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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08. 2024

자, 쉽게 설명할게?

꼰대주의보

사내 게시판에 승진발령 공고가 났다.

대리 승진자 명단에 옆 부서 이사원이 보인다. 일을 잘 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해서 눈 여겨보던 친구다.

축하의 말을 건네려 다가갔다.


- 승진 축하해, 이대리.

- 감사합니다.


이대리가 쑥스러운 듯 웃는다. 귀엽기는!


- 이대리가 올해 몇 살이지? 아니, 요즘 한국식 나이 그런 거 헷갈리니까 몇 년생인지 말해봐.

무슨 띠야? 돼지띠? 그럼 서른이네? 야, 세상 참 좋아졌다. 나는 서른 후반에나 대리 달았어. 이대리 승진 빠른 거 그거 다 나같은 허리층 덕분인 거 알지? 이대리 나이 때 나는 진짜 처자식 내팽개치고 매달렸다.

그래서 회사 몸집 키워가지고 요즘엔 서른에 벌써 대리 달고 그러는 거야.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던 이대리가 갑자기 몸을 모니터 쪽으로 휙 돌린다. 사람 말하는 중에 저게 무슨 건방진 태도지? 일부러 그런 거 같진 않다.

평소 편의점 캔 커피나 삶은 계란, 기한이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녹즙 같은 걸 챙겨주면 엄청 고마워하던 그다.

그래, 뭐 까짓 거 모르면 가르쳐주면 될 일이다.


- 이대리, 사람 말하는데 그렇게 등 돌리는 건 아니야.

- 죄송합니다.

- 아니, 죄송하다는 소리 듣자는 거 아니고 나는 괜찮아. 나중에 딴데 가서 그러다가 욕 먹을까봐 내가 가르쳐주는 거야. 나도 예전에 그랬어. 모르고 그럴 수 있지.

이제 대리도 달았으니까 내가 몇 가지만 알려줄게. 내 말만 들어도 회사생활 반절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특별할 것도 없어. 여기 청소해주시는 분들 계시지? 그분들이 휴지통 비워주면 고맙습니다 한 마디 하고, 가끔 음료수 같은 거 좀 챙겨드리고 말이야. 그리고 부서 따지지 말고 서로 도와가며 일해. 그거 중요하다? 우리 부서 박대리가 협업 요청하면 잘 좀 도와줘. 이대리가 박대리 도와주면 우린 뭐 또 가만히 있나? 나중에 이대리 힘들 때 또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지 않겠어? 또 회식 있으면 빠지지 말고 참석하고, 애 핑계 대고 빠지지 말고 알았지. 수요일 회식 오는 거지?

- 어린이집에 애 데리러 가야해요.


애 핑계 대지 말라고 3초 전에 말했는데 개기는 건가?


- 애 봐줄 사람이 그렇게 없어? 나는 주말에도 애 업고 나와서 일했다, 이대리. 요즘은 애들 키우기도 얼마나 좋아? 애 낳으면 애국자 대접에 나라에서 돈도 몇 천이 나온다던데 사람 써. 사람 쓰고 회사생활 잘하는 게 멀리 보면 이득이야. 내가 다 해봐서 알ㅇ......


까지 말하는데 이번엔 이대리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 급한 전화가 와서요. 죄송합니다.


저런 애들이 제일 싫다. 근무시간에 사적인 통화를 왜 하는 거지? 부서는 달라도 내가 윗사람인데 말하는 중에 끊고 전화를 받으러 나가? 심지어 서둘러 나가는 이대리 손에 들린 폰 화면이 어째 평온해보인다.

저래가지고 직장생활 어떻게 할지 염려스럽다. 어른으로서 마땅히 가르쳐야 할 의무란 게 있는데 쉽지 않다.

배울 태도가 되어 있지 않은 애들에게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다가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꼰대: 노인, 기성세대나 선생을 뜻하는 은어이자 멸칭. 점차 원래의 의미에서 의미가 확장, 변형되어 연령대와는 상관없이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악질 부정행위자를 비하하는 멸칭으로 사용된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꼰대 테스트를 서너개 해보았다. 10개 항목에서 6개 이상 나오면 꼰대라는데 나는 적게는 8개 많게는 9개가 해당되었다.

이럴 수가, 내가 꼰대라고?

누가 나의 과거를 물어봐주면 좋겠고, 잘 나가는 후배를 보면 집요하게 단점을 찾게 되고, 사생활도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줄 의향이 있고,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로 꼰대라고?

그러고 보니 꼬맹이들한테 라떼타령도 종종 한다.

나 때는 이런 장난감 없었는데 너네 되게 좋겠다. 세상 참 좋아졌어.

엄마는 학원 하나 안 다니고도 시험만 봤다 하면 백점이었어. 더 열심히 해야지.

세상에, 나 꼰대 맞네. 어쩐지 꼰대 입장에서 쓴 글이 막힘없이 술술 풀리더라니.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이대리의 입장이다. 구체적인 직함과 나이 등은 각색했지만 하루에도 서너번씩 저런 꼰대들에게 시달리곤 한다.

삶은 계란은 방귀 냄새가 나서 싫은데 마다해도 자꾸 가져다준다. 편의점 캔 커피는 주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른데 연봉이 나의 2배 가까이 되는 사람이 프라푸치노도 슈크림 라떼도 아니고 캔 커피를 주는 건 돈은 쓰기 싫고 생색은 내고 싶은 좀스러운 마음의 반영이라 본다.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 지난 녹즙을 모아다가 선심쓰듯 주는 건 최악이다. 경계 없이 협업하라는 조언도 그렇다. 내가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90% 이상은 받을 때는 땡큐, 내가 간절할 때는 누구세요? 였다. 말이 좋아 협업이지, 엄밀히 말하면 사기멘트다. 서로 돕기는 개뿔, 필요할 때만 쭉쭉 뽑아갈 거면서.

사적인 대화 자체를 제발 걸지 말았으면 한다. 꼰대들은 어느 정도 선을 넘어야 회사가 잘 돌아간다고 믿는 것 같은데 나는 정시 퇴근이 하고 싶어 똥줄이 타는 사람이다.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서 물도 조금만 마셔가며 일한다. 모니터에서 고개를 돌리는 시간 1초도 아깝다. 물론 그런 모습이 누군가의 시선에는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보여 불편할 수 있다는 거 안다. 여유없고 늘 초조하고 불안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쟤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할 수 없는 걸까? 내가 누구에게 물 조금만 마셔요, 화장실 갈 시간 아껴서 일하세요, 그리고 칼퇴하세요! 강요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헬스장에 가도 그런 사람들이 꼭 있다. 자기랑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는 꼴을 용납하지 못한다. 레그프레스 할때 허리에 긴장을 빼라든가 유산소는 20분 하고 끊어서 하라든가, 덜덜이는 운동이 되지 않는다, 랫풀다운은 어깨를 쫘악 펴라 등등. 그들은 허리 긴장이든 어깨 쫙이든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가 되지 않는다. 대쪽같다. 일단 내가 옳고 너는 틀렸고, 너를 생각해서 가르쳐주는 거야, 고맙지? 가 디폴트다.



결국 설득의 문제인 것 같다. 결혼 왜 안해? 물어볼 수 있고 결혼 왜 했어? 물어볼 수 있지만 결혼하지마 혹은 결혼해 설득하기 시작하면 그건 꼰대다. 왜 딩크야? 물어보는 거 정상이고 애 왜 낳았어? 물어볼 수 있지만 애를 낳아라 말아라 설득하면 그것도 꼰대다. 같은 맥락에서 둘째 안 낳니? 도 꼰대, 아들 둘이면 딸 하나는 있어야지 혹은 딸 둘이면 아들 하나는 있어야지 도 꼰대, 애를 셋이나 낳아서 어떻게 키울래? 도 꼰대다. 애가 하나면 하나인 이유가, 둘 낳았으면 둘 낳은 이유가, 셋 낳았으면 셋 키울 만큼 경제력이 되겠거니 거기까지만 해야 옳다. 자신의 상황을 기준으로 남의 인생을 판단하려 드는 순간 탕탕탕! 꼰대 당첨이다.


사고의 유연성이 없으면 용기도 없어야 하는데, 꼰대들은 사고의 유연성은 없으면서 지나치게 호기롭다.

호기롭게 자신의 경험에만 기반한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니 무례하고,

무례하니까 당연히 거부감이 들 수밖에.

글을 쓰다보니 최근 나를 손절한 동생이 떠올랐다.

해외여행 가지 않겠다는 나를 설득하고, 요가가 좋은 내게 스피닝을 같이 하자고 조르고, 한국에서 결혼하는 건 인생을 망치는 짓이라며 한국에서 결혼한 나의 앞에서 핏대 세우며 의견을 개진하던 그 아이.

카톡 대화창에도 느낌표를 남발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말에 확신이 가득하던 동생은 말줄임표를 많이 쓰는 내게 그건 노화의 신호라며 자제하라고 충고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말 그대로 젊꼰, 젊은 꼰대가 따로 없다. 그래서 내가 어느 순간부터 걔를 싫어했나보다.

꼰대 같은 속어 말고, 틀딱처럼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불쾌한 표현 말고, 또 내로남불 같은 줄임말도 말고

다른 세련된 표현이 있으면 좋겠다.

꽉 막힌 사람? 융통성 없는 인간? 너무 길다.

나이가 적든 많든 남자든 여자든 지나치게 남의 인생에 개입하고 설득하려 하는 권위주의자들을 일컫는,

찰떡같은 표준어가 필요하다.

시도때도 없이 나타나서 남의 인생에 훼방놓는 그들을 교양있게 공격할 수 있도록.


 꼰대 테스트에서 꼰대로 나오긴 했지만 생각으로만 한 테스트니까 나는 생각만 꼰대라고 애써 위로해본다. 겉으로 봐선 아직 괜찮다. 방구석 여포라 현실에선 남에게 찍 소리도 못하는 사람이니까 희망이 있다. 요가하듯이 생각도 쭉쭉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해봐야겠다. 요가를 꽤 오래 했고 곧잘 하니까 생각의 요가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희안한 용기가 난다.

나이를 먹을 수록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들로만 상황을 판단하려는 버릇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러니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의식적으로 조심을 해야 한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해도 범죄가 아닌 이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넘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으로 꼬맹이들에게도 라떼타령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아차하면 꼰대 되는 거? 한순간이다.

 


 요즘 터질 것이 터진 듯한 오랜 관계들의 단절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인간관계가 다 떨어져나가고 몇몇 남지 않은 앙상한 가지들을 붙잡은 채 겨우 버티고 있다.

그러면서 폭식을 했더니 세상에 2주 만에 5kg가 쪘다.


눈물을 머금고 다이어트를 결심한 오늘 저녁, 밥을 반그릇만 담았더니 남편이 놀란다.


- 밥을 그렇게 조금 먹어?


너무 걱정스러운 시선에 걱정 말라고,

그냥 한동안 조금 덜 먹고 살을 빼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다.


- 먹는 걸 줄여서 살을 뺀다고? 당신 그러다 요요온다. 다이어트 그거 내가 쉽게 설명해줄게. 내 말만 들으면 5kg 금방 빠져. 자, 잘 들어.



...... 응?


쉽게 설명할게, 내 말만 들으면 돼,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저 어마어마한 세 문장을 한 호흡에 다 뱉어내다니......

소름.


이 사람 언제 이렇게 꼰대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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