원 사이코처럼 보인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런 외적 노력은 필요조건에 불과했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데에는 내적 충분조건이 존재하는데 그걸 모르고 설치며 괜한 수치심만 적립했다.

생김새가 예쁘면 사랑스러울 수 있지만 예쁘다고 다 사랑스러운 건 아니다.

나이와도 성별과도 상관없이 내면에서 묻어나오는 '러블리'는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다.

좋지 않은 인성이 미간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다.

내면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밀조밀 사랑스러운 생김새로 인기를 끌던 여배우는 하루 아침에 인성 논란으로 자취를 감췄고,

별 생각없이 틀어놓은 예능에서 보게 된 할아버지 배우는 선한 눈빛부터 진행자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미소,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의 말을 하던 그 적절한 박자감과 목소리까지 한껏 물이 오른 '러블리'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사랑스럽기 위한 충분조건,

그건 아마도 단단하고 차분한 마음, 타인에 대한 배려, 자신 있지만 자만하지 않는 태도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어제 공원에서의 그녀는 그런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다.

넘어져서 속상한 아이와 본의 아니게 밀어서 민망한 아이 둘을 모두 배려했고 적절한 유머와 센스 있는 말투로 그들을 웃게 만들어 흡사 김이 빠질 수 있는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운동 신경과 별개로 야무진 농구실력을 선보였으며 자신있게 슛을 날렸고 또 기가 막히게 성공했다. 게다가 박수를 보내는 사람에 대한 예의와 모든 임무를 마치고 다시 고요히 자신만의 음악으로 빠져드는 여유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포인트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보며 진정한 '러블리'는 노력으로 쉽게 얻을 수도, 섣불리 흉내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랑스러운 내면을 완성한 사람은 이토록 여운이 길다.

자식들에게 봄을 선물하려 쑥을 캐는 할머니의 주름 가득한 손이라든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맞춤법을 틀려가며 쓴 엄마아빠 사랑해요 편지라든가,

사랑하는 남자의 고된 하루를 토닥여주려 팔짱을 끼고 올려다보며 짓는 미소,

할아버지의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는 대학생의 운동화 등이 사랑스러운 이유도 아마 비슷할 거다.

생김새 이면에서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랑이 그들을 사랑스럽게 만든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를 향한, 애인을 향한, 처음 보는 타인을 향한 사랑 등.

그러고 보니 내가 예전에 사랑스럽기 위해 했던 히피펌이나 입었던 플레어 스커트 같은 것들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 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려는 알맹이 없는 노력이었다. 사랑만 충만하다면 검정 아디다스 트레이닝복도 그토록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데 말이다.



코딱지만한 세상에서 복작복작 살아가며 서로 할퀴고 상처주는 사람들이 많다. 이기적이고 말로 남을 후들겨패는 사람들. 아무리 생활을 단순화해도 이틀에 한명꼴로 그런 사람들을 마주친다. 그리고 어김없이 상처받는다. 아무리 받아도 상처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가뭄에 콩나듯,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덥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충 일년에 한두번 꼴로 나타나는 것 같다. 새치기하고 자비란 없고 자기 생각만 하고 참지 못하고 자신의 부를, 지력을, 인맥과 학력을 자랑하기 바쁜 고만고만한 인간들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두들겨 맞고 아무에게도 위로는커녕 같은 사람이라고 인정조차 받지 못하다가 이 썩을 놈의 세상, 더럽게 힘들어서 못해먹겠네! 쌍욕이 나올 때쯤 사랑스러운 그들이 짠-하고 나타난다.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생각도 못했던 상황에서.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다. 나도 어제 오랜만에 웃었다. 사랑스런 그녀의 걸음걸이와 표정과 말투와 농구실력 덕분에.



봄이다.


우울증과 강박장애에 시달리는 나같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일으켜주는,

사랑스러운 계절이다.


나에겐 몇 번의 봄이 남았을까? 100살까지 산다 치면 60번 정도 남았나? 그 중 어느 봄날, 나도 누군가의 시선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한번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말로 나를 후들겨패던 사람들과 머리채 잡고 싸우지 않길 잘했다. 비아냥대는 사람에게 비아냥으로 응수하지 않길 잘했다. 졌잘사! 졌지만 잘 싸웠다.

굳이 이길 필요 없는 사소한 갈등들에 쓸 시간을 아껴 사랑 받아 마땅한 주변 이들과 충분히 사랑을 나눌 시간을 벌었다.


그래, 이 정도면 괜찮다.

싸움닭처럼 길바닥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랑도, 직장에서 매일 보던 사람이랑도 총질하고 지냈던 과거가 조금씩 희석되고 있다.


희망이 보인다.

비록 아직 색은 옅지만 괜찮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계절 ‘봄’이 살랑살랑 나에게 먼저 다가와 보잘 것 없고 못난 어깨를 토닥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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