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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02. 2024

패배자의 정신승리

오늘도 졌잘싸

어떤 날은 정말이지, 세상이 전쟁터 같다.

총질하지 않았더니 내가 총질을 당하고 있다. 매질하지 않았더니 내가 얻어터지고 있다.  

오! 오늘은 좀 살만한데? 방심하면

어김없이 총알들이 날아와 가슴에 박히고, 동네북이 되어 아주 후들겨맞는다.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들이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길에서도, 카페에서도, 식당에서도,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사람을 가만두질 않는다.

달달 볶이다가 발악을 하면 몸에 신호가 온다.  

위염, 질염, 방광염은 잊을만하면 재발하고 평소엔 존재 자체도 잊고 사는 자궁이나 갑상선도 1~2년에 한번씩 나 여기 있잖아, 괴롭히지마, 힘들어 죽겠어 아우성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늘도 얻어 터지다가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을지 궁리해봤다.

준다고 다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래 방법들은 정신과 약을 끊으면서 실천하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한때 집 밖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던 사회 부적응자가

필수 불가결한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또 멀쩡한 척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가기 위해

일상 속 스트레스들을 쳐내는 방법들.


지혜롭지 않고 건전하지도 않지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다.

소화도 잘 되고 잠도 잘 자는 걸 보면?


피부부터 생각하기

피부가 가장 중요하다. 명품 가방이나 옷, 구두보다 더 중요한 게 피부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두 뺨 위로 발그레하게 올라오는 자연스러운 혈색,

그거라면 거적대기를 걸쳐도 빛이 나는 법.

한번 무너진 피부는 회복이 어렵고, 스트레스는 싱그러운 피부의 주적이다.

이것만 기억해도 고된 하루를 버티기가 한결 낫다.

누가 아무리 일을 떠넘기고 나를 밀치거나 심지어 밟고 지나가도 피부를 생각하면 신경이 꺼진다.

신경쓰고 화내면 피부가 제일 먼저 늙고, 늘어진 피부를 회복하려면 레이저값으로 몇십, 몇백 아니 몇천이 깨질지도 모른다.

모공 없이 매끈하고 잡티 없이 흰 피부만 가질 수 있다면 어지간한 시비는 귓등으로 흘릴 수 있다.


또라이 되기

돌아이: 멍청하거나 정신줄을 놓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

또라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 참은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또라이가 뭐 어때서?  

웬만한 또라이들에겐 또라이가 답이고, 또라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건드리지도 않는다.

욕하고 싶으면 욕하고 물고 싶으면 물고 소리 지르고 싶으면 소리 지르고 남들 다 웃지 않아도 내가 웃으면 깔깔깔깔 웃으며 사는 게 맞다. 울고 싶으면 울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남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는 게 아닌 이상 좀 시끄럽게 굴거나 분위기를 쎄하게 만드는 등의 사소한 민폐는 좀 끼치는 게 좋다.

그래서 요즘은 의식적으로 일주일에 두번 정도 정신줄을 놓는다.

당연한 업무라도 제가요? 왜요? 토를 달기도 하고, 친하지 않은 타 부서 직원들에게 힘들어 죽겠으니까 이건 그 쪽에서 해달라고 졸라도 본다. 그래도 열번 그러면 한번 정도는 통하는 것 같다.

용기가 필요하다.

쟤 또라이래, 소리를 서너번만 들어도 인생이 편하다.


동지 찾아 뒷담화하기

보통 또라이가 아닌 상급 또라이, 진정한 개새끼나 사이코를 마주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땐 같이 또라이가 되어 덤비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피하는 게 좋다.

길에서 눈빛이 선하다며 쫓아오던 사람에게 낄낄 웃으며 또라이짓을 하다가 뺨을 맞은 적이 있다.

이후 이건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싶으면 일단 피한다. 마주칠 일을 최대한 줄인다.

그럼에도 업무적으로 상급 또라이들과 협업이 필요할 때는 동지를 찾는다. 개새끼나 사이코들을 주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최대한 피하고, 피할 수 없을 때는 소심하고 여린 동지들과 신랄하게 험담을 한다. 공감하며 공공의 적을 말로 발아버리는 경험은 짜릿하다. 그러다보면 어느 정도 속이 풀린다. 또 상황을 버틸 힘이 생긴다.

단, 들키지 말아야 한다. 뒷담화(Backbite)여야만 한다.

다수로부터 욕을 먹을 정도로 나쁜 사람은 뒤에서 좀 헐뜯겨도 싸다. 면전에 쌍욕을 박는 것도 아닌데 괜찮다.

다만 그를 함께 욕할 동지들을 찾기가 어렵다면 반성이 필요하다.

혹시 내가 상급 또라이는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될 일이다.


저주하기

착하고 여린 사람들이 남에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 인생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바로 부메랑 법칙, 베푸는 만큼 받는 것.

당장 조금 손해보는 것 같아도 결국 이득이 될 때가 있고, 상대를 이겼다고 기뻐하지만 그 승리가 좋지 않은 결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예컨대 차선을 바꾸려다가 쌍년 소리를 듣고 실패했는데 진입하려던 차선에서 충돌사고가 난다거나 고약한 상사에게 빼앗긴 제안서가 사회적 이슈와 맞물려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욕심이 심하고 늘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언젠가 몸이 축나기 마련이다. 얌체처럼 귀찮은 업무를 남들에게 떠넘기다가는 남들이 그 귀찮은 업무에 매달릴 때 혼자 유휴인력으로 남았다가 더 힘든 기피업무의 담당자로 차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차선을 바꾸려다 끼워주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고 직진한다. 이기려고만 하는 사람에겐 그냥 져준다. 좀 귀찮아도 사소한 업무는 먼저 맡아서 처리하고 고약한 상사는 계속 고약하게 살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저주한다. 승리만 있는 삶은 없기에,

언젠가 그들이 맞닥뜨릴 패배가 나의 자발적 패배보다 훨씬 더 쓰기를.

사소한 갈등에서도 양보하기 싫을 때는 늘 부메랑 법칙을 떠올린다. 새옹지마, 소탐대실. 이건 내가 양보할게. 너는 이번에 이기고 언젠가 더 중요한 문제에서 꼭 지길 바라.


착하고 여려보이는 사람들은 사실 이걸 남들보다 먼저 알게 된, 영악한 여우들일지도 모른다.


연민하기

작은 몸뚱이로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쌍하지 않은 삶이 없다.

다들 아둥바둥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 경쟁하고 발악을 하고 있다. 애쓰는 모습은 짠하다. 그래서 누가 정말 살 떨리게 미울 때는 그의 불쌍한 구석을 찾아내어 동정한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낫다.

일단 며칠째 같은 문제를 계속 틀려 혼나는 내 새끼도 짠하게 보면 화가 덜 난다. 쿠팡에서 물건 주문하는 걸 2주에 한번꼴로 계속 물어보는 우리 엄마도 불쌍하게 보면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이제 집 밖으로 시선을 돌려 본격적으로 연민해봐야지.

카페에서 은근슬쩍 새치기하던 사람은 그린티 프라푸치노에 휘핑크림을 추가할 몸뚱이가 아니던데 불쌍했다. 사무실에서 하루종일 정치이야기만 떠드는 꼰대는 딱히 취미도 없이 정치밖엔 신경쓸 게 없어 보이던데 아무도 동조해주지 않아 참 불쌍하다. 퇴근길 전철에서 내 앞에 난 자리로 슬라이딩해서 앉던 사람은 아이폰 #을 쓰던데 불쌍하다, 나는 아이폰 ## 쓰는데. 스위스로 여행 다녀와서 사진 늘어놓으며 자랑하는 직장동료도 불쌍하다, 나는 강원도만 다녀와도 행복하니까. 도로에서 앞질러 가려는 운전자도, 엘레베이터에 먼저 타려는 사람도, 마트 선착순 할인 코너에 나를 밀치고 가는 사람도 여유라고는 없는 마음들이 불쌍하고, 입만 열면 독설인 상사는 어딜 가든 미운털부터 박고 시작할 것 같아 그 인생이 진심으로 짠하다. 비꼬지 않고는 말을 못하는 애 친구 엄마도 누구와도 속 깊은 대화가 되지 않을테니 불쌍한 인생이고, 별뜻없이 하는 말들을 꼬아 듣고 쏘아대는 입사동기도 나보다 승진이 늦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것 같아 불쌍하며, 툭 하면 갑질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는 거래처 팀장도 어쩌다 그런 피해의식이 생긴 건지 불쌍하기 그지 없다.


구석구석 뜯어보면 세상에 불쌍한 구석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쌍하게 여기면 미워하던 마음이 사그라들고 그러면 나 스스로를 괴롭히던 스트레스도 잦아든다.


물론 남들의 불쌍한 점을 찾아내 스트레스를 다스려야 하는 나의 처지도 누구 못지 않게 불쌍하지만.


폭식하기

위에 나열한 방법이 큰 효과가 없는 날은 먹는다. 엽떡, 불닭, 대창, 곱창부터 시작해 짭짤하고 바삭한 과자들, 진한 초코케이크에 달달한 돌체라떼까지 풀 코스로 달린다. 살은 찌겠지만 그렇게라도 스트레스를 풀지 못해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루쯤 아니 이틀 정도 폭식해도 괜찮다. 커피 때문에 하루이틀 못 자도 큰일 나는 거 아니고 당뇨가 아닌 이상 잠시 혈당 조금 치솟아도 다음날 다시 달려서 떨어뜨리면 된다. 위가 아프면 양배추 먹고 살이 찌면 힘 있을때 다이어트 하면 될 일이다.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큰병을 얻느니, 행복한 돼지로 사는 게 백배 낫다. 마음이 행복해야 오래 건강할 수 있다.


자연보기

배가 터질 것 같은데도 남은 스트레스가 있다면 식상해도 자연을 보는 게 도움이 된다. 서해 바다로 가서 일몰을 보거나 가기 싫으면 동네 오르막길에서 노을이라도 보거나 나가기도 귀찮으면 유튜브에서 새소리, 물소리, 장작 타는 소리라도 듣는 게 좋다. 육아에 목도 어깨도 허리도 끊어지겠고 애들을 혼내다가 머리도 깨질 것만 같아서 오늘은 저녁 내내 빗소리 유튜브를 틀어놓았다. 조금은 낫다. 적어도 폭발하지는 않았으니까.



선천적으로 스트레스에 강한 성격들이 있다. 안들려, 어쩌라고, 너나잘해 개쌍마이웨이 3종 세트가 뇌와 입에 동시 장착된 사람들. 부럽다.

하지만 타고 나지 않았다면 노력하면 될 일이다.

입이 어려우면 뇌에라도 장착시키기 위한 노력, 자잘한 자극들에 둔하게 반응하기 위한 노력, 완벽하지 않기 위한 노력.


오늘도 나처럼 싸워서 진,

아니 졌지만 잘 싸운 착하고 여린 사람들을 응원한다.

나무 꼭대기에 달린 포도는 분명히 시큼한 맛이 났을 거다.

스트레스를 견뎌가며 싸워 쟁취하는 승리보다 소소한 부분에서의 자발적 패배가 훨씬 현명하다.

건강하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삶에서 더 가치 있는 부분들에 집중하기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도 동네북이 되어도 뭐 어때?


스트레스만 받지 않으면 된다.

총알 뽑고 다시 나아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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