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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04. 2024

나의 손절이야기 [2]

딱 거기 있어줄래?

필라테스 학원에서 알고 지낸 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 언니랑 오늘 밥 먹어보니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고,

어색해. 더 만날 이유가 없는 것 같아.

밥값은 반 보낼게.


이어서 5만 8천원 카카오 송금, 받기 완료.

그렇게 6년째 이어온 관계가 끝났다.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동생은 ENTJ, 나는 INTJ였다가 요즘은 INFJ.

동생은 정기적으로 나가는 모임만 5개, 나는 모임 따위 나가지 않는 방구석 여포.

동생은 미혼, 아니 비혼. 나는 결혼 10년차.

동생은 관광파, 나는 휴양파.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걔가 참 좋았다. 달라서 좋았던 걸까?


걔가 만나자면 만났고 걔가 먹고 싶다는 메뉴를 먹었고, 걔가 보자는 영화, 걔가 하자는 외국어 공부까지 나는 거의 모든 걸 동생에게 맞췄다. 나도 고집이 센 편인데 돌이켜보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매일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친구가 생겨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하다가 확인하면 쌓여있는 카톡메시지들이 좋았다. 남편, 엄마, 아이들 외의 사람에게 오는 카톡, 특별한 용건 없이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 받는 수다 카톡. 또 개그코드가 잘 맞았다. 걔랑 대화를 하다보면 3초에 한번씩 터졌다.

동생은 늘 나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책을 읽어도 카페에서 같이 읽고 싶어했고, 읽은 책에 대한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했고, 스파도, 마사지도, 맛집도, 호텔도, 산책도 같이 하자고 졸랐다.


그러다 한달전 처음으로 동생의 운동 제안을 거절했다. 스피닝, 작은 소리도 시끄럽게 느껴지는 나에게 그건 너무 스트레스가 심할 게 뻔했다. 동생은 쿨하게 오케이를 외치더니 혼자 스피닝을 시작했지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매일 뭘 먹는지 뭘 읽는지 보고하던 동생의 카톡이 눈에 띠게 줄었다. 그리고 지난 주, 동생의 여행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가 처음 만나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꾸준히 이야기했던 대만여행이었다.


- 언니, 남편이 그 정도도 허락 안해? 내 친구 남편은 애들 봐줘서 2주씩 파리도 다녀오던데?

밥해야 해?


그 말이 기분 나빴다. 남편이나 애를 챙겨야해서 여행을 거절한 게 아니다. 그냥 대만이 별로였고, 첫 해외여행은 남편이랑 애들이랑 함께 하고 싶었을 뿐이다.


- 나한테 너무 강요하지 않으면 좋겠어.

힘들어.


나는 너한테 강요하지 않잖아? 까지는 말하지 못했다. 힘들다는 소리에 동생이 너무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기 때문이다.


- 혹시 같이 저녁에 산책하는 것도 힘들어? 외국어공부 서로 검사하는 것도?


응,

나는 어렵게 대답했다. 그리고 단방에 손절당했다.

그럴거면 사과는 왜 한 거지?



참 어렵다. 어느 부분에서 그 사람이 좋으면 예상치 못했던 다른 부분에서 탈이 난다.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은 부담스럽고, 멀리서 날 존중해주는 괜찮은 사람들에겐 용기내어 먼저 다가가기가 힘들다.

가까워져도 다 내 마음 같지는 않기에 불편한 부분이 반드시 드러난다. 밥 잘 사주는 예쁜 언니는 남편 자랑이 심하다. 업무를 도맡아하는 동료는 정치색이 맞지 않다. 말이 너무 잘 통하는 상사는 일을 떠넘기고, 식성이 잘 맞는 친구는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한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보니 가끔 궁금하다.

적당한 숫자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 보통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편한 구석이 있어도 참고 관계를 유지하는 걸까? 납작 엎드려서 을이 되어? 왜? 아니면 상대를 굴복시킬 만큼 강한 걸까? 갑으로 군림하며?

하지만 내가 부러워하는, 짙은 관계의 친구가 있는 사람들은 어느 한쪽이 갑이나 을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럼 혹시 나만 빼고 모두 완.벽.한. 인연들을 하늘의 뜻으로 만나 삼삼오오 행복한 걸까? 소중한 추억과 자잘한 일상들을 공유하며?

이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면 포기가 된다. 하지만 그러면 외로움이 말려온다. 독도가 된 기분이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독도.


그나마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사이가 오래 가는데 이게 참 쉽지 않다. 사이가 좋으면 자연스레 거리가 점점 좁혀지다가 한쪽이 혹은 서로가 기어코 선을 넘고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만다. 필라테스 동생이 그랬다. 만났다하면 깔깔대며 웃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연락이 점점 더 잦고 심하게 가까워지더니 결국 탈이 났다.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게 [심적 허용거리]를 표시하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다가오는 상대를 막을 수 있게,

상대에게 다가갈 때 조심할 수 있게.


삐빅- 그만, 더 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홀라당 타지 않고 오래오래 온기를 유지하려면

딱 거기 있어주세요.



매일 연락하던 동생과 손절하고 마음이 헛헛해 독서모임에 나갈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겁이 나는 걸 보니 아직 상처가 남았나보다. 6년을 만났는데,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바로 날 버리다니 너무했다. 스피닝 제안이나 대만여행을 내가 조금 더 따뜻하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동생이랑 평생 갈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애초 따뜻한 거절이란 없고 거절할 제안을 하는 사람과는 언젠가 반드시 끝이 난다.


월요일의 만남은 대만여행을 거절하고 2주가 지난 시점이었다. 한동안 서로 카톡도 뜸하고 냉랭하다가 이자카야에서 동생을 만났다. 내가 지난 겨울에 가보고 맛도 분위기도 괜찮기에 예약해뒀다가 걔한테 처음으로 먼저 같이 가자고 제안한 식당이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힘들게 한 예약을 취소하기 싫었고, 동생과 잘 풀어보고 싶기도 했고, 여행을 함께 못 가서 미안하다고도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고도 싶었다.

동생도 같은 마음이라 그 자리에 나왔겠거니 했다. 하지만 동생은 밥을 먹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갑게 밥만 먹었다. 정말 너무 불편하고 어색한, 고역의 시간이었다.


-야, 아직 화났어? 에이, 화풀어라.

미안해애애애애. 여행가자. 대만 까짓 거 가지, 뭐!


호탕한 목소리로 수십번 머릿속에서 재생했지만 그런 말이 입밖으로 터져나오지는 못했다. 나는 쉽게 얼지 않지만 먼저 얼음을 깨는 건 절대 못하는 사람이다. 동생은 식사가 끝날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 여기 되게 맛없다. 합정동에 나 아는 이자카야 있는데 거기가 진짜 맛있어.


동생은 오랜 관계의 마지막 약속을 의무적으로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러지 말지, 차라리 전화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예의가 없었다.

그래서 거절하여 미안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목구멍에 고이 담아 갔던 서툴렀던 표현방식에 대한 사과는 꺼내놓지 않았다. 6년, 놀 사람이 필요했던 불우이웃에게 적선한 걸로 치기로 했다. 괘씸하지만 머리채를 뜯고 싸울 필요까진 없으니까.


그리고 그날밤, 철마다 색색의 뜨개가방을 선물하는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받았다.


- 오, 받네?


나는 전화를 받고 싶을 때만 받는다. 언니가 문자로 특별히 힘들다며 목소리 듣자고 하지 않는 이상, 잘 받지 않는다. 이유는 첫째, 테너 수준의 낮은 목소리가 자신 없다. 둘째, 목소리가 자신 없으니 얼굴을 보지 않고 소리로만 소통하는 게 어색하다.


그런데 그날은 내가 힘들어서 받았다.

받아서 한참 울었다.


- 속상했겠다. 야, 됐어. 나나 만나.

가방 떠놨다.


전화를 받고 싶을 때만 받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언니가 좋다.

언니는 항상 딱 거기에 있다.


나도 언니에게 항상 딱 거기 있는 동생이고 싶다.



오늘은 저녁에 혼자 그 이자카야에 다시 갔다. 속상했던 기억 때문에 더 이상 그 식당 음식이 맛이 없을까봐 걱정이 되어 확인하고 싶었다, 는 무슨?

그냥 오늘도 회가 먹고 싶었다.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들은 여전히 하나하나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참 다행이다. 맛이 그대로라서,

내가 돼지라서.


마음을 글로 쓰며 정리할 수 있는 돼지라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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