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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성 Apr 11. 2024

걱정할까봐 걱정하는 이야기

Today is Windy

꼬박 2주를 기다린 자궁경부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두어달 전부터 생리주기랑 관계 없이 아랫배에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지속되었고 생리량이 확 즐었으며 분비물도 늘었더랬다. 또 피곤했다. 별것 없는 하루도 저녁 9시만 되면 곯아 떨어졌다.인터넷으로 이런 증상들에 대해 면밀히 검색하다보니 이건 뭐 곧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중병의 시작이라 덜컥 겁이 났다. 내시경부터 복부 초음파, 갑상선 수치를 보는 피검사까지 줄줄이 받은 결과 정상 소리를 듣고 마지막으로 찾은 게 산부인과였다. 그런데 자궁경부 검진에서 비정형세포(Ascus)가 발견되었다.


작년 가을 검사에서도 정상이었는데 짧은 시간동안 왜 이렇게 된 걸까? 정상이던 세포의 모양이 왜 변형된 거지? 의사는 자궁경부검진도 특정 부분을 보는 거라 가을에 보이지 않았을 뿐 검사범위에서 제외되었던 경부 일부에서 이미 세포 변형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잔뜩 쥐고 있던 주먹의 힘이 스르르 빠져 나갔다. 낯선 무게감이 눈꺼풀로 올라탔다. 일을 미루는 직장 상사도, 일을 튕겨내는 옆 부서 직원도, 일을 못해서 흘러 넘친 일에 내 옷까지 젖게 만드는 후배도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떠났다. 걱정과 스트레스가 온통 자궁으로 치우치자 나머지 문제들은 가볍게 흩어졌다.


의사는 초음파와 확대경 검사까지 하고도 조직검사를 권했고 검사시 통증은 따끔한 정도이며, 2주 후에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수술실에서 하는 조직검사가 떠올랐다. 의사가 어두운 목소리로 주저하며 말하는 “조직검사 결과......” 대사가 떠올라 두려웠다. 하지만 검사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아 끝났고, 의사는 너무 걱정말라며 행여 암이라도 초기일테니 자궁경부를 원뿔모양으로 도려내기만(?) 하면 된다며 원추절제술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역설법인가? 양립할 수 없는 두 표현, 걱정마 와 원추절제술 을 억지로 짜맞추어 강조를 노리는......


그로부터 2주, 피가 마르는 시간이 흘렀다. 네이버 근종힐링 카페 자궁경부 게시판에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을 정독했다. 애들 걱정, 남편 걱정, 친정엄마 걱정에 울다가 또 회사에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게 일하고 글도 쓰고 일상을 이었다. 와중에도 직장 상사는 일을 미루고, 옆 부서 직원은 일을 튕겨내고, 후배는 사고를 쳐서 내가 수습하게 만들었지만 정신이 24시간 산부인과에 가 있다보니 별 감흥이 없었다. 도로에서 누가 확 끼어들어도, 마트에서 내가 집으려던 딸기를 누가 휙 밀치고 집어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착하게 지내면 조직검사 결과가 괜찮지 않을까, 내가 집으려다 빼앗긴 저 딸기가 불운이라면 좋을텐데 같은 비합리적 신념들이 점점 머릿속을 지배했다. 언젠가 마주친 길거리 도인들도 떠올랐다. 조상님들에게 재물을 바쳐야 복을 받는다며 같이 가자던 그들.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정성을 올려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때 산부인과에서 전화가 왔다.


- 윤성님, 경부 조직검사 결과 괜찮습니다. 바이러스도 없으니 3개월 지나고 추적검사 받으러 오세요.


홀가분해진 마음 덕분인지 오후 내내 일이 잘 풀렸다.

퇴근하고선 가족들과 산책에 나섰다. 요즘 동네에도 벚꽃이 한창이다. 까만 밤하늘가 대비되는 벚꽃잎 색깔이 눈부시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옹기종기 걸으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2주 간 자궁에만 쏠렸던 근심들이 벚꽃잎과 함께 흩날려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때 폰 진동이 울렸다.

집주인, 3개월 후 실거주로 입주 예정이니 집을 비워달라는 요청.



걱정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복병은 항상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터진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설마, 싶은 일은 터지고 어떡해, 싶은 일은 지나간다.

이것만 명심해도 마음이 한결 편하다. 걱정은 쓸모가 없으니까. 어떡해든 설마든 차분하게 대비하면 될 일이다. 자잘한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게 말은 참 쉽다.


말만 쉽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자잘하게 혹은 휘청거릴 정도로 바람이 분다.

물론 햇볕도 쏟아진다. 어떤 날엔 폭풍우가 휘몰아치기도 하고, 또 다른 어떤 날엔 높고 파란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이 흘러가기도 한다.

굳건히 뿌리 내려 그 모든 날들을 자양분 삼아서 자라는 나무 같은 사람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잡초다. 가느다랗고 연한 잡초,

키만 큰 잡초.

언뜻 멀쩡해보이지만 바람만 불면 이리저리 팔랑대고 햇볕이 조금만 세도 노랗게 색이 바래는 잡초.

잡초는 늘 걱정한다.

비가 오면 어쩌나, 바람이 불면 어쩌나.

잡초의 걱정은 아무런 힘도 없는데 말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린 친구들과의 식사는 예상치 못했던 멤버의 술주정으로 엉망이 되고, 빠질 핑계가 없어 끌려간 회식자리는 의외로 즐겁다. 부담되어 시작조차 못했던 업무는 막상 해보니 별게 아니라 금방 끝나고, 까짓거 5분이면 하지 싶었던 일은 예상치 못한 복병에 반나절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어제까지 상사 때문에 힘들어하는 날 위로해주던 동료가 오늘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걸 알게 되고, 나를 갈구던 상사가 나를 이 달의 우수사원으로 추천한 걸 듣기도 하고, 미국에 있어 최소 6년은 한국에 들어올 일이 없으니 편하게 오래 지내라던 집주인은 갑작스러운 발령으로 1년 반만에 집을 빼라 통보하고, 피를 말리며 기다렸던 조직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오고......

정말 쉴새없이 바람이 분다. 아무리 걱정하고 대비해도 크고 작은 바람은 끝도 없이 불어온다.


하지만 나는 쉽게 행복한 사람이다. 바람에 휘청대다가도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내어주는 따끈한 메밀차 한 잔에 기분이 사르르 녹는다. 메밀차의 온도가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적당히 따끈해서 행복하다. 카페에서 먼저 나가다가 나 나오라고 문을 잡아주는 사람 덕분에 또 가슴이 따끈하게 데워지고, 먼저 가라고 기꺼이 차선 변경을 허락해주는 사람이 있어 두근대던 마음이 평온해지고, 산책길에 먹은 수박바가 상큼하고 달달하고, 퇴근 후 녹초가 되어 후다닥 만든 토마토 카레가 맛이 꽤 근사해서 행복하다. 후식으로 마신 디카페인 슈크림라떼의 슈크림 높이를 옵션으로 높일 수 있어 좋고 맛있는 크림이 리필까지 된다니 더욱 행복하다. 행복을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또 행복하다.

맛있어서 행복하고 글을 써서 행복한,

글쓰는 돼지.


내가 이토록 쉬운 사람이라 좋다.

비바람에 하루하루 고되어도 먹고 쓰는 걸로 충분히 행복하다. 고작 먹고 쓰는 게 내겐 고작이 아니라 참 좋다. 거창하게 먹고 대단한 걸 쓰는 게 아니어도 된다. 플레이팅이 화려한 숙성회도 좋지만 수산시장에서 막 썰어주는 광어나 오징어회도 맛있는 것처럼, 투뿔한우도 맛있지만 삼겹살에 파김치도 기가 막힌 것처럼, 예쁜 레터링 케이크도 좋지만 별 장식 없는 파리바게뜨 순우유 케이크도 우유랑 먹으면 끝도 없이 먹히는 것처럼 세상엔 가격 대비 맛있는 음식들이 차고 넘친다. 비싼 요리를 찾아 먹지 않아도 삼각김밥이나 육개장 사발면, 바나나우유, 자갈치 정도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이런 만만한 입맛을 가진 내가 마음에 든다.

글도 마찬가지다. 쉽게 쓰고, 쉽게 읽히고, 읽으면 쉽게 미소짓게 되는 그런 글을 쓰는 게 목표다. 대단한 정보를 전달하거나 엄청난 찬사를 받는 게 아닌, 고작 그런 목표라 딱 좋다.


하지만 흔들리는 것도 쉬우니 문제다.

쉽게 행복하지만 흔들리는 건 어려운 사람이고 싶은데

쉽게 행복한만큼 흔들리는 것도 쉽다보니 감정이 들쑥날쑥한다. 당장 내일부터 전셋집도 알아봐야 하고 이사업체와 청소업체도 검색해야 하는데 마음만 급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대화를 하다가 남편과 자연스레 갈등도 생겼다.

튼튼한 뿌리만 있다면 비도 바람도 즐길 수 있을텐데, 마흔이 되고도 아직 수시로 흔들린다.

어렵게 흔들리고 쉽게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벽이 아니라 뿌리라는 걸 다시

한번 다짐하는 하루다. 애초에 모든 바람을 막아주는 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걸 모르고 긴 시간 벽을 찾아 헤매며 벽 뒤에 뿌리 내리지 못한 운명을 탓했다.

왜 이렇게 건드리는 인간들이 끝도 없이 나타나는지

투덜거렸다.

자잘한 바람 따위 지나가게 두면 그만인데 말이다.


업무속도가 느리고 불평불만이 많다며 내욕을 하고 다니는 동료에게 왜 그러냐 묻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따지고 물어 싸우거나 똑같이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녔겠지만 귓가에 스치는 자잘한 바람을 폭풍으로 키우고 싶지 않다. 바람은 지나가게 두고, 누군가 건네는 똥은 손으로 받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적이 최근에 또 있었다.

나와 업무 때문에 생겼던 갈등을 자기 입맛대로 편집해 상사에게 울면서 보고하고, 사내 게시판에 하소연한 직원이 있었다.

감정이 요동치는 그 사람에게 난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마치 더글로리의 하도영처럼,

왜 답장이 없냐는 박연진에게 “했어, 무응답으로.” 라고 받아치던 배우의 표정으로 침묵했다.

처음엔 입이 근질거리고 손이 근질거리고 화도 났지만 그런 건 금방 지나갔다. 상사는 별 말이 없었고, 대처가 현명하다며 격려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우아한 사람들이 무례한 사람들을 마주할 때 쓰는 대응방식을 너무 늦게 알았다. 미친년 썩을놈 욕하고 광장 한가운데 서서 머리채를 잡아 뜯으며 고되게도 살았다.

최근 고작 두번 그러지 않은 걸로도, 한 단계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아 또 이렇게 쉽게 행복해지는 밤이다.



사람들이 나를 좋지 않게 볼까봐, 몸 어디가 아플까봐, 일이 고될까봐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선천적으로 예민하고 걱정이 많고 착하고 여리다면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된다. 노력해서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뭔일이 생길까봐 걱정을 하는데 걱정되어 하는 과한 반응과 스트레스가 결국 뭔일로 이어지니까 뭐 어때 몰라 어쩌라고, 뻔뻔하게 맞설 용기가 필요하다.

누가 내 욕을 하면 한번쯤 돌아보면 된다. 별게 없으면 떳떳하게 내 갈길 가면 그만이다. 병은 검사를 받고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게 최선일 뿐,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병을 키운다. 이사는 하면 되고, 빠듯하면 대출을 좀 더 받으면 되고 대출 상환이 막막하면 그 걱정과 스트레스 때문에 나중에 병원비가 대출보다 더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나를 이해하는 사람에겐 변명이 필요없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변명이 소용없다는 것도 수시로 되뇌야 한다. 자꾸 까먹는다.

화가 나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졸리면 자고, 잠이 안 오면 넷플릭스나 유투브를 보고,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오면 약을 처방받아 먹어도 좋다. 그래도 괜찮다.

아무 힘도 없는 릴레이 걱정보다는 해야할 일들을 차곡차곡 하면서 바람이 지나가게 두는 의연함이 필요하다. 뻔뻔하게 그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아 시원하다 상쾌해! 한 마디 해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걱정으로 시작한 이 글도 결국 이런저런 걱정들로 구구절절 길어져서 또 걱정이 된다.












휴,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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